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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븐도 Dec 31. 2024

아름다운 그대들과, 2024

2/2. 가능할 때 잔뜩 사랑하기를






 미래 안정감을 준다. 왜인지 모른다. 타인의 현실, 내다본 이세계가 더 단단해 보이는 때가 있다. 전쟁 같은 근무지만 동기가 있어 든든한 느낌이 들 때처럼. 나의 앞날은 불투명하며 혼란스럽지만  옆 그녀의 그것은 어찌 되었든 잘 흘러갈 것 같은 비논리적인 편안함이 느껴질 때가 있다.

거리감이 주는 힘이라고 해야 하나. 때로 그런 구역이 필요하다. 멀고 멀지만 그런대로 견고하고 청정한, 안정된 곳.



좋아하는 것들을 좋아하는 것이 내게 그렇다. 달리기가 그렇고 지하철에 앉아 혼자 듣던 노래들이 그랬고 하이라이트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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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굳이, 이렇게까지? 의 반복을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한 것을 찾아 나선 것 그래서 행복했다.

나의 구역들을 하나씩 만들어 놓은 것 같아서.  안에서의 내는 어떤 피곤한 걱정도 잣대도 없으니까. 다만 편안히 즐거워하는 내가 있을 뿐.











10월, 왕십리의 CGV. 나는 덕질의 끝을 봤다. 영화관 무대인사에서 반경.. 삼 미터 안쪽에서 마주친 그들은 참 잘생기고 말랐고 서글서글했다. 물리적으로는 아마 앞으로 더 가까워질 일이 없을 것이다. 나는 '내년에 해체하는 거 아냐?'라고 생각했다. 너무 좋으면 '이대로 죽어도 될 것 같아'라고 생각하는 그런 기전이다. 그 수많은 팬레터와 선물들을 어떻게 다 가지고 있을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한 '라이트'로서 쓴 짧은 편지도 전달했다.


닿지 않는 저편의 아이돌을 좋아하면서 할 수 있을 법한 일들은 다 한 것 아닌가. 행복하고 후련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그들의 컴백을 여기서 기다리고, 일하고, 저금하고, 쉬는 날 잘 놀고, 주변 사람들에게 잘하고, '이젠 뭐 해 먹고사나'의 고민을 이어 가는 거. 그게 전부다.










모 프로그램에서 노래를 부르는 그들의 영상에 달린 '성에서 탈출한 왕자님들 같다'는 댓글을 보고 혼자 엄청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팬의 흔한 '주접'이었을 수 있었으나 나는 그 댓글에 엄청나게 공감했다. 덕질을 하며 알게 된 그들은 훌륭한 직업인,에 가깝다는 생각을 했으나 아무튼 하늘거리는 상의를 입고 보라색 조명이 들어온 무대에 서서 노래를 하는 그 넷은 정말 그래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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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을 좋아하는 것은 현실의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과는 다르다. 보이는 직업이라는 건 적지 않은 걸 의미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매체에도 연결되어 있지 않는 일반인들도 인스타에 올릴 게시물 하나에 엄청난 정성을 쏟으니까. 많은 것을 잘라내고 채우고 지운다. 연예인들을 가까이서 볼 때마다 느끼는 건 사실 잘생겼다, 예쁘다, 보다는 '아, 이걸로 돈을 버는 사람들이 맞는구나' 하는 압도적인 인상이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스케줄 날이 되면 온갖 각도에서 찍은 사진이 올라오는 것과 출퇴근길이라며 까만 밴을 둘러싼 팬들의 무리를 보며 묘한 감정을 느낀 적도 많다)가 불러올 파장을 예상해야 하는 그들이 내보이는 것들은 항상 제련되어 있고 빛난다. 또한, 내가 말하는 것을 그들은 듣지 못하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나는 일부만 듣는다.

사실, 애매하고 먼 상호작용인 것이다.



사람으로서의 본인과 직업인으로서의 본인 사이에서 갈피를 똑바로 잡지 못하는 순간 그들은 '나락'으로 간다. 보이는 것들이 업인 그들이 보여주는 것을 잔뜩 소비하고 즐거워하는 경험은 분명 독특한 느낌을 주었다.

며칠간의 공연 티켓을 예매하고, 봤던 것을 또 보고, 곧 마흔을 바라보는 그들을 보며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귀엽다'라고 생각하는 스스로가 조금 혼란스럽기는 했던 것이다. 하지만 반년을 넘게 그들로 말미암아 행복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것만은 명확하기에 이제는 정의 내릴 수 있다. 아, 나는 같은 하늘 아래 저편의 왕자님들을 좋아하고 있다, 고. 










공연 셋째 날이었던 5월 12일. 나는 냉장고 한 칸을 다 채운 밀카무 비스킷을 몇 개 꺼내서 공연장으로 갔다. 사기를 치지 않고 내게 티켓을 전달해 줄 그 누군가에게 감사의 표시를 하기 위해서. 까만 옷에 베이지색 백팩을 멘 사람을 그 주변에서 30명쯤 지나치고 나자 그녀를 찾을 수 있었다. 콘서트가 끝난 후 집으로 오는 길에 그들의 노래를 실컷 들었다. 나는 이제 팬이 되었다. 평가와 판단은 저편에 버려두기로 했다. 그냥  좋아하기로 했다. 그렇게 됐다.


