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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왕비가 된, 미모의 가수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 신트라를 가다

by 연강작가

2년 전 조카 결혼식.

조카의 아내가 될 신부의 웨딩드레스를 보고 탄성을 질렀다.

딱 그 모델이다.

"고거이, 그레이스 켈리 고거랑 비슷하네."

"이모님, 누구요?"

조카 며느리가 그레이스 켈리를 알까 싶어 좀더 최근 사람을 소환했다. 그래. 영국 왕실 며느리의 웨딩드레스가 그레이스 켈리의 것을 모방했다지, 아마도.


"거, 캐서린 미들턴이랑 비슷해.
너랑 드레스가."


우리 귀여운 신부는 캐서린 세자비와 그레이스 켈리 왕비 같다고 하니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 것처럼 신부입장을 한다. 조카 며느리지만 참 귀엽고 발랄하다. 그저 경쾌 상큼 공주 그 자체다. 내 식구가 될 사람이니 더 어여쁜 공주 말이다. 조카 며느리의 웨딩드레스를 보니, 한 번 걸쳐보고 싶은 푼수적 충동이 이는 걸 간신히 참았다. 여자는 나이가 들어도 드레스는 여전한 로망인지 모르겠다.


그레이스 켈리

세기의 결혼식하면 그레이스 켈리의 웨딩드레스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촘촘하게 박힌 작은 진주 알갱이들이 순백의 신부를 꽃잎처럼 받들었다. 헐리우드 최고의 우아함이었던 그레이스 켈리와 모나코 왕 레니에 3세의 결혼식 사진은 지금도 회자된다. 칸 영화제에서 만난 두 사람은 결혼까지 이어진다. 신부의 지참금은 70억원. 사실 결혼 후보로 마릴린 먼로도 있었다는 말도 있다.


화면 밖 대중을 떠나 국모의 삶을 선택한 그레이스 켈리. 비록 교통사고로 52세에 생을 마감했지만 여성으로서 최고의 삶을 살았을 것 같다.



리스본에서 신트라를 향해 가는 기차에서 불현듯 왕비가 된 그레이스 켈리가 생각났다. 그의 고아한 눈망울이 누군가를 닮았다.

'옛날 옛날에 포르투갈 왕궁에서 왕과 어여쁜 소녀가 결혼을 했답니다...'


동화는 늘 허구만 존재하진 않는다. 19세기 포르투갈의 어느 지적인 왕도 아름다운 여인과 결혼을 했더란다. 그것도 아름다운 도시, 신트라에서.


리스본 여행만 계획했던 나는 반나절 여행으로 인근을 다녀오리라 맘을 먹었다. 숙소의 매니저가 신트라를 적극 추천한 것도 한 몫 했다. 나또한 겨우 1시간 남짓한 거리인 신트로가 부담스럽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터다.

호시우 역에서 기차를 탔다. 지나가는 정경들이 낯선 여행자에게 전혀 다른 빛과 색으로 다가왔다. 여행객들이 일제히 신트라역에서 내렸다. 모두들 순례자의 행렬처럼 길을 따라 걸었고 언덕을 올랐다.


이 도시는 40만 명 정도의 주민이 모여 산다는데 내 눈엔 관광객으로만 보인다. 유서 깊은 건축물과 자연경관 덕분에 1995년부터는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페르디난트 2세가 19세기에 지은 페나성과 9세기에 건설된 무어성, 백만장자이자 프리메이슨이었던 안토니우 몬테이루(António Augusto Carvalho Monteiro)가 지은 킨타 다 레갈레이라 별장이 두드러진다.

신트라의 역사는 기원전 2세기로 거슬러간다.

처음에 올리시포(현 리스본)의 일부로 만들어졌고,713년~1147년은 무어인들의 지배를 받았다. 이후 1093년은 기독교 군대에 의해 처음 점령되었고, 1147년엔 포르투갈의 초대왕 아폰수 1세가 집권했다. 1580년 스페인 지배시기에는 신트라 궁전의 사용이 중단되기도 했다. 포르투갈의 역사를 보면 무어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신트라의 무어성은 이베리아 반도(지금의 스페인과 포르투칼, 북아프리카 지역)가 이슬람 지배하에 있던 시기에 전략적인 요충지였다. 거의 700년 이상을 지배했기에 건축, 학문,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끼쳤다.




