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 겨울이었다.
여행처럼 훌쩍 떠난 한국 행이었다. 순전히 어머니를 위한 행로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사별 후, 기억의 흔적을 끌어안고 처절하게 몸부림쳤다. 어머니는 오랜 세월 묵혀 두었던 하모니카를 꺼내들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당시 칠십 중반의 어머니는 ‘고향의 봄’의 음률 속에 마음을 내맡겼다. 그리고 반백 년을 함께 한, 남편이 떠난 자리에서 부단히 홀로서기를 하고 있었다. 이제는 자신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굳은 의지 같았다.
문득 독일에 있는 파독 어르신들의 모습과 오버랩되었다. 그들은 나의 부모와 동시대를 걸었지만 생의 어느 길목에서 고국 땅에 머문 자와 떠난 자로 갈렸다. 갈림길은 달랐지만 노년의 마지막은 '고향'으로 귀결되었다.
노년의 언덕에 서면 본능의 회귀와 함께 유년의 기억을 더듬는 것을 목격하곤 한다. 그것은 다가올 미래보다 지나온 과거가 더 미화되는 나이이기 때문이다. 노년에 남은 것은 맹수처럼 달려드는 죽음 뿐이라고 체념하기도 한다. 노년기에는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사멸에 대한 공포가 존재한다. 약병 수는 늘어가고 뼈마디는 쑤시다. 손에서 발까지 닿는 유동성도 더디다.
이러한 우울한 관점은 생물학적 나이를 더 재촉한다. 하지만 생명이 유지되는 한 노년에도 성장과 쇠퇴가 반복된다. 관건은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이었던 케네디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대통령직을 수행할 당시 병을 앓고 있었다. 루스벨트는 불구인 몸을 이끌고도 13년 동안이나 열정적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우리나라 김대중 대통령만 보아도 그렇다. 다리가 불편한 상태에서도 국민들과 함께 어려운 경제위기를 극복한 인물이다,
성장의 열쇠를 잡으려는 노력이 바로 웰리빙(Well-living)이다. 긍정적인 노화를 위해서는 살아있는 동안의 성장을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포기해야 할 나이에 새로운 꿈을 꾸는 노년의 삶을 기사를 통해 가끔 접하곤 한다.
98세에 첫 시집 '약해지지마(くじけないで)'를 발간한 시바타 도요(99). 그녀는 전문작가가 아니었다. 백발의 나이에도 성장을 꿈꾸던 그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입증했다. 삶의 왕성한 의욕과 호기심이 어쩌면 그녀의 생명 연장을 부추겼는지 모른다. 주변에는 한창의 나이지만 꿈을 잃어버린 청춘도 있다. 노년은 신체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다.어디선가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긍정적으로 나이들어간다는 것은 기쁨과 사랑, 그리고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무언가를 배우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인생마다 주어진 수명은 다르지만 삶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성장하느냐, 쇠퇴하느냐는 선택이다.
노년은, 수고하고 달려왔던 삶을 조금씩 내려놓고 내면의 성장을 꿈꾸는 시기다. 그래서 행복의 완결은 노년에 결정된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는 <비잔티움 항행>에서 이렇게 말했다.
"영혼이 손뼉치고 노래하지 않으면 노인은 한낱 막대기에 걸친 누더기처럼 보잘 것 없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이 자리에서 독일의 격언을 말해야겠다.
Ende gut, alles gut!(마지막이 좋으면 다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