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생일에 그의 전원주택을 가다
지난 7월 2일, 헤세의 생일이었다. 남부 독일을 여행하던 중 7월의 남자, 헤세를 찾아나섰다. 이미 세상에 없는 인물의 생일을 복기하겠다고 나선 것은, 슈테판 츠바이크가 쓴 헤세 전기 때문이다.
1877년에 태어난 그를 1970년대 언저리에서 태어난 내가 추억하는 건 순수한 이끌림이었다. 규격과 틀을 거부하는 그의 정신의 요소가 나의 것과 닮았기 때문이다.
독일학교에서는 생각보다 헤세의 책이 뒷방신세다. 감상적이고 따스한 그의 문체에 비해 실생활에서 까칠하고 여성편력적 소문도 한 몫 할 것이다. 내 생각엔 그가 독일에서 태어났지만, 스위스 국적을 취득했기 때문 아닐까? 그럼에도 독일 곳곳엔 그의 흔적들이 수두룩하다.
특이하게도 한국인들에게 헤르만 헤세는 독일작가 중 가장 대중적인 인물이다. 그가 쓴 <데미안>은 국민 고전 중 독보적 위치다. <수레바퀴 아래서>는 교육제도를 언급할 때마다 양념처럼 묻어나온다. 나에겐 다른 책들보다 유독 <로스할데>가 인상깊었다. 그가 살았던 정원이 책 속의 묘사와 흡사할 거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내가 그의 생가가 있는 칼프로 가지 않고 굳이 가이엔호펜으로 간 이유다.
독일 칼프에서 태어나 마울브론, 튀빙겐, 바젤, 가이엔호펜, 베른, 몬타뇰라까지. 그의 삶의 여정은 길고 고된 길이었다.
"나는 언제나 독립된 인간으로, 소박하게 살고 싶은 영원한 소망을 갖고 있다"
그의 소원은 1904년 무렵에야 이루어졌다.
<페터 카멘친트>의 대성공은 자신의 꿈을 단번에 끌어당겼다. 이 책은 청년 페터가 도시의 대학에서 공부하다 자연의 삶으로 돌아온다는 이야기다. 자연에 대한 동경과 예술가의 고뇌를 담은, 자신의 내면심리가 투영된 작품이다.
독일과 스위스의 국경인 보덴 호수의 회리(Höri)반도에는 자연정원처럼 아름다운 마을, 가이엔호펜이 있다. 우리들의 영원한 보헤미안, 헤르만 헤세가 정착을 꿈꾼 곳이다. 구글맵을 두드리니, 내가 묵고 있는 곳 귄츠부르크에서 2시간 30분 정도의 거리였다. 가이엔호펜으로 향하면서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독일에 와서 생업을 하면서도 글에 대한 갈망을 놓지 않았던 나의 목마름이 견습공이던 헤세의 시간 속으로 넘쳐 흘렀다. 그는 서점에서 일하면서 책을 사랑했고, 낭만주의 문학에 몰입했다. 한 곳을 바라보는 집념이 결국엔 무언가 결과물을 낳는다는 것을. 나또한 마이너 포지션에서 몇 권의 책을 쓴 작가지만, 언젠가 빛을 보리라는 희망을 놓지 않기 때문이다.
당시 27세의 젊은 작가는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바젤에서 서점 점원과 고서점 직원으로 일하던 그에게 글은 마법처럼 소원을 이루어주었다. 2500마르크를 손에 쥐고 정착할 땅을 찾았다.
보덴 호수 인근의 가이엔호펜은 딱 그의 정서와 맞았다. 9살 연상의 사진작가 마리아 베르누이와 함께였다. 헤세는 아내가 된 그녀를 '미아'라고 불렀다. 둘은 그림처럼 아름다운 가이엔호펜에서 마음에 드는 집을 발견했다. 1년에 150마르크를 지불하고 농가의 일부 주거공간을 임대한다. 두 개의 방에서는 잔잔한 호수가 내려다보였다. 헤세는 그때의 감흥을 이렇게 말했다.
"고요하고, 공기와 물은 상쾌하고 가축과 훌륭한 과일들, 성실한 사람들이 있는 곳"
3년 후에는 목가적 삶을 누릴 집을 짓기 시작했다. 건축가 한스 힌더만은 그를 위해 스위스 전통양식의 전원주택을 지었다. 대문을 들어서면 그의 수필에서 엿볼 수 있는 아름다운 정원이 펼쳐진다. 사실 그가 사는 곳 인근 보덴 호수는 20세기 초에 수많은 예술가들의 성지였다.
