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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강 작가의 독일삶 Sep 26. 2017

크레치머 할아버지의 인생물음표

너는 지금 어디 있니?

밤 8시가 조금 넘은 시각.

양로원의 모든 환자들이 잠자리에 들 시간이다. 그 시간이면 복도는 조용해진다. 난 오후근무가 끝나가던 터라 쉬엄쉬엄 복도를 걷고 있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한 환자가 있나 체크도 할 겸. 힘든 근무로 거의 지쳐갈 무렵이었다.

어슬렁어슬렁 복도를 걷는데 앞에서 크레치머 씨가 걸어왔다. 평소와 다르게 날 보자 반가운 미소를 띠는 것이다. 마치 꼭 만나고 싶었던 것처럼 보행지지대를 리드해 빠른 걸음을 떼고 있었다. 그의  미소는 독일인들이 처음으로 누군가를 만날 때 대 하는 형식적인 표정이라도 봐도 무방했다. 아마도 날 처음 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는 치매 초기환자다. 가끔씩 멀쩡하다가도 어느 순간엔 어린 아이 같은 행동을 한다. 어느 날인가는 복도를 헤매곤 대변을 바지 위에 쏟아놓고는 일하는 사람들을 힘들게 하곤 했다. 하지만 그런 일상을 많이 경험한 직원들은 재빠르게 사후처리를 한다.


"할로우"

" 할로우"


그의 인사에 나도 화답했다.

곧이어 그가 날 붙잡더니 이렇게 물었다.


"Wo bin ich?(내가 어디 있는 거죠?)"


그리고는 울먹이며 한 숟갈의 말을 더 얹었다.

"나, 집에 가고 싶어요."

"크레치머 씨, 여기가 당신 집이에요."

"아니에요. 여긴 병원이잖아요. 난 병원 싫어요."

집에 데려다 달라는 크레치머 씨를 간신히 설득해 방으로 들여보내 침대에 눕혔다.

크레치머 씨는 젊은 시절, 큰 규모는 아니지만  제법 전망있는 기업의 사장님이었다. 전기회사여서 건축 붐이 일면서 수요도 커졌다. 그러다 덜컥 COPD (만성폐쇄성 폐질환)와 알츠하이머를 만났다. 치매는 암 보다도 더 무서운 병이다. 가족들의 삶을 하루아침에 힘들게 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폐질환은 호흡의 어려움으로 일상생활이 힘들다. 처음에는 코 스프레이를 뿌렸지만 점차 악화되어 지금은 산소마스크를 간헐적으로 착용한다. 잘 나가던 중소기업 사장의 인생은 육신에 찾아든 질병과 함께 곤두박질쳤다. 그 사이 아내는 다른 남자와 살림을 차렸고, 유산문제 때문인지 가끔씩 크레치머 씨의 법정 관리자가 가뭄에 콩 나듯 양로원을 방문했다. 그에겐 자식도 없었다. 


이슬이 잔뜩 내려앉은 밤길을 헤치며 퇴근을 하는 내내 뇌리를 스치는 말!

"나는 어디에 있는가"

크레치머 씨의 그 말은 내 심장에 꽂혔다.


 독일 온 지 십여 년이 훌쩍 지나가고 있었다.

나름대로 비전을 품고 왔지만 호락호락하지 않는 이국생활에 내 영혼은 잔뜩 지쳐갔다.

몸은 선진국에 있었지만 내 삶은 후진국의 밑바닥을 거니는 듯한, 그래서 지독한 이중성과 허울 속에서 몸부림쳤다. 가끔 가면을 쓴 내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한국 사는 친구들은 외국이라는 환상과 버무려 내 위치를 부러워했고, 난 그 부러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가식의 탈을 쓰곤 했다.


처음엔 치매에 대한 글을 쓰고 싶어 일하게 되었지만 힘든 격무에 글쓰는 것조차 사치처럼 여겨질 때가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 뜻깊은 일을 하고 싶다는 부추김이 이곳에 머물게 했다.

독일 온 지 십년의 세월이 흐른 후 내 표피에 포장된 지저분한 너울을 벗기 시작했다. 거짓된 모습에 대한 환상을 버릴 때 진정한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고지순한 독일 삶 속으로 뛰어들어가겠다 생각하며 시작한 게 이 양로원이었다.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의 말처럼 "하루하루를 별개의 삶처럼 여겨야 한다"고. 하루하루는 목적지를 향한 단계가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지라는 생각을 하자 힘든 하루도 겸허히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작 시간이 흐른 지금, 자꾸만 내 안의 어줍잖은 교만이 꿈틀거리곤 했다. 그리고 처음 가졌던 의미들이 점차 퇴색하고 이제는 생활이 되어버린 직업의 현장이 몸서리치게 싫어지기도 했다. 미래가 없어보이는 어르신들을 보며 나 또한 에너지가 소진되는 기분이랄까? 어쩌면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해야만 하는 사명감에 내가 붙잡혀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크레치머 씨의 물음을 들으며 나에게 말을 걸었다.

"경란 너는 지금 어디 있지?"

아마 이 물음은 한동안 계속될 것 같다. 이국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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