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비리

D+2

by 지안

코 고는 소리에 잠을 설칠까 걱정했지만 진한 피로 덕에 꿀잠을 잘 수 있었다. 05:45. 기상했다. 2층 침대에서 내려와 발을 딛는 순간, 아찔한 통증이 순식간에 온몸은 관통했다. 나아지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아주 조금 나아진 정도라 낙심했다. 이상하게 발목은 거의 나은 듯했다. 나는 침낭과 소지품을 정리하고 씻었다. 창 밖을 보니 아직 어둠이 가득했다. 배낭을 챙겨 1층 로비로 행했다.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길을 떠날 채비를 마친 순례자 몇 명이 비와 어둠을 가로질러 나아갔다. 나는 조식을 먹기 위해 어제와 같은 식당에 갔다. 한국인 순례자 3명이 4인용 테이블에 앉아있었고, 머뭇거리는 나를 불러 앉혔다. 그들 모두 이 식당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이었다. 4명이 모이자 직원이 왔고, 조식 티켓을 수거해 갔다. 이어서 빵과 주스, 버터, 잼, 커피를 제공했다. 우리는 어제의 경험담을 서로 이야기하며 식사를 이어갔다. 어느 정도 고됨을 예상했지만, 이토록 힘들지는 몰랐다는 이야기가 주된 주제였다. 순례길을 하루 걸었을 뿐인데 이토록 초췌해질 줄은 몰랐다며 모두 쓴웃음을 지으며 공감했다. 오늘 우리의 목적지는 약 23k 떨어진 ‘수비리’로 모두 같았다. 같은 날 생장에서 출발한 사람들은 웬만해서 4일 차 목적지까지 같은 일정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명은 다른 일행과 동행하러 떠났고, 나는 혼자 온 두 명의 순례자와 함께 출발했다. 비는 그쳤지만 금방이라도 다시 쏟아질 듯 구름이 낮게 떠있었고, 하늘은 어두웠다. 우리는 떠나기 전 각자가 품은 고민과 걱정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걸었다. 비슷한 고민이었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 내가 지금 잘 살고 있는지에 대한 걱정.

작은 숲길을 지나니 아스팔트 도로가 나왔고, 1km쯤 떨어진 곳에 마을이 보였다. 먹구름은 빠른 속도로 걷혀갔고, 그 사이로 새파란 하늘과 일출의 붉은빛이 새어 나왔다. 마을로 진입하니 2차선 도로 양 옆에 거의 비슷한 외관으로 지어진 2,3층짜리 주택이 줄지어 있었다. 흰 벽에 사다리꼴 적색 지붕으로 지어진 집마다 작은 마당이 있었고, 개성 담긴 꽃들이 심어져 있었다.

마을 중심부에는 작은 공원이 딸린 아담한 성당이 있었다. 그곳에 멈춰 서서 사진을 찍고 있는 순례자들을 따라 나도 재빨리 사진을 찍었다. 짧은 감상을 마치고 다시 걸었다. 출발한 지 한 시간을 조금 넘긴 시점, 생각보다 잠잠했던 발의 고통이 갈 길을 잃은 개미처럼 나의 몸을 타고 기어올라 나의 신경을 거스르기 시작했다. 길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고통이 짙어질 게 분명했다. 나는 동행과 작별을 고하고, 나의 원래 걸음 속도로 조금 빠르게 나아갔다. 내 보폭은 생각보다 넓었고, 속도도 빨랐다. 나보다 앞서 걷는 순례자들을 추월하기 일쑤였다. 알아본 바에 의하면 성인 기준 평균 4~4.5km/h로 걷는다고 하던데, 나는 시간당 5.2km/h로 걸었다. 배낭을 메고 걷는 속도치고 무척 빠른 편이었다.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 이유로 순례길을 걷는 동안 계속 혼자 걸었다. 그리고 걸으면 걸을수록 걷기에 익숙해졌고, 나만의 리듬이 생겨갔다.

