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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ySnap May 04. 2018

그린델발트 : 알프스를 걷다

8월의 뜨거운 푸른 하늘 아래 압도적인 웅장함으로 그 정도를 가늠할 수 없는, 흰 눈이 보이는 아이거 북벽. 초록 잔디밭에 듬성듬성 자리 잡은 샬레들. 귀를 기울이면 들려오는 기차 지나가는 소리가 정겹고,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따뜻한 모닝커피 한잔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곳. 내가 사랑하는 여행지, 스위스의 산속에 있는 작은 마을 그린델발트이다. 트래킹을 위해 스위스로 여행 온 나는 이 곳에 베이스캠프를 차렸고, 매일 다른 트래킹 코스를 걸었다. 항상 시간별로 여행 스케줄을 짜는 나에게, 하루에 걷고 싶은 길을 하나만 정하면 되니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오늘 못 걸은 곳은 내일 걸으면 되었다. 그저 걷고 보고 셔터만 누르면 되는 곳. 여행과 사진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천국 같은 곳이었다.  



8월의 여름, 나는 추위에 떨었다.


융프라우에 오르기로 한 날인데 비가 많이 내리고 있어서, 아침부터 난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었다. 안개도 많이 껴서 이대로 올라갔다간, 아무것도 못 보고 내려올 것만 같았다. 융프라우를 실시간 영상 체크할 수 있는 사이트에서 계속 관찰을 한 결과, 비가 내리는 그린델발트와 다르게 융프라우 정상에는 파란 하늘이 선명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빨리 올라오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얇은 바람막이 하나를 걸치고, '여름인데 뭐 어때?'라는 짧은 생각으로 융프라우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두꺼운 패딩으로 무장한 외국인들이 '너 괜찮겠어?'라고 말하는 듯한 시선으로 날 쳐다봤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산을 오를수록 거세지는 빗소리와 점점 짙어지는 안개 때문에 마음 한 구석이 답답해져 왔다. 분명히 출발 전에는 하늘이 맑았었는데 점점 안 좋아지는 상황에 걱정이 계속되었다. 스위스 여행 기간 동안 세상과 멀어지자는 생각으로 유심 구매를 안 하고 호텔 와이파이로만 버티던 터라, 마치 성적표를 조금씩 내리며 결과를 확인하는 듯한 심정으로 천천히 오르는 기차와 함께 융프라우를 향해 갔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기차역에 도착한 나는, 내리자마자 뿜어 나오는 하얀 입김과 얇은 바람막이는 우습게 스쳐 지나가는 차가운 바람에 이내 후회하고 말았다. 조금만 더 따뜻하게 입고 올걸. 길을 따라 전망대로 나갔다. 한 여름에 뽀드득 소리가 나는 흰 눈을 밟으며 눈부신 주변을 둘러보니 웅장한 풍경에 압도되고 말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알레치 빙하와 깊이와 크기를 파악할 수 없는 크레바스들. 흰 눈밭에 점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기준으로 크기를 겨우 가늠할 수 있을 정도였다. 살 속까지 파고드는 차가운 바람에 추웠지만, 거대한 융프라우 감상하는 시간을 추위 따위에 빼앗기기 싫었다. 조금이나마 더 느끼고자 흰 눈을 만져보기도 하고, 저 멀리 바라보기도 하며 한참을 눈과 카메라에 담았다. 8월의 뜨거운 여름에 누군가는 더위와 싸우고 있을 때, 나는 추위에 떨고 있으니 얼마나 대단한 사치를 부리고 있는지를 생각하며 이 순간을 즐기기로 했다. 스위스 깃발 아래에서 인증 사진을 찍을 때,  빨개진 볼과 얼어붙은 표정에 억지웃음을 짓고, 기록을 남긴 뒤에 전망대 내부에서 파는 한국의 맛, 신라면을 먹으며 얼어있던 몸을 녹이는 것으로 행복함을 느꼈다. 내가 지금까지 먹었던 컵라면 중에서 가장 맛있게 먹었다. 



융프라우, 아이거 북벽, 묀히를 바라보며 걷다.


