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장소, 다른 온도
전화기 너머 그의 목소리는
놀라울 만큼 담담했다.
흔들리고 있던 건, 어쩌면 나 혼자였을까.
몇 계절이 흘러
우리는 다시 여의도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그를 마음 밖으로 밀어내는 데 서툴렀고,
그래서였을까.
결국, 그 자리에 다시 선 건 나였다.
멀리서 그가 보이자
오히려 마음은 조용히 가라앉았다.
속에서 일던 파도가
언제 그랬냐는 듯 멎고,
잔잔한 고요만이 남았다.
서툰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낙엽이 흩날리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발밑에서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가
조심스러운 대화보다 더 선명하게 들렸다.
함께 걷고 있었지만,
내 마음은 쓸쓸했고
왠지 모르게 더 외로워졌다.
흘러나온 일상의 말들 틈에서
우리가 숨겨둔 진심은
끝내 말로 옮겨지지 못했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누군가 용기를 낸다면,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
그건 어쩌면
나 혼자만의 바람일지도 모른다.
그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 하나로
이 자리에 나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마음이 달랐다고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도 그가 내 안에 살아 있기 때문이다.
툭툭 떨어지는 잎새 사이로
바람에 흩날리는 여의도의 길 위,
우리는 나란히 걷고 있었지만
문득, 혼자 걷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에도—
스쳐간 그의 어깨,
여전히 창백한 손목이
그때처럼 조용히 내 마음에 닿았다.
마치, 끝나지 않은 이야기처럼.
언젠가 다시 이어질 수 있다면—
그 시작이 나여도 괜찮겠다.
조심스럽지만, 분명한 마음으로.
- 은빛루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