무척 낮고 완만한 산길을 걷다 보면 윈도 xp 배경과 같은 풍경이 나왔고, 그곳엔 소나 말들이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곳곳에 표시된 노란 화살표를 따라 계속 걸었다. 30분을 더 걸으니 아까 봤던 마을과 똑같은 집들이 있는 마을이 나왔다. 어제와 같이 시간이 지날수록 길에서 보이는 순례자는 드물어져 갔다. 마을을 지나니 다시 산길이 나왔다. 전에도 말했지만 이곳 산길은 우리나라 산길과는 달랐다. 대부분 평지만큼 완만했고, 전반적으로 험하지 않았다. 언덕길을 오르고 숨 돌릴 겸 뒤를 돌아보니, 나뭇잎 사이로 어제 걸었던 것으로 보이는 산맥이 멀리서 보였다. ‘내가 저곳을 걸었을 텐데, 지금은 이 먼 곳에서 그곳을 바라보고 있다니.’ 괜히 신기하고 벅찼다.

산속 중심부에 이르자 제주 사려니숲과 같은 풍경이 나를 반겼다. 나무들 사이로 갈라지는 햇빛은 성스럽게 느껴졌고, 숲의 향기는 온몸의 세포들을 환기시켰다. 정신과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맑아졌지만, 발은 여전히 고통스러웠다. 짧은 감상 후, 다시 발걸음을 이었다. 30분 정도 숲길을 걸으니 ‘에로’라 불리는 마을이 나왔다. 가장 먼저 BAR가 눈에 들어왔다. 어제 경험한 바에 의하면 쉬는 시간을 가지면 편하긴 하지만 리듬이 깨져서 더 힘든 느낌이 들었다. 나는 커피를 마시며 휴식을 취하고 있는 순례자들을 그대로 지나쳤다.

작은 마을이라 그곳에서 금방 벗어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산길을 마주했다. 좁게 나있는 길은 이름 모를 나무들과 풀잎들로 가득 매워져 완벽한 터널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햇살을 받기 위해 빈틈없이 매워진 풀잎 덕택에 하늘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인공적인 느낌이 드는 완벽한 숲길을 감상하며 40여분을 걸으니 내리막이 시작되었다. 내리막은 지옥이었다. 파도 물결처럼 사선으로 돌이 갈라져있는 불규칙한 계단식 길이었다. 돌 결 사이사이는 조각난 돌들로 매워져 있었다. 한걸음 한걸음마다 체중이 발에 실렸고, 돌들은 매 순간 디딤발을 훼방했다. 배낭은 중력으로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오로지 ‘아프다. 힘들다.’는 생각뿐이었다. 다른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잘못 삐끗했다가는 불규칙한 돌계단에 곤두박질치고 중상 수준의 부상을 당할 것만 같았다. 나는 오직 땅만 보고 불규칙적이고 거친 호흡을 내쉬며 걸었다. 그렇게 한 시간을 걸으니 산길이 끝났고, 곧바로 다음 마을로 진입하는 길이 나왔다. 내리막에서는 한 명도 보이지 않았던 순례자가 한 두 명 보이기 시작했다. 몇 걸음 더 내걸으니, 돌을 쌓아 올려 만든 오래된 건물 옆 ‘zubiri’ 수비리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물길 위에 두 개의 아치로 만들어진 다리를 지나 마을에 들어갔다.

