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책 없는 출발
철없던 사춘기 시절,
나는 건전하게 지냈지만 꽤 즉흥적인 편이었다.
학교 끝나고 뭘 먹을지는 하굣길에 풍기는 분식점 냄새나 그날의 주머니 사정, 옆에 있는 친구가 누구냐에 따라 매번 달라졌다. 주말이면 우리 동네보다 더 신나 보이는 번화가로 놀러 가는 게 일상이었다. 용돈이라도 받으면 차비랑 점심값만 가지고 더 멀리 갔다.
대체로 '맛있겠다'나 '재밌겠다'가 동력이었다. 학교 수업이나 숙제에도 충실했고, 저녁에는 꼬박꼬박 집에 들어갔으니 문제는 없었다. 내향적이면서도 즉흥적인 성향 그대로 지냈다. 당시 우리 집 환경은 최악이었지만, 그땐 학교에 오면 다 잊어버렸다. 집 분위기가 안 좋아도 이어폰을 꽂고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들으며 잠들었다.
그런데 많은 일을 겪으면서 그런 나를 잊고 살았다. 성숙해지기도 했지만, 전에 없던 걱정들로 일상이 힘들었다. 대학을 졸업하면 금방 일을 할 줄 알았는데, 현실은 중요한 시험을 위한 공부조차 어려웠다. 우울증인 것 같아서 병원에 간 날은 하필 점심시간이었다. 도서관으로 돌아가 우울증에 관한 책을 며칠 동안 다 읽었다. 나아지진 않았으나 살만은 했다.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이 없는 건 당연했다. 이상하게도, 오히려 속이 시원했다. 결과를 확인하고 몇 분 후, 곧장 원하는 분야의 계약직 일자리를 찾았다. 그리고 전화부터 걸었다. 무작정 한 연락이지만, 어느 정도 사회화가 된 내 입은, 인사를 한 뒤 현재 지원 가능한지를 물었다. 심장이 두근거리기도 전에 시작한 것이다.
곧장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작성하고 가장 깔끔한 옷으로 입고 가서 서류를 제출했다. 결국 합격하여 일을 하게 되었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공고 후 가장 먼저 연락한 지원자이고, 이력은 없었지만 자기소개서에서 진심이 느껴졌다고 했다. 사실 대중교통으로 두 번 갈아타야 할 정도로 멀었고, 3개월짜리 계약이었다. 이후 연장이 되긴 했지만.
오랜만에 나를 찾은 기분이었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은 지워버리고 저지른, 막다른 길의 선택.
우울증 책을 수십 권 봐도 별 소용이 없던 마음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던 그 시기에 거의 나아졌다. 새벽에 나와 첫 차로 이동한 뒤,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일하고 야근까지 했다. 집에 도착하면 어떤 고민을 하기도 전에 이미 곯아떨어졌다.
우울증이 한가해서 걸린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오랫동안 기분부전과 우울증상이 있었고, 관련 공부도 하다 보니 어느 정도 알고 있다. 다만 내가 했던 일은 힘들었지만 원하던 일이었고 생각보다 잘 맞았다. 아무리 바빠도, 집에서 공부만 할 때보다 훨씬 행복했다. 그리고 월급도 있었으니 나의 다음도 준비할 수 있었다.
'좋으면 일단 해보는 것', 이건 나의 정체성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성향이다. 위험하지 않다면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출발하는 것. 그리고 나쁜 일이 온다고 해도 그전까지는 최대한 즐기는 태도.
중학교 시절, 좋아하는 가수를 보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친구와 했던 대화가 떠오른다. 친구의 어머님께서 친구에게 연락을 하셨는데, '집에 와서 보자'라고 으름장을 놓으셨는지 친구는 시무룩해졌다. 그때 내가 했던 말은 "아직 도착하려면 한참 남았는데, 지금부터 그러면 이미 혼나는 거 아니야? 집에 가서 혼나면 되잖아!"였다. 그러고 우리는 다시 한참을 공연 이야기를 하며 신나게 떠들었다. 반성은 필요하지만 미리 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때 그 직장에서 떠난 지도 벌써 15년이 흘렀다. 안타깝게도 '일단 해보자'라는 마인드를 계속 이어가지는 못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또 잊어버렸다. 원인이 뭔지 분석하기도 했고, 해결에만 집중하던 때도 있었다. 가족이 생기고 책임이 무거워지자 과도한 준비성은 쓸데없이 투철해지기만 했다.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으며 알게 된 것은, 나에게 필요한 것은 원인이고 해결이고 간에 지칠 땐 좀 쉬는 것이었다. 그러다 하고 싶은 것이 생기면, 메모해 두었다가 기회가 될 때 한 번 해본다. 요즘은 뭘 사든, 어딜 가든, 하다못해 글을 쓸 때도 준비 없이 문득 떠오를 때 한다. 저녁에 뭐 먹지로도 괴로워하던 나는 조금씩 흐려지고, 꽤 즉흥적이었던 예전의 내가 한 번씩 모습을 드러낸다.
생각보다 우리 뇌와 손이 알아서 일을 잘한다. 어차피 직장에 가면 저절로 일을 하게 되고, 집에 가면 뭐라도 상을 차린다. 미리 걱정 안 해도, 대충 해결이 된다는 뜻이다. 예견된 불행이라도 미리 혼날 필요는 없다. 너무 잘하면 손발이 고생이라는 말이 있듯이, 해야 할 일은 어느 정도만 하고, 하고 싶은 것은 그냥 시작해 보는 삶. 앞으로도 가야 할 길이 멀기에 조금은 필요한 방식이 아닐까.
약간은 충동적이었던 내가 계획적으로 살다 보니 버거웠는지도 모른다. 생긴 모양대로 살걸 그랬나 보다. 한 번 해보고, 아님 말고.
먼 길을 떠날 땐 가벼운 게 최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