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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른베르크에 히틀러만 있는 건 아니다

과거와 현재를 끌어앉는 영욕의 도시, 뉘른베르크

by 연강작가

자동차가 도시 중심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섰다. 울상이던 하늘이 이내 눈물을 쏟아낼 것 같다.

구시가지의 모퉁이를 돌아서자, 로마 정치인 세네카가 했던 말이 내내 맴돌았다.

"작은 슬픔은 말이 많지만,
크나큰 슬픔은 말이 없는 법이다"

도시의 첫 느낌이 사뭇 고요했다. 거대한 슬픔이 대지를 감싸는 듯한,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였다.

전후 80년이 흘렀다. 누군가의 피가 채 굳지 않은 것 같은 섬뜩함. 나만의 감정일까?

도시는 여전히 패배자의 눈빛이 스멀스멀 묻어났다. 누군가의 사랑을 받았다는 이유로 도매급으로 주홍글씨를 달아야 했던 곳. 시퍼런 역사의 칼날은 도시를 주눅들게 했다.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나치 전범재판은 게르만 역사가 지닌 수치의 정점이었다. 나치와 관련된 영화나 연극, 책에서 대두되는 도시이기에 독일 현대사의 기억문화에서 빠질 수가 없다. 후미진 도시 구석에 웅크린 존재들도 혹여나 불똥이 튀진 않을까 숨죽이며 담담히 시대의 정죄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히틀러 집권 12년과 그 이후는 영욕의 희비가 엇갈렸다.


이 도시에서 나치당의 전당대회가 열렸고, 히틀러의 주무대였다.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에서 게르만 역사를 부활시키고 천년왕국의 망상을 가진 남자의 시간이 담겼다. 광기의 인물이 애착했던 도시는 2차대전이 끝나갈 무렵, 연합군의 주요 타격지였다. 도시의 90%가 순식간에 불에 탔다. 화려했던 도시의 유물은 하루밤 꿈처럼 사라졌다.

나치 지도자들은 망상에 사로잡힌 채 '조국 독일을 걱정한다'는 유언을 남긴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1945년부터 1년간 히틀러의 2인자 헤르만 괴링, 루돌프 헤스 등 12명의 나치 지도자들이 교수대에 올랐다. 나치 전범재판이 그곳에서 열린 이유도 나치의 잔재에 쐐기를 박고 싶은 연합국의 심정이 담겨 있었다.


히틀러가 아니었으면
뉘른베르크가 그토록 수모를 당했을까?

고개를 가로젖는다. 유독 이곳에 폭격을 퍼부었던 것도 히틀러의 유령을 약화시키기 위한 생각에서다.


원래 뉘른베르크는 중세의 고즈넉함과 품위가 담긴 곳이었다. 바이에른 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다. 독일에서 가장 먼저 철도가 개설되었다. 그러기에 물류 등이 원활해 공업과 상업이 발달했다. 신성로마제국 시절에는 최고의 강성도시였다.

그래서일까? 전후 새롭게 도약하고 싶은 시민들의 열망은 더 높았다. 나치의 도시가 아닌, 낭만과 감성의 도시로 탈바꿈시키려는 의지를 보였다.

좌) 최초 크리스트킨트 우) 올해 온라인에 중간 선정된 12명의 지원자


사실 이 도시를 정식으로 여행하려면 성탄절 즈음에 와야 옳다. 뉘른베르크는 세계 최대의 크리스마스 시장이 열리는, 겨울이 그윽한 도시다.

'그리스도아이 시장(Christkindmarkt)'이라고도 불린다. 이 즈음엔 독일은 물론 인근 유럽에서도 여행코스로 인기 절정이다. 가장 큰 이벤트로 '크리스트킨트'를 선발한다. 정확히 말하면 '미스 그리스도의 아이'다. 크리스마스 시장의 상징이자 마스코트다. 2년마다 선정하는데 지난 7월 11일부터 온라인에서 투표를 하고 있다. 뉘른베르크 시 홍보부에서는 몇 주 전부터 지원자 39명 중 12명을 뽑았다. 이중 6명을 가르고, 최종적으로는 한 명을 뽑는다. 대상은 16세~19세의 소녀로 키는 최소 160cm, 고소공포증이 없고 악천후에도 견딜 수 있는 체력이 있는 여성이어야 한다. 선정된 소녀는 개막식에서 낭독사를 통해 크리스마스 마켓의 시작을 알린다.

