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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의 방랑자, <불안의 서>에 대해

by 연강작가

나는 작가의 문장처럼 테주 강변을 따라 걸었다. 대서양을 그리워한 사람들이 경건한 순례객처럼 강변에 서성거렸다. 그들도 페르난두를 생각하는 것일까?


잠시 후 그가 말한대로 지평선 아래로 가라앉은 마지막 태양빛이 영롱하게 빛났다. 등 뒤로 리스본의 언덕들이 역사의 후광을 이고 서 있다. 육지와 맞닿은 곳에 강과 어울리지 않는 출렁이는 파도가 불안한 인생의 한 장면 같았다. 바다가 되지 못한 강은 그렇게 파도가 되어 부서지고 쪼개졌다. 그때 강 저편으로 노을이 몰려왔다. 바알간 표정으로 도시를 비추는 노을빛은 장관이었다.

나에게 리스본은 빛이었다. 페르난두 페소아의 책 <불안의 서>는 리스본의 풍경을 자꾸 상상하게 했다. 읽으면서 갈증이 났다. 결국 길을 나섰다. 내가 도착한 리스본은 페르난두의 멜랑콜리와 아방가르드를 동시에 느끼게 한다. 리스본의 가파른 골목길을 걸었을 그를 상상하며 따라나섰다.


리스본을 돋보이게 하는 작가라 꼽으면 페르난두 페소아(1888~1935).

그가 쓴 책의 활약 덕분이다. <불안의 서>는 480편에 이르는 각각의 글이 담겨 있다. 문장 속에 깊은 문학적 방랑이 숨쉰다. 그래서 사색을 찾는 이들이 열광할 만한 보물같은 책이다. 하지만 그는 살아생전 책 덕을 보지 못했다. 본인은 인세로 빵 한 조각 사먹지 못하고 후손들에게 정다운 조상이 되어준 셈이다. 이 책은 그가 죽은 후 50년이나 흐른 후에 출간되었다. 언뜻 일기나 에세이 같기도 하고, 소설 같기도 하다. 화자를 통해 작가 자신 공허한 내면세계를 엿볼 수 있다.


난 이 책이 막 출간되었을 때 제목이 주는 위압이 느껴졌다. 베를린 시내를 걸어가면서 극우파에게 뒷통수를 맞을 것 같은 불안감이 잔뜩 일던 때였다.

이 책은 한 방의 거대한 총소리였다.

제목이 주는 압박 때문인지 읽기 시작하면서 불안해졌다. 게다가 읽어내려가면서 불안감은 더욱 힘을 더했다.


참을 수 없는 무질서의 글들,
그 안에 스며있는 불안전과 불안,
그리고 불확실성이라는
모호한 감정이 불편했다.

끝까지 호흡을 이어갔지만 마음 한 구석에 어둠 한 줌이 스며들었다. 하지만 중독처럼 나를 붙들었다. 암묵적으로 흐르는 작가성향이 나에게 전염된 듯했다. 이상하게도 묘한 연대감을 안겨주었다. 간혹 이해되지 않은 문장도 있었다. 번역의 난제랄지, 화자 자신의 감정의 기복이랄지, 이유는 몰랐다. 어쨌든 작가의 감정을 따라가느라 고단했다.

그래서 직접 봇짐을 메고 리스본으로 나선 것이다. 그의 책 곳곳마다 지뢰처럼 숨어 있는 도시에 대한 자잘한 묘사들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다. 야심차게 떠난 여행에 재정, 시간적 비용은 거셌지만 나름 만족스러운 여정이었다.


화자가 바라본 거침없는 의식의 연상을 좇아 독자는 사유하고 통찰한다. 화자는 글쓰기에 진심이다. ‘글은 영혼의 구원자’라고 평한다. 그는 문득문득 사무실의 창 너머로 보이는 산을 바라보며 상념에 젖는다. 자조적인 어투로 삶이 착취당하는 구조라고 쏟아낸다. ‘이왕 삶이 그러할진대 섬유상인 바스케스에게 착취당하는 편이 허영심과 명예, 경멸과 질투 혹은 불가능에게 착취당하는 것보다 덜 비참하지 않겠느냐’고 회의적으로 말한다.

