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의 랜드마크와 인문학
여름은 한 해의 중간지점이다. 지나온 것과 가야 할 길에 대한 인터미션이다. 그래서인지 쉼을 위해 여행을 떠난다.
한국을 떠날 즈음, 해외생활이 여행 같을 거라고 들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나와 살다보니 일상처럼 식상해졌다.
어느 해 3월, 독일에 온 첫 날
교회 종소리를 기억한다.
휘휘한 저녁 종소리는 유럽의 낭만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떨까? 종소리를 망각하거나, 어쩔 때 ‘좀 시끄럽네’라는 생각도 든다. 정착자인 나에게 지금 일상은 그저 평범함이다. 여행자의 시선은 온 데 간 데 없다.
나는 안다.
익숙함 보다 낯선 곳으로 떠나야만 객관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틈이 생긴다. 관조적으로 바라볼 때 내 자신이 더 또렷하게 인식된다. 또한 호기심과 동경이 없다면 삶은 밋밋해진다.
며칠 전 운터 덴 린덴(Unter den Linden)거리에 갔다. ‘운터 덴 린덴’은 ‘보리수 나무 아래’라는 뜻이다. 19세기 프로이센 국왕은 독일의 가로수로 알려진 라임나무 일종의 린덴바움(Lindenbaum)을 이 거리 양 옆으로 심었다. 하지만 히틀러의 친위대가 횃불행진을 할 때 걸리적거린다는 이유로 모두 베어버려 지금은 거의 없다. 이 거리는 도시의 랜드마크가 즐비하다. 시민들 보다는 관광객들이 눈에 띤다. 가끔 여행자의 감각을 느끼고 싶을 때 이곳을 관통하는 버스를 탄다.
이번에는 목적이 있다. 국립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리는 무용공연을 보기 위해서다. 사실 공연 자체보다 익숙한 거리를 낯설게 걷고 싶은 속내였다. 독일에 처음 왔을 때 그해 열렸던 ‘빛축제’에서 화려한 도시의 야경에 감탄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2차대전 후 동서독이 나뉘면서 이 거리는 동독의 통치 아래 들어갔다. 동독의 수도인 동베를린의 중심지였다. 거리의 시작은, 1618년에서 1648년까지 이어진 30년 전쟁 후다. 신성로마제국의 해체를 가져온 전쟁은 독일지역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인구 감소, 경제적 위기, 문화적 유산 파괴 등 전쟁의 트라우마로 독일은 휘청거렸다. 그런 상황에서 베를린은 프로이센의 거주도시로, 무엇보다 역동적으로 재기할 필요가 있었다.
선제후들과 왕들은 궁전까지 이어지는 이 길을 조성했다. 당시 이름은 ‘첫 번째 거리’였다. 나중에 부티크와 호텔 등이 들어서는 등 화려한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나폴레옹이 프로이센을 점령하고 몰락하는 과정을 거친 다음인 1816년 무렵이었다. 카를 프리드리히 쉰켈(Karl Friedrich Schinkel)이라는 왕실 건축가가 이 일대에 20여 개의 화려한 건축물을 만들었다. 프로이센의 명성에 걸맞는 고풍스러움이 풍겼다.
분단과 통일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에서부터 베를린 대성당까지 직선으로 이어지는 이 길은 1.5 km에 달한다. 그 사이로 훔볼트 대학도 보인다. 원래 대학은 하인리히 왕자의 궁전이었다. 왕자가 죽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로 용도를 바꿨다. 1810년, 처음으로 수업이 이루어졌다. 당시 학교 이름은 ‘베를린 왕립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
아인슈타인, 마르크스, 엥겔스, 하인리히 만, 토마스 만, 그림형제 등등 수많은 지성인들의 집합소였다. 헤겔도 이곳에서 교수직을 역임했다.
노벨상 수상자도 대거 배출되었다. 하지만 2차대전 연합군의 공습으로 이 거리의 모든 건물이 파괴되었다. 대학도 마찬가지였다. 1949년, 설립자인 빌헬름 폰 훔볼트를 기려 이름을 ‘훔볼트 대학’으로 변경했다.
2차대전 당시 운터 덴 린덴 거리의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그중 유일하게 프로이센 궁전만 살아남았다.
하지만 동서 분단 후 궁전도 1950년에 철거되었다. 동독 정부와 러시아가 프로이센 절대주의 상징이라고 철거 지시를 내린 것이다. 이어 공화국 궁전이 세워졌지만 이것 또한 통일 이후 철거되었다. 다행히 메르켈 앙겔라 총리의 지시 하에 2005년부터 다시 공사가 착공되어 몇 년 전에야 궁전의 모습을 드러내었다.
