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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구십칠 Jan 03. 2021

일의 기쁨과 슬픔 그리고 므두셀라 증후군

 

 똑같은 365일 중 하루일 뿐이지만 12월 31일이 다가올수록 발이 지면으로부터 붕 뜬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이게 된다.
‘한 해 동안 고생 많았어. 짜식, 나쁘지 않았어’ 하고 스스로에게 수줍은 칭찬을 건네기도 하고, 은퇴를 앞둔 사람처럼 우울과 후련함의 감정을 오가며 다소 몽롱한 하루하루를 보낸다. (1월에도 똑같이 일할 거면서!)

나와 같은 회사원들에게는 이 시기에 빼놓을 수 없는 연례행사가 있는데 그것은 이른바 ‘연말평가’이다.
회사마다 용어와 방식의 차이는 있겠지만 1년 동안 진행했던 본인의 업무 성과를 되짚어 보며 그 내용들을 기록하고 상사에게 평가를 받는 일이다. 그리고 이 평가의 결과는 크건 작건 연봉협상이나 승진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투입된 프로젝트는 얼마나 많았는지, 그 프로젝트의 규모와 난이도는 어땠는지, 그 안에서 본인은 어떤 역할을 담당했는지, 클라이언트의 만족도는 어땠는지 등 나의 ‘퍼포먼스’를 꼼꼼하게 적어 넣는다. 마치 한 시즌을 마감한 축구선수의 활약상을 기록하는 작업과도 같다.

평가를 하는 상사 입장에서는 다수의 팀원을 평가해야 하기에 모든 팀원들의 업무 내용을 세세하게 알기 어렵다. 기록을 하는 당사자 입장에서도 모든 기억이 완벽하지만은 않기 때문에 기록 과정에서 일정 수준의 ‘각색’이 포함되기도 한다. (물론 대부분 회사원분들은 객관적으로 평가에 임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쉽게 말해, 잘한 일은 아주 잘한 것처럼 (대영웅 서사시처럼!), 못한 일은 (천재지변과 같은 변수로 인해) 약간 아쉬웠던 것처럼 기록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시기를 '직장인 므두셀라 증후군 창궐기'라고 부른다.

'므두셀라 증후군'은 어린 시절이나 첫사랑에 대해 나쁜 기억보다는 좋았던 기억을 주로 떠올리는 것처럼 과거의 기억을 아름답게만 포장하려는 심리를 말한다.

므두셀라는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는 1000살 가까이 살았는데 늘 과거에 있었던 좋은 기억만 떠올리고 그 시절을 그리워하여 '므두셀라 증후군'이라는 표현이 생겨났다고 한다.

어린 시절, 우리들은 잘한 일에는 당연히 칭찬이 따르지만, 실패하더라도 그를 통해 배울 수만 있다면 그 또한 칭찬받을 일이라고 배워왔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끊임없이 도전하고 실패로부터 배워라’라고 늘 이야기 들어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실패의 기억은 되도록 쓱 감추고, 성공의 기억만 또렷이 남기는 연말 직장인의 모습 (정확히는 저의 모습)을 보며 ‘이제 더 이상 실패로부터 배우기를 권장받는 나이는 지난 것인가? 아니. 나이 좀 먹었다고 너무 삭막하게 구는 것 아닌가?’ 하며 되지도 않는 투정을 마음속으로 부려본다.

회사의 평가표에는 결코 기록할 수 없기에, 그렇지만 우리는 실패로부터 배워야 하기에, 나는 아직까지 익명의 공간인 이 곳에 올 한 해 나의 위대한 실패들을 기록한다.

'저는 A프로젝트 수주는 했지만 딱히 열심히 안 했어요!
B프로젝트 할 때는 프리젠터를 맡았는데 리허설 때는 잘했다가 클라이언트 앞에 가서는 엄청 떨었었죠.
C프로젝트 할 때는 너무 화가 나서 뒤에서 요ㄱ..'


아. 딱히 배울 점이 있는 실패는 아니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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