그에게 삶이란 타인의 기준에 맞추어
양말을 뜨는 것이다.

코바늘로 만들어지는 사물들, 하지만 그 안에 아무 것도 없이 텅 비어 있다. 복잡다단할 것 같은 삶이라도 뜯어보면 아주 단순할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해본다. 그저 삶과 죽음이라는 테마를 빼면 인생은 더 이상 설명의 건덕지도 없다.


<인간의 굴레>의 작가 서머싯 몸은 인생을 페르시아 양탄자에 비유했다. 화려한 색깔을 담은 사물을 들여다보면 다양한 실들이 엉켜 하나의 그림을 완성한다. 이 책도 저 책도 사실 다 맞다. 인생은 복잡다단하면서도 단순하다. 희노애락을 경험한 치열한 인생이라도 막상 생의 마지막에는 실존적 공허를 느끼기도 한다. 인생은 각자가 느끼는 컨디션만큼 다가오는 법이다.


화자는 꿈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작가 자신의 독백이다. 리스본에서 태어나 남아공 더반에서 십대를 보낸 작가는 열일곱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 무역통신문 번역가로 살며 일생을 마친다. 책은 작가의 생각을 담는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 특히 그는, 하녀나 재봉사들도 꿈을 꾸지만 그들과 다른 점은 자신은 글을 쓴다는 점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는 글을 쓸 때 가장 행복하다고 말했다. 주인공의 글쓰기를 염탐하며 나또한 그와 비슷한 감흥을 느낀다고 생각했다. 글을 쓸 때야 고도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니까. 인생을 살면서 글을 쓰고, 글쓰는 꿈이 존재하는 한 축복된 삶이라고 자부한다.


다시 책 속으로 들어가보자.

이 책의 주인공에게 불안의 본질은 어머니였다. 그는 어머니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가 한 살 때 사망했다. 그의 감수성이 찢고 상처 입은 것은 따스함의 부족이다. 그리고 기억이 없는 헛된 그리움이라고. 불안을 잠재우고자 매번 꿈에서 어머니의 젖가슴에 안겨 잠에서 깨어났다. 그 응석부림은 항상 먼 길을 돌아와야 했다.


나는 어제 자폐스펙트럼을 가진 아이의 엄마를 만났다. 다행히 드라마틱하게 그의 아들은 잘 자랐다. 대부분은 해피한 결말을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눈물겨운 그녀의 스토리를 들었다. 그녀는 십년 이상 아들을 위해 기다려주고, 세상의 긍정을 알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최근 아들이 대학입학 자격시험(아비투어)을 치렀다고 한다. 한 과목이 생각보다 저조한 점수를 받았다. 그때 아이는 포기하고 싶었단다. 하지만 그 아들의 뇌리에 스치고 간 풍경은 어머니의 눈물이었다. 자신으로 인해 수고했던 어머니의 서글픔이 머리 속을 스쳐지나갔다. 그것은 동기부여가 되었다. 다시 힘을 내었고, 다행히 다른 시험을 잘 치러 점수를 만회했다. 결국 어머니의 양육태도나 혹은 존재의 유무는 인생 동력의 본질이 될 수 있다. 더불어 애착을 가질만한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불안의 요소를 조금은 덜 수 있다.


언젠가 애니메이션 영화 <인사이트 아웃 2>를 보았다. 앞선 시리즈를 보았기에 ‘불안’이라는 테마가 추가된 이야기를 제작자는 어떻게 풀어갈까 궁금했다. 새롭게 등장한 불안이는 미래의 일들을 끊임없이 염려한다. 주인공 소녀 라일리가 위험에 처할 수 있다고 과도하게 예측하고 두려움을 조장한다. 하지만 어쩌면 가장 어두운 구석일 수 있는 이 감정이 우리의 본질적 요소라는 점이다.


