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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밤에 읽는 소심한 철학책

길을 찾지 못할 때 읽는 착한 책

by 연강작가 Mar 20. 2025

독일에 처음 왔을 때 한국 드라마를 보기가 쉽지 않았다.


대장금과 허준을 만나기 위해 아이들과 한국문화원에서 카세트 테이프를 빌렸던 순수의 시절도 있었다. 순전히 아이들 한글교육을 위해서라지만 내 향수병 치료법 중 하나였다. 지금에서야 넷플릭스나 여러 경로를 통해 사시사철 입맛에 맞춰 한국 드라마 보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다.


세상 참 빠르게 변했다.

몇 년 전, 미생이라는 드라마를 본 적 있다. 참 감명 깊게 본 작품이다. 직업적인 근성 때문인지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좋은 문장은 꼭 적어놓는 편이다.

 이 드라마는 ‘길은 열려 있지만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로 시작한다. 그리고 ‘걸음이 나아가는 곳이 길이다’라고 끝난다. 그렇다, 태초에 길은 없었다. 다수가 걸어가는 것을 우리는 후일에 ''이라 인식한다.


내 인생에 있어 길은, 걸음걸음이었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이방인의 삶에 무기력해질 무렵, 길을 찾지 못했다. 문득 가볍게 읽자는 마음으로 든 책이 <밤에 읽는 소심한 철학책>이었다.  아주 쉽지만 그리 쉽지 않게, 그러면서도 친절한 책이었다. 인생의 디테일을 철학적 관점에서 풀어나가는 시도가 신선했다. 자기계발서와 철학서의 경계선에서, 조금은 자기계발서에 기운 형세였지만 인문학적 시선에서 길을 제시한 점이 신선했다. 특히 내가 걸어왔던 삶과 길을 연관지어보니 감정이입의 정도가 더욱 강해졌다.


돈과 경제에 대한 이야기는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우리는 고착화된 근성이나 소비의 패턴에서 쉽사리 벗어날 수 없다. 예를 들어 월급에서 소비의 수준을 측정해 관성대로 지출한다. 노예처럼 열심히 벌어 소비 수준을 높인다. 자본주의적 사고는 현대인들에게 맘몬신처럼 달콤하고도 허무하다. 양날의 검이다.  


현재 시대의 세속화에 대한 독일의 철학자 포이어바흐(Feuerbach, Ludwig Andreas). 그의 표현대로 자본주의사회에서 돈은 세속화된 신이다. 대중은 여전히 소비의 신앙으로 저 자신의 존재 의미를 확인할 뿐이다. 돈에 연연하지 말라는 복음의 전파조차도 '돈'과 관련한 세상의 목소리힘을 잃은 지 오래다. 경제니, 성공이라는 자기개발서의 홍수에 함몰된 노예들은 부지런히 살 길을 찾으라고 부추긴다.


이 모든 과정은 자본주의 신에 의한 철저한 시나리오의 한 부분이다. 현실은 만족이란 없다.  피라미드 꼭대기로 가지만 그곳에서도  절망을 경험한다. 피라미드 아래에서 헤매는 이들은 희망 조차도 헛된 욕망일 뿐이다. 가능성에 대한 기대는  절망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포괄적인 시선에서 미래는 가능성이다. 절망으로 무너지는 틈새에서 보이지 않았던 저 너머를 볼 수 있다. 내 관성의 틀도 함께 깨진다. 차라리 아무 것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선택권을 쥐고 있는 것은 나라는 존재다. 어차피 늦은 인생, 내가 가보고 싶은 길을 가보고 싶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무엇이 되지 못한 아직이지만 무엇이 될지 모르는 아직이기도 하기에 말이다. 확정되지 않은 지금이 도리어 선택의 기회가 아직 열려 있는 시간이다. 그것을 믿고 길을 걷는 것이다. 중년의 나에게도 무엇이 될지 모르는 아직이 있을까 생각하게 하는 통찰이었다.


나의 지나온 독일 삶을 생각하니 궁즉통이 와 닿았다. 작가는 야스퍼스의 말을 빌려서 궁즉통에 대한 시원스런 사색을 에게 건넨다.


궁즉통, 닥치면 다 하게 되어 있다. 야스퍼스의 한계상황 개념을 주역의 한 구절로 대신하자면 궁즉통이다. 하늘이 무너져야만 사력을 다해 구멍을 찾는 것이다. 좌절과 절망은 사고의 비약을 가능케 한다. 갑작스럽게 놓인 장애물은 뛰어넘을 수 있는 가능성도 허락한다. 시도조차 해보지 않았던 위기는 그저 위기다. 늦었다고 생각한 시기가 늦은 것이다.


위기에 들어선 상황이라면 어쩔까? 온통 어둠 뿐이라면 어둠을 받아들이고 길을 찾을 수 있는 감각을 찾는 것이 앉아서 울고 있는 것 보다 낫다. 눈을 감아봐야 짙은 어둠 뿐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결코 인식자가 아닌 이방인이다.”