12:04. 23km의 여정이 끝났다. 마을 곳곳에서 숙소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중 한 알베르게 앞에 한국인 4명이 서 있었다. 내가 그들을 지나칠 때 눈이 마주쳤고, 거의 동시에 인사를 건넸다. 그곳엔 한 커플과 젊은 남자 두 명이 있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커플은 이미 숙소를 예약해서 체크인을 마친 상황이었고, 남자 두 명은 예약하지 않아 알아보는 와중에 만실이라는 말을 듣고 나오는 상황이었다. 이들은 서둘러 알베르게를 구해야 했다. 나는 한국에서 다음 마을인 팜플로냐까지 알베르게를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낭패를 볼 수 있다는 말을 따라 예약을 마친 상태였다. 숙소를 구하지 못한 한 명은 생장에서 받은 마을 별 알베르게 목록을 보고 전화로 숙소를 알아보았고, 다른 한 명은 배낭을 내려놓고 직접 발품을 팔러 떠났다. 그들의 사정은 들었지만, 따로 어찌할 노릇이 없었다. 나는 그들을 응원했고, 무사히 숙소를 구할 수 있길 바란다는 인사를 남기고 예약한 숙소로 향했다. 나는 허기를 간단히 달래기 위해 근처 슈퍼로 갔지만, 시에스타로 문은 닫혀있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가게 앞에 있는 자판기에서 3유로짜리 빵 하나를 뽑고, 다시 숙소로 향했다.


숙소는 문이 닫혀있었다. 나는 벨을 눌렀다. 수화기 너머 아직 체크인 시간이 되지 않았으니 시간이 되면 다시 오라는 답을 받았다. 얼른 씻고,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던 나에게 청천벽력 같았다. 나는 숙소 앞마당에 배낭을 내려놓고, 등산화를 햇볕에 벗어놓고, 슬리퍼를 신었다. 나는 스스럼없이 땅바닥에 주저앉아 빵을 먹으며 시간을 때웠다. 나는 지금의 내 모습이 한국에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이었음을 떠올리고 놀라며 웃었다. 30분쯤 지나서 숙소 문이 열렸다. 나는 이제 조금 익숙하게 순례자 여권을 꺼내며 체크인을 마치고 지정된 방으로 갔다. 2층 침대가 두 개 놓여있는 4인용 침실이었다. 기숙사 같은 크기에, 구성을 가진 방이었다. 아직 아무도 오지 않아 1층을 선점했다. 화장실은 복도에 공용으로 하나가 있었다. 나는 재빨리 씻고, 힘겨운 손빨래를 하고, 낮잠을 잤다.