이러한 전통은 원래 1948년부터 시작되었다. 첫 번째 선정된 '크리스마스킨트'는 영화배우인 소피 케서(Sofie Keeser)였다. 이후 1969년부터는 시민 소녀 중에서 선출했다. 크리스마스 시장은 매년 200만 명의 관광객이 몰릴 정도니 관광산업의 효자노릇을 한다.

겨울에 한 번 와야겠다 생각하고, 다시 자동차로 향하려다 도시의 랜드마크를 보고 가기로 했다.

뉘른베르크의 수호성인인 성 제발트를 기리는 성 제발트 교회다. 1255년에 건축을 시작해 1300년 경에야 완성되었다고 한다. 고딕양식에 로마네스크 양식이 혼합되어 있다. 교회는 2차 대전 당시 파괴되었다가 1957년에 복원되었다. 이 도시에서 태어난, '캐논'의 작곡가인 요한 파헬벨이 말년에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한 교회라 더 유명하다.


올해는 성 제발트의 성인 지정 600년이다. 그래서인지 다채로운 행사가 열린다. 제발트,라는 인물은 뉘른베르크에서 숭배 수준이다. 신성로마제국 하인리히 3세 시절에 활동했고, 1056년에 사망했다. 그는 이탈리아를 순례 후 뉘른베르크에 머물며 선교활동을 했다. 그의 유해가 안치된 교회에 많은 순례자들이 찾아들어 도시도 유명해졌다고 한다. 성 제발트에 대한 다양한 전설이 있다. 보통 순례자의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지팡이와 모자를 쓰고 자신의 교회를 팔 아래 끼고 있다.

성 제발트의 관
1070년 처음으로 문헌에 등장했다. 당시 많은 병자들을 고치고 기적을 행했다. 인근 레겐스크부르크 도시에서 자신의 망토를 타고 도나우강을 건넜다고 한다. 또한 그의 손가락은 어두운 숲속에서도 빛을 낼 수 있어서 덕분에 한 농부가 잃어버린 두 마리의 소를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중세 후기의 전설에 의하면 그는 덴마크 왕자였다. 파리에서 공부하고 그곳에서 프랑스 공주와 결혼했지만 결혼 첫날 밤 세속을 등지고 수도 생활을 결심했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부처를 연상케 한다. 성인들의 전설은 뭔가 비슷한 부분이 많은 탓이다.

1519년 페터 피셔(Peter Vischer) 부자는 10년에 걸친 작업 끝에 성 제발트의 두개골 성유물이 담긴, 은으로 된 성유물함을 안치한 화려한 석관을 완성한다.


성 제발트 교회는 나치 피해자들을 위한 기도회를 여는 등 과거 반성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독일 어느 지역 도시를 가도, 나치와 유대인 학살에 대한 기억문화가 도사린다.

역사를 잊어버린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함석헌 선생의 말이 떠오른다.

올해는 2차대전 종전과 우리 민족이 식민의 굴레를 벗어난 지 80년이다. 아직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았는데 자꾸만 역사를 망각하는 위정자들의 모습이 보인다. 뉘른베르크는 여러모로 생각하게 되는 공간이자 시간이다.

고요히 현재의 평화를 좇으면서도 날카롭게 과거를 주시하는 냉철함이 필요함을 새삼 느낀다.




P.s

벨린으로 오는 도중에 잠깐 휴게소를 들르는

기분으로 뉘른베르크를 갔어요.

히틀러의 도시, 라는 악명을 가졌지만

전후 꼬리표를 떼기 위해 노력하지요.

겨울에 크리스마스 시장이 유럽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하죠. 겨울에 와보고 싶네요. 두툼한 파카 입고 와야겠습니다. ^^


다들 겨울에 뵙는 걸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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