그녀는 공연이 끝난 후 주접을 참지 못한 내 카톡을 반갑게 받아주었다. 다행히 그녀도 단 것을 좋아했다. 나보다 덕질의 짬이 깊었으며, 족족 티켓팅을 망해먹는 내게 심심치 않은 도움을 주었다. 그녀와 나는 멤버들의 근황이나, 도저히 나 혼자 볼 수 없는 사진이나 영상을 공유했다. 각자의 직업, 날씨, 일상 같은 주제와 감사를 담은 기프티콘과 응원과 위로도 오갔다. 모든 것이 다 변하고, 지나간 후에 지금을 떠올린다면 아마 나는 하이라이트 멤버 넷에 그녀를 함께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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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콘서트 티켓을 내게 양도해 준 인터파크 공연 기대평의 그녀와 공연 후기를 잔뜩 나눴고, 6월. 광화문 무대 저편에서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한 멤버의 모습을 휴대폰에 담았고 공식 팬클럽에 가입했다. 7월. 해외투어를 도는 그들의 근황을 출퇴근 때마다 보며 행복해했고, 8월. 솔로콘서트 무대의 멤버는 그 지역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9월, 나는 달리기를 시작했으며, 10월. '덕친'은 내게 앨범과 스티커와 포토카드와 온갖 특전이 든 엄청난 크기의 택배를 보내주었고, 그들은 데뷔 15주년을 맞이했다.

11월, 그녀는 내게 부탁하지도 않은 오아시스 내한 공연 A구역 스탠딩석을 연석으로 구해 주었다. 12월, 그들은 크리스마스 라이브 방송에서 '내년에도 더 많은 행복한 일들을 함께해 봅시다'라고 했다.

1년이 그렇게 후딱 갔다. 신기하게도 이어진 인연과 더불어 많고 많은 일들을 담고서.












'지금은 투병생활을 하고 있지만, 내가 다음 공연은 봐야지'


콘서트 실황을 담은 영화에서 나온 한 팬의 나레이션이었다.

아이돌을 좋아하는 팬들의 마음이 궁금했던 적이 있다. 잘생겨서, 노래가 좋아서, 잘생겨서, 귀여워서.. 이유는 다양하겠으나 단지 그것만으로 그렇게까지 좋아할 수가 있나 의문이었던 것이다. 다시 또 그 입장이 된 지금도 사실은 잘 모르겠다. 그 간단한 말들 이면에는 사실 참 다양한 사연들이 숨어 있는 것 같아서. 하지만 그 이유에서 공통적인 것은, 당신들을 좋아했던 시간만큼은 내게 찬란해서, 가 아닐까.

12년, 5년, 7년.. 내가 자라고 지나온 시간 사이의 당신들이 항상 멋졌던 것처럼, 그걸 바라본 내 마음 역시 변하지 않고 빛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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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닿지 않는 존재라 나는 상처받을 가능성이 적다. 또한 이 사랑 어쩌면 소비의 연속이며 사실 방어적이고 완전하지 않다. 그러나 그 거리감 덕에 그들이 존재하는 미래는 그 공연날처럼 밝고 파랗고 맑을 듯해 안심이 된다.


내가 그 언젠가 그들을 더 이상 좋아하지 않게 된다고 해도 그들은 (당연하게도) 잘 지내며 행복할 테니까. 내가 보는 남들이 그런 것처럼.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이 닿으면 한결 괜찮은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들이 알아서 잘 살고 있을 만큼 미래의 어느 시점의 나도 그럴 수 있을 테니까.

많고 많은 일이 있었지만 결국은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 그들처럼, 나의 올해처럼 앞으로도 간이 가겠다는 이상한 안정감이 들어서.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앞뒤 없이 좋아할 수 있는 것들의 시작이 된 그들을 만난 건 그런 행복감을 준다. 언젠가 떠나더라도, 이 시간과 그때 생각한 내 미래는 참 따뜻했다고. 그들은 저 멀리 있었으나 그들이 관련된 모든 순간은 더 진하게 기억되고 즐거웠기에 나는, 내년에도 그들을 행복하게 볼 수 있기를 바란다.

더불어, 역시나 반짝거릴 그들의 활동만큼이나 나도 힘껏 잘 살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주어진 것들을 누리고, 놓쳐 버릴 것들을 잡고, 많이 웃고, 웃을 일을 찾아다니고, 그러기 위한 체력을 만들어 놓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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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것은 활기를 준다.

현실에는 없는 '티니핑'이며 '엘사공주'를 보며 즐거워하는 그 마음을 지금이라도 가지지 못할 이유가 있나. 그래서 생각한다. 좋아할 땐 생각하지 말자, 고.


모든 것이 잔뜩 변하는 세상의 흐름에서, 지금의 이 마음만은 나를 살게 하고 내일도 모레도 출근할 힘을 주니까.












+

 한 해의 마지막 날이 되었네요. 

잘 살아 있느라 모두들 고생하셨습니다.

오늘도 최선을 다해 자주 즐거우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요.

감사합니다.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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