두 시간쯤 자고 일어나니 몸이 한결 가벼웠다. 시간은 오후 4시쯤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가방 세 개가 더 놓여있었다. 피로 때문에 뒷전이었던 허기가 굶주린 짐승 마냥 대들었다. 나는 숙소를 나와 마을 중심부로 갔다. 몹시 허기졌지만, 저녁식사를 하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나는 아까 실패했던 슈퍼로 갔다. 다행히 열려있었다. 만만하게 먹을 만한 건 빵뿐이었다. 2유로짜리 빵과 음료 하나를 사서 근처 분수대가 있는 작은 공원에 놓인 의자에 앉아 허겁지겁 허기를 달랬다. 배가 좀 차니 주변이 보였다. 비둘기에게 빵 조각을 나눠주는 노인 한 분, 아이를 데리고 산책을 나온 어머니, 맥주를 들고 대화를 나누는 순례자로 보이는 사람 둘. 그들에게 여유가 보였다. 덩달아 나에게도 여유가 찾아왔다. 나는 마을을 산책하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나는 아까 갔던 슈퍼에 다시 가서 내일 먹을 간식과 물을 사서 숙소에 던져두고 마을을 걸었다. 아주 작은 마을이어서 금세 둘러볼 수 있었다. 슈퍼가 하나인 줄 알았는데 마을 뒤편에 또 다른 가게가 있었다. 10평 남짓한 그곳에선 온갖 것을 다 팔았다. 정육, 생선, 꽃도 있었다. 말 그대로 만물 상점이었다. 그곳에 50대로 보이는 동양 여성 한 명과 마을 주민으로 보이는 어르신, 정육점 주인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스페인어로 나눈 대화여서 어떤 내용인지는 하나도 몰랐지만 유쾌함은 전해졌다. 그중 동양인으로 보이는 순례자가 나를 압도했다. 특히 그녀의 복장이 무척 화려했다. 의상의 형태도 그렇지만 형형색색의 화려함이 인상적이었다. 순례길을 걷는 사람인지, 지역 축제를 즐기러 온 사람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나는 조용히 가게를 둘러보고 나왔다. 마을 중심부로 가보니 유독 북적이는 식당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만석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며 다시 나가려던 찰나 아까 만났던 커플이 나에게 인사를 했다. 그들은 혹시 식사를 하려 하면 같이 자리해도 괜찮다고 제안했다. 나는 제안은 감사하지만 괜찮다고 했다. 왜인지 내가 둘의 시간을 방해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인사를 하고 야외 테이블로 옮겨갔다. 그곳 역시 몇 명의 한국인 순례자들이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함께 식사하자는 제안이었다. 나는 전처럼 망설였지만 여럿이 성원하는 바람에 수락했다. 잠시 후, 몇 명의 한국인 순례자들이 자리를 더 채웠다. 8명쯤 되었고, 각자 메뉴를 주문했다. 곧이어 빠에야, 파스타, 내장탕, 피자를 내어주었다. 나는 빠에야를 시켰는데, 몹시 실망스러웠다. 밍밍한 맛에 향신료만 풍기는 죽 같았다. 그래도 배를 채워야 하니 싹싹 긁어먹었다. 내장탕을 시킨 사람은 한입 먹더니 조용히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피자가 그나마 먹을 만했다. 식사를 마칠 때쯤,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한 사람이 우리 테이블로 다가왔다. 아까 마주친 현란한 복장의 동양인 순례자였다. 그는 우리에게 딱 한마디 하고 돌아갔다. 한국인을 만난 것이 반가우니 피자 한판을 선물해 주겠다고. 즐거운 순례길 되길 바란다고. 그는 한국인이었다. 같은 테이블에 있던 순례자들은 이미 그 순례자를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 순례자는 선생님이었고, 퇴직한 후 많은 곳을 여행하는 순례자라고 했다. 나는 다시 한번 그에게 놀라움을 느끼며 감탄했다. 해가 질수록 기온은 떨어졌고, 추위가 온몸을 파고들었다. 더는 버티기 어렵겠다 싶을 때쯤, 자리를 파했다. 그들 중 몇 명은 내일 같이 걷기로 했고, 나에게도 제안했지만, 나는 혼자서 걷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숙소로 돌아와 빨래를 걷고, 방으로 올라갔다. 아까는 없었던 여성 순례자 3명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자신의 집에 놀러 온 사람을 대하듯 밝고 높은 톤으로 나를 환영했다. 나는 약간 소심해졌고, 민망해하며 인사에 답했다. 그들은 모두 일행이었고, 영국에서 온 친구들이었다.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피곤해서라기보단, 왠지 모르게 불편해서였다. 핸드폰을 켜고 이어폰을 꽂았다. 내일 날씨를 확인했다. 다행히 비 소식은 없었다. 내일은 순례길 중 첫 번째 대도시인 팜플로냐에 가는 날이었다. 이곳은 순례자뿐만 아니라 많은 관광객들도 찾는 도시였다. 순례길에서 가장 기대하는 곳 중 한 곳이었다. 헤밍웨이 때문이었다. 팜플로냐에서는 매년 7월 산페르민 축제를 여는데 헤밍웨이는 이 기간 동안 팜플로냐를 여행하면서 투우와 엔시에로를 경험하게 되고, 깊은 영감을 받아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를 집필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후에도 헤밍웨이는 수차례 이곳에 방문했고, ‘카페 이루나’라는 단골집을 만들었다고 한다. 비록 내가 방문하는 때는 7월이 아니었지만, 그의 자취를 따라 걸어볼 수 있다는 생각에 몹시 기대됐다. 나는 설레는 마음을 겨우 억누르고, 피로감에 의지하며 잠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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