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와 고기치료
아무도 깨지 않는 적요한 시간이다.
강제적인 미라클 모닝은 아니지만, 무언가를 하기엔 새벽이 제격이다. 하지만 너무 이른 시간에 일어나서인지 오후 나절엔 가끔 몸이 매사근해서 맥을 못출 때도 간혹 있다.
다음달부터 근무처를 바꾸어서 서류 준비 등 여러 가지로 며칠을 바잡게 보냈다. 과거의 행적을 쫒듯 이것저것 내 삶을 톺아보는 시간이었다.
독일에 사는 동안 무엇보다 늘어난 건 서류철이다. 나는 그다지 내 삶에 갈무리를 잘하는 편이 아닌지라 필요할 때 이리저리 찾게 되는 경우가 많다. 컴퓨터 바탕화면에 널려 있는 문서들은 시간을 내어 정리하면 그것도 일이다. 서류 정리를 잘하는 짝꿍에게 가끔 지청구를 듣는 지점이다. 그는 나보다 꼼꼼하고 문서작성에 능해서 다행이다. 그래서 가끔 도와달라 청하는 쪽은 늘 내쪽이다. 모두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제 맛에 사는 법이다.
오늘은 토요일이라 늦잠을 자고 싶지만, 습관이 배어 일찍 눈이 떠졌다. 어스름한 창문밖 미명이 스멀거렸다. 어디선가 새벽을 깨우는 강아지 소리가 들이운다. 어쩌면 늦은 밤이나 새벽에 돌아다니는 여우의 소리인지 모르겠다. 먹을 게 없어진 여우들이 가끔 주택가인 이곳까지 내려와 터전을 이룬다. 어쩌면 이웃주민 중 누군가가 지속적으로 먹을 거리를 챙길 수도 있다.
여우는 소슬한 바람이 부는 새벽에 자주 등장했다. 가끔 시간의 감각을 잃은 그가 대낮에 서성거릴 때도 있었다. 그날 여우는 며칠 못먹었는지, 유난히 큰 눈이 떼군했다.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삭연한 표정으로 뒷걸음질쳐 달아났다.
그때의 눈빛은 사람의 것이었다.
어쩔 때는 멀리서 오는 날, 가만히 기다리고는 슬그머니 자리를 뜨는 때도 있었다.
여우는 우리의 옛 이야기에도 등장하고, 악역을 담당하기도 했다. 후각과 청각이 발달하고 행동이 민첩해 약삭빠른 동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우리집 근처의 여우는 선입견과는 사뭇 다르다. 느슨하고 사람을 경계하지도 않는다. 어쩌면 인간들 속에서 살아남는 것을 스스로 터득했는지 모른다. 여우 생각을 잠시 거두고 책상 앞에 곧추 앉았다.
땅 속에 묻어둔 김치독처럼
묵혀둔 장편을 다시 꺼냈다.
그간 여러 일정들 때문에 을밋을밋하다 퇴고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하지만 소설을 읽기도 전에 졸음이 쏟아져 느른하게 책상에 앉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잠을 좀더 청해야 할까 생각이 들었다. 아직 창밖은 새벽이라 어스름했다. 암막커튼을 치고 혼곤한 정신을 베개에 기댄다. 사실 소설 습작 초입에는 힘들어서 각다분했지만, 쓰다보니 말미에 가서는 속도가 났다. 잠깐 눈을 부치고 다시 일어섰다.
요즘 베를린 날씨는 여름 같지 않게 상크름하다. 서늘한 바람기운이 여름을 비웃는다. 간간이 흩뿌리는 비 때문이다. 그 대신 습기를 머금은 통에 몸이 무겁게 느껴진다. 물론 이 생량함이 가시면 무더위가 시작될 것이다.
어제 인근 대형수퍼에서 산 삼겹살로 김치찌게를 얼큰하게 끓였다.
아침부터 찌게냄새를 풍기는 통에 이웃 독일인들이 무슨 일인가 싶을 것 같다. 한국음식이라는 것이 워낙 음식의 향취가 강렬하니까 말이다. 삼겹살을 사면서 오븐에 구워서 훈제요리에 쓸 돼지고기 목살을 골랐다. 돼지고기 훈제는 우리집 두 딸이 가장 최애하는 음식이다. 방법도 정말 간단하다. 양념 발라 오븐에 넣으면 끝!
이제 수퍼 내 정육점 주인도 나를 알아보는 눈치다. 으레 '돼지고기?' 하면서 손가락이 그쪽을 가리킨다. 사실 그집 고기가 좋긴 해도 가기 싫을 때가 있다. 주인장인지 종업원인지 성격이 살천스러워 얼른 필요한 고기만 넙죽 받아온다. 손님은 왕이거늘, 쌀쌀맞기가 입가에 흐르는 침도 고드름으로 만들 기세다.
사실 나는 육류를 즐겨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족들에게 양질의 고기를 먹여야 한다는 생각이 든 건 최근의 일이다. 다들 에너지 방전이 되었다는 볼멘 소리가 들린다. 여름에 잘 먹어야 한다는 부추김도 있었다.
나를 제외한 가족 모두 이구동성
'우리에게 고기치료가 필요하다'고
깃발을 들었다
정신적 에너지가 필요한 딸1호와, 육체적 에너지가 필요한 딸2호, 이것저것 다 필요한 나와 짝꿍의 욕구가 하나로 통일되었다. 고기, 고기, 고기!
딸1호 가라사대, 사람이 고기 먹을 때가 있고 풀만 먹을 때가 있나니 지금이 곧 이때라. 고기 먹을 때!!
지금 2주일 째 날마다 고기를 섭취하고 있다. 돼지고기, 닭고기, 오리고기, 양고기, 소고기, 또 뭐가 있더라? 독일은 워낙 육류가 저렴하고 채식주의자들이 늘어나서 우리집 같은 사람들에겐 도축장이 환영할 판이다. 난 여전히 도마에 기름기 잔뜩 묻히는 게 여간 마뜩잖다. 그럼에도 저탄고지고단을 부르짖는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돼지의 멱살을 잡고 매달려야 한다.
수퍼에서 돌아오는 길에 여우의 눈빛이 자꾸만 어른거린다. 여우야! 여우야! 쬠만 기둘려!
P.s
날마다 다양한 고기 요리를 습득하고 있습니다.
혹시 여우로 할 수 있는 요리 있나요? 으아아아... 취소!! 열없다!!
당분간 고기를 먹을 예정입니다.
적절한 고기 요리법 있으시면 귀띰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