유럽에서 3번째로 큰 호수지만, 바라보면 저절로 붓이 들어지는 풍광이다. 그의 정원엔 계절의 변화가 느껴졌다. 낙엽지는 나무들, 너도밤나무 울타리, 향기로운 꽃들이 만발했다. 헤세는 그림을 좋아해 화가들을 불러들였고, 어머니에게 받은 바이올린을 연주하기도 했다. 그는 이곳에서 8년을 살았다. 명작 <수레바퀴 밑에서>를 쏟아냈고, 세 아들을 낳았다.
청소년기에 마울브론 수도원을 탈출했던 그는 이곳에서 영혼의 안식을 찾고자 했다. 하지만 또다른 결핍은 먼 곳의 갈망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이곳에서 내일을 향한 설렘으로 채우고 싶어했다. 하지만 보헤미안의 삶은 끝이 없었다. 자연에 대한 갈망과 인간에 대한 염원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아내 미아 역시 헤세를 통해 전염병에 걸린 것처럼 불행했다.
자연은 더없이 아름다웠지만 부부관계는 부자연스러웠다. 신선함은 눅눅한 매너리즘으로 바뀌었다. 여행이 아닌 정착이 되자 삶이 식상해졌다.
헤세는 작품 성공 이후 자주 낭독여행을 떠났다. 아내는 외롭게 집을 지켰다. 헤세는 집에 돌아와서도 호숫가의 보트에 홀로 누워 있거나 스위스쪽으로 노를 저어 담배를 밀수하기도 했다. 전원의 무료함은 엉덩이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그는 대안책으로 홀로 인도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불행히도 1919년 둘은 헤어졌다. 그는 이후 스위스 몬타뇰라(Montagnola)로 이주해 죽을 때까지 살았다. 미아는 이혼 후 잠시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아이들은 일시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맡겨졌다. 물론 미아는 이후에는 아이들과 살았고, 노년까지 음악과 행복하게 지냈다. 헤세는 미아와 헤어진 후 두 명의 여인과 결혼했고, 역시 순탄하지 않았다. 그는 1962년 스위스에서 삶을 마감했다.
그럼 가이엔호펜은 어떻게 되었을까?
헤세 가족이 떠난 후 그 집은 어떤 화가가 구입했다. 화가가 죽은 후엔 미망인이 작은 하숙집을 운영해 점차 잊혀져 갔다. 이후 2003년 생물학자인 에바 에버바인(Eva Eberwein)이 부지를 인수했다. 독일 문화재보호재단이 헤르만 헤세 집 복원사업을 지원하면서 점차 헤세의 잊혀진 8년의 전원생활이 드러났다.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집은 무척 아름다웠다. 정원에 앉아만 있어도 힐링이 될 것 같았다. 나는 집을 나와 그의 흔적이 남아있는 마을의 헤세 박물관을 들렀다. 유명세 탓인지 그의 사후 남겨진 물건들이 소중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제1차와 2차대전에 신물이 난 그는 가까운 스위스로 가, 그곳에서 마지막을 보냈다. 독일의 삶에 넌더리가 난 것이다. <유리알 유희>로 노벨문학상을 거머쥐었지만, 나치 정부에 대한 비판으로 협박편지도 받았다.
어린 시절, 마울브론 수도원에서 탈출해 자살시도를 벌이고, 학교를 그만둔 그는 시대의 반항아였다. 하지만 그의 자아의 역동성이 놀라운 창작을 불러일으킨지도 몰랐다. 소년의 고뇌와 내면세계를 그린 <데미안>은 1차대전 후 극심한 정신적 트라우마에 빠진 독일사회에 반향을 일으키고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독일정부는 그를 향해 마음껏 껴안을 수 없는 껄끄러움도 있었다.
가이엔호펜의 마을주민들은 헤세가 남긴 8년의 선물에 과분한 감동을 한다. 간간히 헤세를 보러오는 덕후들도 눈에 띈다. 동양에서 온 관광객인 나에게도 마을 주민들의 눈빛은 친절함을 넘어선 호기심 가득이다.
박물관샵에서 슈테판 츠바이크가 쓴 헤세 전기를 샀다. 사실 헤세를 좋아해서라기 보다 츠바이크를 좋아해서다.
P.s
오랜만에 글을 올렸어요.
한국 방문 후 독일에 와 이것저것 바쁜 탓도 있었고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아 브런치를 잠시 까먹었지 뭐예요? 이제 좀 정신 차리고 글 올릴게요. 사랑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