사실 난 이 거리에 올 일이 별로 없다. 어쩌다 한국에서 손님이 올 경우 관광을 위해서 갈 뿐이다. 마침 공연이 열리는 슈타트오퍼(국립 오페라하우스/Staatoper)가 이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슈타트오퍼는 독일에 감자를 보급한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 왕은 독일에 지대한 공을 세워서인지 ‘대왕’이란 이름을 붙인다. 히틀러가 흠모해서 그의 집무실에 대왕의 초상화가 걸려 있을 정도다. 메르켈 총리가 러시아 여왕 에카테리나 2세의 초상화를 걸어놓은 것처럼 말이다.
오페라 하우스는 1742년, 건축가 크노벨스도르프가 개관했다. 프리드리히 2세 대왕이 ‘마법의 성’이라 부르며 건립을 명했다. 이 오페라하우스는 전쟁과 정치 체제의 변화, 폭격과 화재, 철거 열풍까지 견디며 생존해 왔다. 2017년 전면적인 보수공사를 마무리하고 재개관을 했다. 유럽 최고의 오페라 하우스 중 하나로 세계 최고 수준의 음향을 자랑한다.
18세기 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궁정악장으로 활동하던 시기에는 국제적인 위용을 지닌 음악무대였다. 나치 치하에서는 프로이센 국립극장이라는 이름으로, 헤르만 괴링의 지휘를 받았다. 슬프게도 나치의 이념에 따라 유대인 단원들이 모두 해고되었다. 오토 클렘페러(Otto Klemperer), 프리츠 부슈(Frity Busch)를 비롯한 많은 최고급 솔리스트들이 망명했다. 1964년부터 1990년까지 오트마 쉬이트너(Otmar Suitner)의 지휘 아래 유럽에서 주목받는 앙상블로 발전했다. 베를린장벽 붕괴 이후 1992년에는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이 예술 감독 겸 음악 총감독으로 임명되었다. 실내장식은 프랑스의 영향을 받은 로코코 양식, 외관은 바로크 양식이다. 정장을 입고 이 오페라 공연을 마주할 때면 오래 전 왕실의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이 아름다운 오페라 하우스는 1941년 공습으로 전체가 파괴되고 그 이듬해 12월 바그너의 <Die Meistersinger von Nürnberg/뉘른베르크의 명가수> 공연으로 재개관되었다. 바그너의 작품을 연주한 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히틀러가 가장 사랑하는 작곡가이기도 하지만, 그의 작품이 독일민족의 정체성을 찾고 독일음악의 가치를 부각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히틀러의 잔재는 또 있다. 오페라하우스 옆 베벨광장은 분서갱유로 유명한 곳이다. 수많은 문학인들의 책이 이곳에서 불태워졌다. 그 유명한 하이네의 말도 이곳에 쓰여 있다.
"이것은 시작일 뿐입니다.
책을 태우려다 결국 인간도 태우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히틀러는 자신의 벙커에서 연인 에바 브라운과 동반자살했고 곧바로 불태워졌다.
운터 덴 린덴 거리는 이 외에도 굵직한 건물들이 많다. 국립 도서관, 독일 역사박물관, 박물관 섬으로 이어지는 루스트가르텐(유희의 정원), 미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 등 열강들의 공관이 자리잡고 있어 정치적 요충지이기도 하다.
내가 오래 전 독일에 왔을 때
이 거리는 흙더미가 흩날렸다.
한창 프로이센 왕궁 건립에 휘슬을 불었던 때였다.
그동안 자주 오지 못한 사이 세월과 함께 도시는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지하철로 한 번에 올 수 있는 곳인데, 익숙한 곳을 새로운 시선으로 보는 것에 시간을 내지 못한 탓이다.
당연하게 여겼던 주변의 삶이 새롭게 다가왔다. 내가 못 본 사이, 놓치고 살았던 광경들이 소리없이 사라져갔을 것이라 생각하니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판에 박힌 삶, 일상에 젖어있는 시간이 얼마나 내 세계를 좁게 만드는지, 다시 한 번 느끼는 시간이었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썼던 문장이 떠오른다.
“진정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익숙한 풍경을 새로운 눈으로 보는 것이다”
P.s
이번 여름은 떠나지 않고
일상 속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려고 합니다.
소중한 것을 잃지 않도록 말이죠.ㅎㅎㅎ
다들 무더운 여름,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