니체는 자신을 모르는 존재가 자신,이라고 말했다. 자아는 인식의 주체이지만 인식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다. 우리는 실상 각자가 지닌 잠재적 능력치에 대해 잘 모른다. 여간해서는 검증해볼 기회가 없을 뿐더라 능동적으로 한계를 시험해보는 일은 더더욱 없다. 그저 스스로 설정한 자신의 범주 안에서 도전할 뿐이다.  


야스퍼스는 열린 가능성에 초점을 맞춘다.

인간 스스로 한계를 넘는 초월성을 가진다. 맞닥뜨린 부정적 사태 앞에서 이루어내는 히어로적 각성을 뜻한다. 호수의 물이 호수의 한계를 넘어 바다가 되려면 반드시 호수가 넘쳐야 한다. 자신 안에서도 넘쳐나야 한다. 동기부여는 절망 같은 한계상황이라는 허들을 넘었을 때 시작된다. 위기가 동기부여가 되어 동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것이다.

브런치 글 이미지 2


나의 시간 속에서도 절망의 순간이 있었다. 하지만 그 절망이 오히려 펌프질이 되었던 경우였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넘어선 존재의 나다.


절망의 총량을 생각하며 살 것인가. 한계상황을 정공법으로 돌파할 것인가, 점쟁이들도 저 자신의 한 시간 뒤를 알 수 없다는 사실, 즉 천기누설이다. 그러니 삶에 대해 너무 쪼그라들 필요가 없다.


삶의 시간들이 가치 있는 까닭은 삶의 어느 순간에 가로놓이게 될 죽음 때문이라는 존재의 망각이다. 작가는 거듭 이야기한다.


‘살라,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은 공허하게 들린다. 삶의 가치는 삶 가까이 다가와 있는 죽음으로 증명된다. 우리는 늘 지나다니는 길을 길로 인식하지 않는다. 걸음의 패턴일 뿐이다. 절망은 끌어안고 있으라고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너의 지금을 철저하게 그리고 처절하게 깨달으라고 다가오는 것이다.
니체의 지적이라면 행복 조차 배워야 하는 존재다. 키에르케고르의 지적처럼 절망도 배워야 한다. 사라지고 난 후에야 이전까지 가늠해보지 않았던 더 소중한 가치들을 새로 발견한다. 뛰어넘어라, 생각보다 높지 않을 것이다. 나오라! 생각보다 깊지 않을 것이다. 울라! 생각보다 슬프지 않을 것이다. 생각보다 아프지 않을 것이다. 살라! 생각보다 외롭지 않을 것이다. 생각보다 괴롭지 않을 것이다.’


몇 년 전, <벤자민 버튼의 시계는 거꾸로 간다>라는 영화를 이스탄불 행 비행기 안에서 보았다.

 저자는 벤자민 버튼의 해설처럼 우리의 삶은 ‘끝없는 상호작용’의 결과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세계’라는 공간을 살아가지만, 더 본질적으로는 ‘삶’이라는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우리는 나도 모르게 타인과의 삶에 얽혀 있고 어쩌면 에너지의 역행을 받고 있다. 그리고 세상이 흘러가는 가치에 휘몰릴 때도 있다. 요즘의 시대는 더욱 그렇다.


사회학자 미키 맥기(Micil Mcgee)의 《자기계발서의 덫》은 현장의 맥락을 간과한 학설로 대중을 기만하는 자기계발서의 사례들을 조목조목 반박한다. 언젠가부터 세상은 자아실현과 부의 축적을 혼동하고 있으며, 자아가 계발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계발서들이 정해놓은 가치 속에 자아가 시달리고 있다는 주장이다.


사과는 중력에 의해서 떨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떨어질 때가 되어 떨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즉 힘의 문제만이 아닌 시간의 문제도 함께 지닌 채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과학자가 바라보는 사과는 분명 시인이 바라보는 사과와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떨어지는 사과에 대한 인식을 하는 자는 중력의 법칙을 발견한다. 그렇지 않은 다수는 그저 삶을 관망하고 흘려보낸다.


작가는 이 대목에서 나에게 날카롭게 말을 건넨다.


산다는 건 다 그런 것 아니겠니, 라는 노래 가사는 삶에 대한 긍정인 듯 보이지만, 동시에 삶에 대한 체념이기도 하다. 질서와 안정으로 끌어안는 여유인 듯 보이지만, 실상 그저 관성으로 흩어지는 무기력의 엔트로피를 질서와 안정을 명분으로 위안 삼는 것"이라고.


