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을 이야기한다면 아마도 서점일 것이다.
엄청난 다독가는 아니지만 약속시간이 좀 남았거나 딱히 할 일이 없으면 자연스럽게 가장 가까운 서점에 가게 된다. 꼭 특정한 책을 산다는 목적이 없더라도 서점이라는 공간 안에 들어서면 일단 마음이 편안해지기 때문이다.
조용히 시선을 내리고 평대에 뉘어진 책들을 고르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다짜고짜 호감이 생긴다.
'분명 좋은 사람일 거야' 하는 일종의 선입견. 혹은 '당신도 책을 좋아하시는군요' 하는 동질감이 형성된다.
조심성 많은 초식동물처럼 사박사박 책더미와 사람들 사이를 걷고 눈길을 끄는 책을 집어 들어 요리조리 살피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훌쩍 흘러가 있다.
이러한 이유로 30분 일찍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번화가에 일단 나왔지만 딱히 할 일이 없을 때, 마음의 평화를 찾고 싶은 금요일 오후 같은 때에 나는 서점에 간다.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서점을 드나들다 보니 가장 눈에 띄게 배치된 매대의 책들을 보며 그 시기의 유행을 유추해 보기도 한다.
분야마다의 차이는 있겠지만 요즘의 책들은 대체로 상냥하다.
'괜찮아. 다 잘될 거야',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돼', '그냥 좀 쉬어도 돼'라고 말을 건다.
가장 눈에 띄게 배치된 책들도 이런 류의 에세이들이다.
‘OOO에 미쳐라'나 ‘한 달만에 OOO 따라잡기’ 같은 자기 계발서의 격양된 목소리가 주를 이루던 과거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이다.
책은 시대의 결핍을 반영한다.
사람들에게 많이 선택받는 책은 결국, 사람들이 가장 먼저 채우길 원하는 가치를 충실히 담아 놓은 책일 것이다.
'OOO에 미쳐라'와 같은 자기 계발서가 인기였던 시기가 치열한 경쟁을 통한 성취가 가장 중요한 가치였던 시절이 있었다면,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경쟁보다는 휴식과 다양한 삶의 가치를 원하고 있기에 차분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네는 책들이 많이 눈에 띄는 것일 게다.
돌아보면 나의 경우도 비슷했다.
과거 신입사원 시절의 나 역시 회사에서 좋은 성과를 내는 것에만 몰입해 있었다.
프로젝트의 히어로가 되기 위해 불 꺼진 사무실에 혼자 남아 제안서를 준비하는 일이 익숙했다.
깜깜한 밤이 되면 친구를 만나거나 새로운 경험을 해볼 생각은 전혀 없이 좀비처럼 터벅터벅 걸어 좁은 자취방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면 바람 빠진 풍선인형처럼 침대 위로 쓰러졌고, 주말에는 배터리를 충전하듯 침대 위에 고정된 채 꼼짝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라고 불리는 현상이 있다.
어떤 일에 지나치게 집중하면 주변에 존재하는 다른 것들이 보이지 않는 현상인데 심리학자들의 재미있는 실험에서 이름이 유래했다.
실험 내용은 이렇다. 일단 사람들을 두 팀으로 나누어 한 팀은 흰 옷, 다른 팀은 검은 옷을 입게 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농구공을 서로에게 패스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촬영한 후 실험 참가자들에게 영상을 보여주면서 흰 옷 팀이 패스한 횟수를 세게 하였다.
그리고 영상이 끝난 후에 질문하였다.
"혹시 고릴라 보신 분?"
사실 영상 안에는 패스하는 사람들 사이로 고릴라 의상을 입은 사람이 유유히 지나가는 모습이 담겨 있었는데, 패스 횟수를 세는 것에 집중하느라 절반 이상의 실험 참가자들이 고릴라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신입사원 시절의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도 고릴라를 보지 못했던 사람들과 비슷했던 게 아닌가 생각해본다. 조금만 고개를 돌려 보아도 풍성한 인생의 경험이 널려 있었고, 그 시기에만 누릴 수 있는 또 다른 즐거움이 있었을 텐데 회사원으로서의 업무능력 인정이라는 하나의 목표에만 집중하느라 많은 것들을 놓쳐버린 채 단순한 패턴으로 살아갔던 것이다.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에 열정을 다해 몰입하는 것은 분명 멋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몰입의 시간은 그 분야에서의 능력을 단단하게 제련해 줄 것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하나의 목표에만 몰두하는 것 또한 경계해야 할 일이다. 하나의 목표만 바라보기엔 세상엔 즐거운 경험과 미처 몰랐던 기쁨들이 가득하니까. 조금만 시야를 확장하면 두근거리는 일들이 보이지 않았던 고릴라처럼 어슬렁거리고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