트래킹을 하면서 '아~ 너무 좋다. 정말 좋다' 이 말을 매일 했다. 특별한 꾸밈이 필요는 아름다움이었다. 매일 다른 코스들을 걸었는데, 지리산 둘레길이나 제주도 올레길을 걸어본 사람들 또는 그냥 걷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쉬운 길들이다. 그래서 피로도가 높지 않아 매일 걸을 수 있었다. 그린델발트에 머무르면서 '융프라우에서 클라이네 샤이덱', '피르스트에서 바흐알프제 호수', '뭰리헨에서 클라이네 샤이덱' 그리고 샌들을 신고 걸었던 '쉬니케 플라테 코스'까지, 각각의 코스가 주는 색다른 매력 때문에 여행의 대부분 일정을 전부 걷는 데 사용했다. 스위스에서 무엇을 했냐고 물어보면 그냥 걷다 왔다고 말한다. 해가 떠있는 동안은 정말 걷기만 했는데, 그게 그렇게 좋았다. 그린델발트는 걷기 위해서 오는 곳, 그런 곳이다.  트래킹을 하면 귀에 핸드벨 연주 소리가 들려오는데, 바로 알프스의 소들이 풀을 뜯거나 걸을 때마다 울리는 소종 소리이다. 알프스 소의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다. 자연에 방목해서 키우기 때문에 여행객들과 같은 공간을 공유한다. 그래서 먼저 소에게 다가가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있고, 벤치 앉아서 잠시 쉬고 있으면 소가 다가오기도 하고, 혹은 길을 건너가는 바람에 잠시 트래킹을 멈추고 기다릴 때도 있다. 

자전거 두고 쉬고 있다가, 다가 오는 소 때문에 피하는 여행객

내가 걸었던 코스 중에서 정말 마음에 들었던 곳은 뭰리헨에서 클라이네 샤이덱까지 걸었던 코스다. 시작부터 끝까지 융프라우를 바라보면서 걷는데, 봉우리 끝만 보는 것이 아닌 밑에서부터 정상까지 한눈에 담으면서 걸을 수 있다. 이 거대한 산봉우리가 한눈에 들어오는 것이 정말 비현실적인 것 같아서 걷다가 한참 바라보기를 여러 번 했다. 더군다나 지나가는 사람들도 거의 없어서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거나, 혹은 같이 여행 온 사람과 속 깊은 대화를 나누기에도 정말 좋다.  천천히 걸으면서 그동안 못했던 말들, 정리하지 못했던 생각들을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털어낼 수 있다. 사람이  없는 곳을 여행하는 것은 이런 장점도 있지만, 소심한 성격 때문인지 거대한 산봉우리 밑에 혼자 남겨져있다는 것에 불안한 마음이 생길 때면 주위를 둘러보며 누군가의 존재를 찾았다. 그러다 저 멀리 점처럼 보이는 사람이라도 발견하면 그제야 마음을 놓고 다시 가던 길을 계속 걸어가곤 했다. 나와 반대의 코스로 걸어오는 사람을 만난다면 어찌나 반갑던지, 이름과 국적, 나이를 모르지만 그 순간만큼은 사막 위의 오아시스를 발견한 듯한 표정으로 굳이 아이컨택을 하며, 간단한 인사를 나눴다. 그러면 이 길이 맞는구나란 생각에 한동안 마음이 편안해져서 대자연을 만끽하며 다시 걸었다.   



아이거 북벽을 옆에 나란히 두고 트래킹 할 때 비가 내린 적도 있었다. 작은 우산을 펴고 빗소리를 들으면서 걷다가 분위기에 어울리는 조용한 발라드 음악을 틀었다. 비 오는 날 카페 창가에 앉아서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커피 한잔을 할 때의 그런 기분처럼, 그 순간의 느낌이 너무 좋아 괜히 감성적으로 바뀌기도 했다. 흐린 하늘이 매력적으로 보이고, 녹색빛의 나무와 잔디밭은 더욱 활기를 가진 색을 띠고, 정해진 시간대로 지나가는 기차 소리를 들으며 이렇게 걷다가 비가 오는 것도 하나의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비가 그치면, 이 분위기가 깨지는 것이 아쉬워서 비가 다시 오기를 기대하기도 했다. 주위의 방해가 없이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걷는다는 것. 자연이 주는 여유란 선물이었다.  



트래킹이 주는 즐거움과 함께 하루의 마지막은 항상 아이거 북벽을 바라보며 시원한 맥주 한잔으로 마무리했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끝난 나에게 주는 작은 선물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것들에서 행복을 느끼는 게 소확행이란 것이겠지. 사진이 좋아 여행을 떠나면서 기억에 오랫동안 남을 이 곳이, 글을 쓰는 지금도 스위스 산속의 작은 마을에서 보냈던 그 날들이 그립다. 언젠가 기회가 오면 다시 가보고 싶은 그곳을 그리워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것을 알기에, 다음에 만날 날을 기약하며 사진으로나마 다시 추억에 잠겨야겠다.



아참! 놓치면 아까운 장면.


어두워졌다고 아쉬워 하지 말자. 자기 전에 창문을 열어 잠깐 하늘을 보자. 10초 정도. 눈이 어두움에 적응이 됐을 때, 밤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날이라면 추운 밤공기를 막아 줄 바람막이를 걸치고, 잠시 밖으로 나와보자. 그러면 아이거 북벽과 함께 나란히 있는 은하수와 수많은 별들이 평생 잊지 못할 낭만을 선물해 줄 것이다.

(은하수는 계절에 따라, 올라오는 자리와 선명도가 다를 수 있습니다. 미리 확인이 필요합니다.)


그린델발트의 은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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