나는 리스본 시내를 떠나 인근 신트라로 가는 기차를 탔다. 이 책 속에서 화자는 리스본을 한 번도 떠나본 적이 없는 자에게 신트로의 여행을 권했다. 그의 권유에 따라 나는 아기자기한 신트로에서 전원의 풍미를 느꼈다. 그는 책 속에서 아마도 화성으로 여행을 가는 기분일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여행을 자주 하는 이에게 새로움은 낡은 것이 된다, 새롭다는 추상적 개념은 인간이 두 번째 새로운 것을 목격하는 순간 이미 바다에 버려진 신세가 되는 것이다.


독자는 독서를 통해서 다른 생각의 세계로 떠날 수가 있다. 나 또한 그렇다. 책 속에 담긴 길을 걸으며 이방인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것은 안온한 기분전환이고, 책과 현실을 이어주는 통로다.

살아 생전 시 몇 편 발표에 그쳤던
작가는 지금 자신의 유명세를 알고 있을까?

그가 자신의 고국에서 손꼽히는 국민작가가 되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고뇌하며 읽은 책을 다시 접고 눈을 감는다.

노을진 리스본, 2월의 테주강이 눈에 어른거린다. 불안이 어느새 파도에 밀려간다.

다시 인생이다.


책 속의 글

자유란 고립에의 가능성이다. 만약 네가 다른 인간들과 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면, 네가 그들을 가까이 해야만 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면, 돈이나 군중심리, 사랑, 명예, 호기심 등 침묵과 고독 속에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요소들을 갖고 있지 않다면 너는 자유다. 홀로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너는 노예로 태어난 것이다. 모든 정신적이고 영적인 위대함을 소유할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예다.


슬퍼하라, 삶의 강요로 인해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면. 슬퍼하라, 자유롭게 태어났고 홀로 살아갈 능력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곤궁한 상황이 너를 타인들과의 삶으로 몰아넣는다면. 이것이 바로 너의 비극이다.
타인의 애정만큼 부담스러운 것도 없다. 그것은 타인의 증오보다 더욱 부담스럽다. 왜냐하면 증오는 애정만큼 의존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증오는 불쾌한 감정적 충동이므로, 증오를 느끼는 사람은 무의식중에 증오를 억제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증오 역시 애정과 마찬가지로 우리를 우울하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둘 다 우리를 쫓아다니며, 우리를 엄습하고, 우리를 혼자 놓아두지 않는다.
우리의 진실한 모습은 오직 우리가 꿈꾸는 것뿐이다. 나머지는 현실이라는 여분으로, 우리가 아닌 이 세상과 사람들에게 속한다. 내가 꿈을 이룬다면 꿈은 아무런 저항 없이 기꺼이 현실에 동화되면서 나를 배반하고 떠나가버릴 것이고, 나는 질투에 휩싸일 것이다. 누군가, 나는 꿈꾸는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 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나약한 자의 거짓말이다. 삶이 그를 통해서 이루어낸 모든 것을 그 자신이 예언자처럼 미리 꿈꾸었다고 하는 편이 진실에 부합한다. 우리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삶은 우리를 돌멩이처럼 허공으로 던져버렸는데, 날아가면서 우리가 말하는 것이다. “봐, 내가 내 힘으로 나가고 있잖아.”

P.s


오랜만에 리스본으로 돌아왔네요.ㅎㅎ 페르난두 페르소의 아방가르드가 그리웠나 봅니다.


이모저모로 삶은 다양합니다.

지금 살아 있음에 감사하며 그 옛날 그가 남긴 족적을, 영혼을 되씹어봅니다.

즐거운 시간 되셨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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