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문단의 이단녀, 아니 에르노를 읽다
작가가 소설을 쓴 시점이 이때다.
어슴프레 추억이 나를 잡아당기고, 그리웠던 그 시간 속으로 미끄러져 간다. 아니 에르노를 읽으며 나에게도 격정적인 사랑의 시간이 있었나 묻는다.
그래,
가슴 끓인 사랑과...
격동이 휘몰아친 시대적 상황 사이에서
방황했던 나의 지난 날이 있었다.
나의 청춘도 사랑도 너무 짧았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야 말았다.
안나 카레리나의 절망적인 사랑과, 조르주 상드의 치명적인 입맞춤을 연상케 하는 소설,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Simple Passion>.
사랑에 절절이 빠진 안나의 마지막 미소가 떠오르고 조르주의 광적인 사랑도 오버랩된다. 낭만주의 시인 뮈세와 피아노의 신 쇼팽과 지독한 사랑에 빠졌던 조르주 상드. 그녀는 사랑하기 위해 상처받는다고 했을 정도로 미친듯이 사랑했다.
그녀보다 136년 뒤에 태어난,
아니 에르노(Annie Ernaux/1940~)는 치열한 사랑의 열정면에서 서로 묘하게 닮았다.
아니 에르노를 흠모한 탓에 그간 여러 책을 찾아서 읽었다. 2022년 백수린 작가가 번역한 <여자아이 기억>도 아름답다. 70대인 그녀가 50년 전 18세 때 남자와의 첫 경험을 솔직한 어조로 표현했다.
2022년 노벨 문학상을 거머쥔 아니 에르노는 프랑스에서 솔직하고 도발적인 여성작가로 유명하다. 특히 자전적 소설로 알려진 <단순한 열정>도 지난 기억을 더듬어 썼다. 그녀가 쓰면 불륜소설의 식상한 클리세도 아름다운 낭만과 추억의 산물이 된다.
[...] 저녁에 그 사람의 전화가 오기를 빌면서 지하철역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거지들에게 적선을 했다. 내 멋대로 날짜를 정해놓고 그 사람이 나를 보러오면 자선단체에 200프랑을 기부하겠다고 마음먹기도 했다. 평소의 생활습관과 다르게 나는 그런 식으로 돈을 마구 썼다. 하지만 내게 그런 일은 A를 향한 나의 열정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는, 지극히 필요한 정상적인 지출로 생각되었다. 내 지출 목록에는 그 사람을 기다리며 꿈꾸듯 보내버린 시간과 매번 그것이 마지막인 것처럼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열정적인 사랑을 나누며 쇠잔해져버린 내 육체도 포함되어 있었다. (P 23)
소설은 친절하게 주를 달아 소설속 남자 A를 설명한다. 현재 A는 자신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그 사람의 신분을 밝힐 수 없는 것은 그의 삶을 존중한다는 것이다.
소설의 허구성을 가정하더라도 실제적인 느낌이 들게 하는 접근법, 에르노 작가만이 향유할 범주다. 이게 진짜 작가 자신의 체험일까? 우습게도 계속 확인하고 싶어진다.
소설 속 불륜남 A는 동구 출신으로 유부남이다. 38살의 외국남자. 아이가 없고 아내가 있다.
그러기에 사랑에 빠진 여인은 A에게 선물을 할 수도 전화를 할 수도, 편지를 보낼 수도 없다. 그 사람의 몸이나 옷에 불륜의 흔적이 남지 않도록 신경을 쓴다. 그러한 여러 제약들이 바로 그녀의 기다림과 욕망의 근원이라고 표현한다.
주인공 여인은 업무로 파리에 온 유부남 A와 격정적 사랑을 나눈다. 어떻게 사랑을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사랑은 끊없는 기다림의 연속이다.
A가 프랑스를 떠난 지 두 달 후부터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고 고백하는 문장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건 열정이 아니라 열병이라 명명하고 싶다.