도시는 동화 속 마을처럼 아기자기하고 색감이 화려했다. 내가 사는 베를린이 흑백이라면, 신트라는 컬러풀한 세상이다. 어디선가 금방이라도 동화 속 요정이 튀어나올 것 같다. 요정들은 새로 맞이할 어여쁜 왕비를 맞이할 채비를 한다.


엘리제 프리데리게 헨슬러(Elise Friederike Hensler)는 포르투갈의 왕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아름다운 엘리제의 손을 잡아준 왕은 페르디난트 2세다. 왕은 포르투갈어는 물론 독일어, 헝가리어, 프랑스어, 영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를 구사할 정도로 언어의 마술사였다. 음악 등 예술적인 조예도 높았다.


엘리제는 평범한 예술인이었다.

1836년 5월 22일 스위스 라쇼드퐁(La Chaux-de-Fonds)에서 태어난 그녀는 평민 출신이다. 가수로 유럽 무대에서 빠르게 성공했다. 이탈리아, 프랑스, 포르투갈 등 유럽의 저명한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했다. 그녀의 음악적 재능과 뛰어난 무대 장악력은 그녀를 상류 사회의 인사들과 어울릴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그녀는 국왕 페드루 5세와 그의 동생 페르디난트 2세와 인사를 나눴다. 그녀의 아름다움과 날카로운 지성은 금세 페르디난트 2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853년 페르디난트 2세는 아내 마리아 2세 왕비가 사망한 후 외로움을 예술과 건축에 투신했다. 하지만 아름다운 여인 엘리제의 예술에 대한 열정을 높이 사 함께 공유했고, 감정적 유대가 커져갔다.

결국 그는 1869년 엘리제 헨슬러와 결혼하게 된다.

이 결혼은 여러 면에서 주목을 받았다.

페르디난두는 왕이었고, 엘리제는 평민 출신의 여인이었다. 당대 귀족 사회에서는 이례적인 스캔들이었다. 하지만 페르디난두는 관례보다 사랑을 선택했다. 이후 엘리제에게 ‘에들라 백작부인(Gräfin von Edla)’이라는 작위를 수여했다. 하지만 그 대가로 그들이 낳을 아이들은 왕의 계승을 이어받을 순 없었다. 이 결혼은 두 사람의 깊은 애정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규범에 대한 진보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에들라 백작부인의 칭호를 받은 엘리제는 포르투갈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모나코의 그레이스 켈리처럼 우아하고 조용하게 내조를 했다.


자선활동과 예술 지원에 힘을 아끼지 않았고 신트라 지역에서 시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궁전 단지를 확장하고 아름답게 가꾸는 데 힘을 쏟았다. 신트라의 광활한 조경 정원인 페나 공원(Parque da Pena)은 그녀의 참여 아래 조성되었고, 오늘날에도 전 세계 관광객들에게 사랑받는 명소다.

엘리제 헨슬러는 자신의 국제적 경험과 인맥을 활용해 포르투갈과 유럽 다른 국가들 간의 문화 교류에 큰 도움을 주었다. 신트라를 찾는 예술가들과 장인들을 후원했고, 그에 따라 지역의 문화적 삶을 풍요롭게 했다.


남편 페르디난트 2세가 사망하자 궁전을 물려받았지만 포르투갈 정부에게 돌려주었다. 1910년에 페나 궁전은 국가 문화재에 등재되었다.

그녀는 1929년 리스본에서 눈을 감았지만 영원한 신트라의 노스탤지어였다. 시민들은 문화적 유산을 이어갈 수 있도록 지지해준 평민 출신의 여인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세상에는 왕과 결혼한 평민의 여인들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오스트리아 왕비 씨씨, 영국 황실의 다이애나 비를 비롯해 포르투갈의 엘리제, 모나코의 그레이스 켈리, 캐서린 미들턴, 덴마크의 메리 도널드슨 등은 스스로 빛이 나는 인물들이다.


그들 중 누군가는 비운의 주인공으로 남아 있고, 어떤 이는 문화 속에 공기처럼 숨쉬고 있다. 각자마다 자신들이 숨죽이고 있는 사적인 침묵의 역사가 있을 것이다. 그 토해내지 못한,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들은 도시의 후미진 골목길에서 빛으로 피어난다. 느끼는 자만 느끼도록 말이다.






P.s

신트라에서는 멋진 풍경 외에도

맛난 음식도 많더군요.

아기자기해서 한 번 더 가보고 싶은 도시였어요.

일정이 짧아 그녀, 엘리제만 묵상하고 돌아왔어요.

담번엔 좀더 깊이 들여다볼 기회가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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