낮 / 3-2
햇살이 조금 더 기울었다.
부엌 쪽 창문으로 들어와 벽을 타고
바닥 위에 가만히 머물렀다.
밝음은 천천히 퍼졌고,
그 가장자리에 얇은 그늘이 기대듯 겹쳐졌다.
빛과 그림자가 한 공간에 조용히 공존하는 순간.
마치 서로에게 방해되지 않기 위해 약속이라도 한 듯,
조용하고도 정돈된 풍경이었다.
물을 올리고, 커피를 갈았다.
분쇄된 원두 위로 천천히 물을 부었다.
드립퍼에서 떨어지는 커피는
방금 깨어난 마음처럼 잔잔했고,
피어오르는 김은 손끝을 감싸며 온기를 남겼다.
머그잔을 들어 입에 가져갔다.
따뜻함이 혀끝에 닿고,
고요하게 마음 안으로 스며들었다.
방금 끓인 커피인데도,
어쩐지 아침보다 한결 부드럽게 느껴졌다.
조금 식은 감정 같은,
그러나 여전히 따뜻한 무언가가
잔 속에서 조용히 일렁였다.
⸻
마당에 놓인 나무 의자에 앉았다.
손바닥에 닿은 햇살은 따뜻했지만,
그 온기를 바람이 금세 가져갔다.
햇빛이 닿지 않는 자리는 아직 쌀쌀했다.
그러니까 지금은,
봄을 가장한 겨울과 겨울을 닮은
봄 사이 어딘가를 걷고 있는 시간이었다.
의자 옆으로 내 그림자가 살짝 기대어 누워 있었다.
가만히 앉아 있자니,
고요함이 바닥에 물 번지듯
천천히 마음으로 스며들었다.
아무 일도 없었고,
어디에도 가지 않았지만,
이 고요는 오히려 내 마음속에 남아 있던
어떤 흐름을 드러나게 했다.
그리고 그 틈 사이로,
외로움이 아주 조용히 자리를 깔았다.
그건 갑자기 들이닥친 감정이 아니었다.
언제부터인가 익숙해진 얼굴.
하지만 아직도 완전히 친해지지 못한, 낯선 손님처럼.
⸻
예전엔 외로움이 느껴지면 애써 피해보려 했다.
산책을 나가거나, 휴대폰을 들여다보거나,
누군가에게 뜬금없이 메시지를 보내보기도 했었다.
하지만 요즘은 그냥 그대로 있었다.
외로움은 마치 의자 하나를 더 끌어와
내 옆에 나란히 앉는 것처럼 느껴졌다.
침묵은 이어졌고,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내가 나 자신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도시의 소음 속에선
늘 누군가의 시선, 반응, 계획 속에 있었다.
이 조용한 낮은 그래서 더 낯설고 귀했다.
마치 어릴 적,
아무도 없는 거실에 앉아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 시간처럼.
혼자인데, 안전했고. 조용한데, 온기가 있었다.
이젠 조금은 안다.
그 감정은 밀어낸다고 해서
쉽게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걸.
어쩌면, 가끔은 함께 앉아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다는 걸.
⸻
혼자인 낮.
그건 쓸쓸함이 아니라,
잠시 나와 마주 앉는 시간이었다.
세상의 속도와 거리를 두고,
내 안의 작은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간.
돌담 위로 아침에 보았던 고양이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부드럽게 솟은 등을 따라,
그 몸짓은 느릿했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을 아는 듯,
조용히 담장 위를 걸어갔다.
나는 그 걸음을 바라보다가 문득,
나도 지금,
내 안의 어떤 조용한 경로를
따라 걷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누구에게도 방해되지 않게, 천천히.
그저 내 안의 고요와 함께
나아가는 중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 걸음을 따라 잠시 시선을 옮기고,
빈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잔은 비어 있었지만,
그 안엔 여전히 따뜻함이 남아 있었다.
그게, 지금의 마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