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사라마구의 흔적을 찾아
'눈먼 자들의 도시'를 읽은 것은 거의 20년이 넘어선다.
그당시 책을 읽는 내 눈이 시뻘개졌다. 광선이 나올 정도로 몰입했다. 주제의식과 플롯 전개의 박진감으로 흡입력이 대단했다. 큰아이 출산 후 젖먹이를 재우고 눈을 비벼가며 읽어, 후일 시력이 더 나빠지는 대가를 지불했지만, 마음은 넉넉해졌다.
작가 '주제 사라마구'가 이 책을 썼던 시기는 포르투갈이 독재정권에서 벗어났지만 여전히 혼란이 멈추지 않고, 삶이 나아지지 않던 시기다.
소설은, 주인공 여인 외에 모두 눈이 멀게 되는 질병 속에 참담한 세상을 고발한다.
처음에는 절망적 상황에서 서로가 도우려고 애쓰지만 결국 인간의 본성대로, 이기적인 광란의 사회로 치닿는다. 그의 소설이 다루는 모티브는 폭력, 공포, 탐욕, 사랑 등 내면세계를 여실히 드러낸다. 눈뜬 여인의 자발적 실명은 실체를 보는 걸 회피하고, 생각의 게으름을 이어가는 현대인들의 모습이다.
모두가 눈이 멀어버린 사회 속에서 눈을 뜬 이 조차도 두려움 속에 체념하고 방관한다. 지금 전 세계의 모습이 이 소설의 상황과 오버랩된다. 국가간 신뢰나 인간의 기본적 가치철학은 사라지고, 경쟁과 경제의 프로파간다 속에 함몰되는 사회가 그렇다.
나의 리스본 여행의 정점은 그를 만나는 일이었다.
이미 세상을 떠난 고인이지만, 그의 글은 살아남았다. 테주강과 멀지 않은 곳에 그의 박물관이 있다. 그곳은 인도의 포르투갈령 고아(Goa)의 총독인 아폰수 알부케르크의 아들인 브라스 알부케르크가 16세기에 지은 집이라고 한다. 2012년부터 주제 사라마구의 재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박물관의 1층은 리스본의 고고학 유적지를 볼 수 있도록 무료 개방했다. 이 건물 자리가 로마시대 성벽과 리스본의 유물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란다. 2층부터 4층까지는 작가를 위한 전시물과 기념품 샵, 세미나실이 마련되어 있다.
나는 샵에서 그의 문장이 새겨진
작은 수첩을 샀다.
그의 영혼과 기를 담아, 그처럼 자신만의 문장을 창조하고 싶었다.
4층에서는 견학 온 포르투갈 학생들이 앉아 작가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었다. 옆에 있던 딸2호가 그들 학생들의 듣는 태도를 보고 감탄했다. 독일 학생들은 박물관에 보면 더러는 핸드폰을 보거나 팔을 괴거나 다리를 뻗고 앉아 있는데 이곳 아이들은 군기가 든 것처럼 앉아 있다는 것이다. 자세가 삐뚤해도 잘 듣고 있으면 그만이지만, 그래도 앞에 선 선생님 입장에서 아이들의 태도는 열정을 떨어뜨릴 수 있는 요인이다.
나는 경건한 경청자세를 보고, 작가에 대한 이나라 국민의 자세라 생각하기로 했다.
박물관 바로 앞에는 생각보다 초라하지만 묵직한 작가의 무덤이 있다.
화장한 재를 올리브 나무 아래 수목장으로 만들었다.
그는 2010년 란자로테(Lanyarote)라는 섬에서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생을 마감했다. 스페인 카나리아 제도에 있는 곳이다. 하지만 시신은 리스본으로 옮겼다.
본인의 유언대로 고향에서 옮겨심은 100년 나무 아래였다.
나라를 빛낸 소설가로
이틀간 국장으로 치러졌다.
당시 섬의 이웃들이 그가 섬에서 쓴 책의 문장을 읽어주며 떠나보냈다. 책의 문장은 직역해서 이렇다.
'별에게 올라가지 않는다. 땅에 속해 있다면...'
<수녀원의 비망록>에 쓰인, 유명한 마지막 문장이다. 장례식날 리스본의 2만 여 독자들이 그의 책을 들고 기다리며 위대한 작가의 귀환을 환영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카톨릭과의 상황을 악화시킨 <카인>이었다.
주제 사라마구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1922년 알렌테주 지방의 아지냐가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어려웠다. 인문계가 아닌 기술학교를 다녔고 용접일을 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이십대에 문학의 길로 들어섰다.
하지만 국가 내에서는 주목받지 못한 비주류였다. 환영받지 못한 스펙이었지만, 해외에서 먼저 알아보자 그제서야 작가를 주목했다.
1982년 출간한 <수녀원의 비망록>이 1988년에 영어 번역되었다. 포르투갈 국민들의 반응은 그때부터였다.
40여 권이 넘는 책을 쓰고 울림이 있는 문장으로 포르투갈 국민들의 추앙을 받았다.
1998년에 급기야 일을 냈다. 포르투갈어권역에서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눈먼 자들의 도시>나 <눈뜬 자들의 도시>는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흠이 있다면 반유대인적 발언 등으로 눈총을 받기도 했다.
그의 생애와 저서들을 읽고 보면서, '작가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세상과 삶을 표현하는 가치를 은유로 녹여내는 문장동력, 다양한 문학적 도구를 사용해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는 작가정신.
투박하고 거친 세상에서도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결을 지키며 외로운 길을 걷는, 그리하여 풍요의 문장을 선물하는 작가의 힘.
그가 현대 작가들에게 문학정신의 귀감이 되고, 문장스승으로 꼽히는 이유다.
P.s
생각보다 무덤이 초라해서 찾기 힘들어 직원에게 묻고 간 그의 안식처에요. 독일도 그렇지만 무덤이 화려하지 않은 게 인상적이에요.
그나마 베를린에서 유명인의 무덤이 화려했던 건 음악가 멘델스존 가문과 그림형제 입니다.
죽으면 다 소용없는데 굳이,,, 하면서도 들여다보는 후예들의 재미도 있으니.. 무엇이 정답이라 단정할 순 없겠죠. 방문자는 사진 한 컷으로 끝나지만 여운은 꽤 오래 갑니다.
그의 책은 한 번 읽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