죽음은 가장 독자적이고 몰교섭적인 사태다. 삶이 다하는 순간에야 비로소 찾아오는 삶에 대한 깨달음, 더불어 찾아오는 것은 죽음에 대한 깨달음이다. 즉 개개인이 직접 겪어야 알 수 있는 죽음은, 곧 각자가 지닌 가장 고유한 삶의 모습이기도 하다. 결코 알 수 없는 죽음 이후의 시간을 미리 준비하라고 권고하는 세상의 모든 방법론들은, 죽음에 대한 불안이라기보다는 삶에 대한 체념의 증상들이다. 니체의 표현대로 ‘죽음에 이르는 존재’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불안을 사는 것, 삶의 의미는 그렇듯 죽음에 대한 각자의 불안으로 증명된다.


니체가 지적한 그 역사의 발명품들이 신과 천국이었던 셈이다. 니체가 바라본 당대 유럽은, 천국에 가기 위해 삶의 시간을 고스란히 교회에 바치는 허무에 시달리고 있었다. 피안에 존재한다는 영원한 삶에 저당 잡힌 차안(此岸)에서의 삶, 삶의 허무를 위로하고자 고안된 발명품에 의해 삶이 더욱 허무해지는 순환, 그 허무의 중심에서 니체는 과감하게 신에게 죽음을 언도한 것이다.


저자는 들뢰즈가 지적한 인간 최고의 문제점은 ‘자의식’이라고 말한다. 자의식이 강할수록, 새로운 세계와 연결되기는 더욱 힘들다. 자신의 신념에 반하는 낯선 우연들 속에 자신의 운명이 놓여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작가의 입장과 반대다.


 우연은 꼭 필연의 삶과 연결되어 있다. 내 경험상 그렇다. 수평선 밖으로 나아간 콜럼버스가 세계를 발견한 것은 그가 추구한 삶에 대한 열매다.


지렛대는 기원전 2500년부터 사용했지만, 그 원리를 최초로 규명한 수학자는 아르키메데스라고 알려져 있다. ‘아르키메데스의 점’은 충분히 긴 지렛대와 그것이 놓일 장소만 있다면 지구라도 들어 올리겠다던 아르키메데스의 어록에서 유래한다. 그가 수학자였기에 통찰을 통해 필연적으로 지렛대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처한 상황적 ‘결여’를 채울 수 있는 구성으로 세계를 인식한다. 즉 한 사건이 누군가에게 현상으로 인식되는 조건이 다른 것이다. 진리의 문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 바로 '견해만큼 진실이 있다.'는 후셀(Husserl, Edmund)의 요지다. 각자가 지닌 이런 결핍의 성향을 작가는 ‘지향성’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각자의 지향성이 가닿은 대상의 조합만으로 구성된 세계를 인식할 뿐이다.


'지향성’은 주관적 지평에 관한 담론이다. 단어의 뜻 그대로 무언가를 향해 있는 마음의 속성은 결핍을 전제로 한다. 그들의 존재방식을 인정해주면 그만인 일에, 우리는 왜 그렇게도 타인의 고집을 꺾으려 고집을 피우는 것일까? 니체의 대답은 존재감에 대한 강박 때문이라고 한다. 자신의 생각이 맞다는 것을 확인해야만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는 일종의 자기애적 인격 장애라는 것이다.


작가는 심리학자인 프로이트를 소환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모세는 유대인들에 의해 광야에서 살해당했다. 이 당돌한 심리학자는 정신분석학의 대가로 지하세계의 심리학을 지상으로 끌어올린 인물이다. 지금까지도 정신분석학은 모든 심리학의 근간을 이룰 정도다. 프로이트는 가나안 땅에 당도한 유대인들에게는 새로운 역사가 펼쳐졌고, 통치자의 입장에선 사회의 질서유지를 위한 도덕적 이념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자신들이 죽인 모세의 도덕을 뒤늦게 신의 율법으로 추대했다'는 것이다.


 모세 5경의 저자인 모세에 대한 프로이트의 말은 모세를 추종하는 이슬람과 유대교, 기독교에서도 반발을 살만한 상상이다. 하지만 충분히 설득력도 있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육신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자유로 간주했고, 플라톤은 인간이 죽어서 이데아의 세계를 경험하고 난 뒤, 다시 다른 육신으로 윤회를 한다고 믿었다. 그런 면에서 윤회를 믿는 인도철학은 지극히 서양적 사고다. 당연히 윤회의 담론도 인도의 전유물은 아니다.


<벤자민 버튼의 시계는 거꾸로 간다>에서처럼 세상은 상호연관성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나지만 전체다... '라는 <연금술사>의 저자 코엘료의 말도 떠오른다. 커다란 우주의 카테고리 속에서 개인은 다른 누군가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우리는 엮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오늘 내가 만나는 누군가, 사물,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다.




P.s

지금 작업하는 글이 있는데

쓰다가 심심하면 책을 읽습니다.

어제밤엔 몇년 전 읽었던 책, 다시 펴들고

잠에 빠졌습니다.

두서없이 긴 글,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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