하지만 당연하지. 사랑에 빠지면 일이 손에 안 잡히고 그대만 생각하기 마련이다.
주인공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어떤 영화를 볼 것인지 선택하는 문제에서부터 립스틱을 고르는 일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한 사람만을 향해 이루어졌던 그때에 머물고 싶었기 때문이다.
글에는 자신이 남겨놓고자 하는 것만 남는 법이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글을 쓴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읽힐지도 모른다는 고통을 연장시키는 것과 같다.
숭고하고 치명적이기까지 한 욕망, 위엄 따위는 없는 부재, 다른 사람들이 그랬다면 무분별하다고 생각했을 신념과 행동, 주인공은 이 모든 것을 스스럼없이 행했다. 여인에게 있어 A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과 더욱 굳게 맺어준 매개체였다.
글쓰기는 주인공 여인에게 해방을 선물했다. 관습과 절제의 틀에서 벗어나는 길.
소설은 감정이 아주 깔끔하고 정제되어 있다. 아니 에르노는 평소 자신의 낙태와 불륜에 대한 기억, 초기 성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작품 속에 자주 녹아낸다.
그녀의 수치심은 작품의 힘으로 승화되고 굴욕은 영속적인 글쓰기의 뿌듯함으로
다시 태어난다.
프랑스가 말하는 문제적 작가인 아니 에르노는 서술의 사실성과 선정성으로 문단과 독자들에게 충격을 던지곤 한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개방화된 유럽사회에서도 여전히 금기시된 성에 대한 반항아적 기질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 책에서처럼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서술한 듯 하면서도 지극히 객관적인 시선으로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열정이라는 테마로 희석시킨다.
[...]그로스만의 <삶의 운명>에서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포옹할 때 눈을 지그시 감는다'라는 구절을 읽으면 A가 나를 안을 때 그렇게 하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그가 나를 사랑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인의 사랑은 하루의 일상을 바꿀 만큼 격정적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는 2001년 번역되었다.
센세이션한 사건은 이 책이 출간되고 애정을 표시한 연하남 '필립 빌랭'이라는 남자가 이후 비슷한 문체로 <포옹>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읽으면서 조르주 상드의 대범하고 솔직한 사랑의 행각이 자꾸만 오버랩되었다. 파리의 고즈넉한 무드 속에서 상처를 의식하지 않고 불륜의 스티그마에 아랑 곳 하지 않는 용기가 부럽기도 하다.
아니 에르노는 작가로서 자신의 사랑의 기억을 글로써 남겨두고 싶었지 않았나 싶다.
가슴 속에 묻어두기엔 너무나 애절한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의 기록 속에
새겨놓고 싶었을까?
어쩌면 누구나 살면서 경험한,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꽁꽁 숨겨놓고 사는, 뭇 남녀들의 속내를 후벼파 줄 심산인지도 모른다.
밑줄 그을 만한 문장도 눈에 띈다. 여류 소설가로 세상의 잣대에 함몰되지 않고 자신만의 색깔과 감각적 필체로 써내려간 시도에 존경을 표할 뿐이다.
여인은 소설의 말미에 말한다. 그건 아니 에르노 자신의 독백처럼 들린다.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같은 것을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사치가 아닐까?'
그녀는 지금껏 사랑에 있어 진심인 듯. 팔십의 노구가 된 지금의 아니 에르노의 사랑 철학은 어떨까?
그의 글이 모두 사실에 근거한다면 그녀의 인생은 지극히 사치스럽다.
사치스럽기 그지 없는 그녀의 글을 관음증 환자처럼 읽어내려가는 나도 사치를 꿈꾸는 여인일까?
P.s: 한국으로 돌아가는 유학생 지인이 건넨 책입니다. 평소에도 아니 에르노 작품을 좋아한 터라 덥석 받아들고 몇 시간 만에 다 읽었습니다. 우리 안에 내재된 성 일탈의 욕망이 묘한 쾌감을 주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