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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ySnap May 18. 2018

그라나다 : 맥주 한 캔이 간절했던, 그 날의 밤

눈부신 아침 햇살이 작은 호텔 방 안으로 들어왔을 때, 이미 난 나갈 준비를 거의 마친 상태였다. 정오가 되면 살인적으로 뜨거워지는 햇살 때문에 오전에 알함브라 궁전을 투어 하는 나는 최대한 빨리 서둘러야 했다. 구글 지도에 목적지를 찍고 길 안내로 가는데, 좁은 골목길로 나를 안내했다. 조금씩 가까워지는 알함브라 궁전을 바라보며 틀린 길은 아닌 것 같았지만, 큰길을 옆에 두고 골목길 사이를 누비게 안내해주는 지도가 계속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카메라만 들면 골목길 산책을 좋아하는 나를 위한 구글 지도의 작은 배려라 위안 삼고, 어설프게 안내해주는 지도를 따라 걸어갔다. 



알함브라 궁전 초입에 도착하면, 마치 수목원에 도착해서 올라가는 듯한 길이 펼쳐진다. 양 옆으로 가지런히 줄지어 선 울창한 나무들이 나를 반겨 주는데, 아침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내려와 성스러운 빛 갈림이 연출될 때의 모습은 아직도 잊지 못하는 장면 중 하나이다. 이런 장면을 마주치면 나는 발걸음을 멈추는 버릇이 있다. 마음에 드는 사진을 꼭 담을 때까지 셔터를 눌러야 하는데, 조금씩 사라지는 빛 갈림 때문에 원하는 장면을 담지는 못했지만 이 순간을 본 것만으로도 행복한 생각에 시작부터 발걸음은 가벼웠다. 



알함브라 궁전은 그라나다의 도시처럼 특별히 기억에 남는 색깔이 없었다. 채도를 한껏 내린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오로지 정원에서만 선명한 색깔을 뿜어내는 나무들과 아름다운 꽃의 알록달록한 색깔만이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그래서일까, 궁전이었지만 잘 가꿔진 정원을 걷는 것 같았다. 그리고 넓기는 어마하게 넓어서 걷다가 몇 번이나 쉬어야 했지만, 눈에 선명하게 들어오는 녹색 때문에 시각적인 피로도는 상당히 낮았다. 이 곳은 이슬람 문화가 반영되었다고 하지만, 몇몇 군데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을 뿐 내가 여행을 다닌 나라들 중에서 이슬람 문화권이 없었기에 크게 무엇을 느끼거나 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이렇게 넓은 알함브라 궁전에서도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곳이 한 군데 있다. 바로 그라나다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 같은 높은 성벽이었다. 여행을 하다 보면 항상 핵심 몇 군데만 둘러보기 때문에 그 도시가 가지는 느낌을 제대로 보지 못해 높은 곳에 올라가서 도시 전체의 모습을 감상하는 것을 나는 좋아한다. 내려다본 그라나다의 모습은 역시 무채색에 가까운 도시였다. 여태껏 화려한 여행지를 다닌 나에게 이런 모습은 색다른 매력으로 다가왔다. 


알함브라 궁전을 둘러보고 난 후, 타는 목마름에 맥주와 환타를 섞은 '클라라'와 지금도 생각나게 하는 짭짜름한 하몽을 먹으러 갔다. 스페인 여행을 하면서 즐긴 먹거리였다. 뜨거운 더위에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생각이 매우 절실했지만, 스페인에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찾는 것이 생각보다 어려웠다. 세비야에서 스타벅스를 발견해서 마신 것과, 여기에서 던킨 도넛을 발견해서 마신 것이 전부였다. 항상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면 뜨거운 아메리카노와 얼음잔을 같이 주는 이해하기 어려운 문화 때문에, 섞으면 마치 김 빠진 맥주처럼 맛이 없는 미지근한 아메리카노를 마시기 싫어 목이 마르면 무조건 시원한 맥주를 마셨다. 여행에서 마시는 시원한 맥주는 언제나 옳다.



그라나다는 정말 큰 특색이 없는 심플한 도시이다. 모던함이라고 해야 할까. 난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그냥 심플하고 간결한 것을 좋아하는데 그라나다가 딱 그런 곳이었다. 어찌 보면 이것이 그라나다만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난 이 도시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스페인을 여행하면서 가장 좋았던 곳이 어디였냐고 물어보면, 항상 그라나다라고 말한다. 누군가 스페인을 여행한다면 여기는 꼭 가봐라고 할 정도로 마음에 들었는데, 모던함과 더불어 니콜라스 전망대까지 올라가는 길이 나에게 제공해주는 다양한 사진 소재거리들이 즐비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전망대까지 향하는 길은 좁은 골목길부터 시작된다. 양 옆으로 즐비한 가죽 공예점에서 뿜어 나오는 가죽 특유의 냄새가 나의 후각을 자극하고, 빈티지함이 멋스러운 공예품들은 나의 시각을 자극했다. 그리고 건물들은 전부 화이트톤의 페인트를 칠했기에, 카메라로 셔터만 누르면 모든 것이 작품이 되는 곳이었다. 나는 사진과 관련된 모든 활동에서 'MySnap'이라는 작가명을 사용한다. 그냥 스냅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상업 목적이 아닌, 그렇다고 어마한 작품을 담아내는 것보다 사소한 일상을 기록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두기 때문인데, 나처럼 스냅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이 골목길을 꼭 걸어보라고 하고 싶을 정도로 너무 좋았다. 



천천히 사진을 찍으며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니콜라스 전망대에 도착한다. 이 곳에서 알함브라 궁전을 바라보며 일몰과 야경을 감상할 수 있는데, 이 장면을 보기 위해 이 곳을 방문하는 것은 충분한 가치가 있는 곳이었다. 해가 지는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나는, 주변의 버스킹 소리를 들으며 잠시 자리를 잡고 알함브라 궁전을 바라봤다.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쳐다보는 순간이 너무 편안하고 행복했다. 하지만 곧 내 주변에서 들리는 DSLR의 묵직한 셔터 소리 때문에 나의 감상은 잠시 흐트러졌고, 바르셀로나에서 첫날에 잃어버린 카메라 가방이 잠시 떠올랐다. 아마 그때 분실하지 않았다면, 나도 이들처럼 더 양질의 사진들을 찍을 수 있었을 거란 생각에 상당히 아쉬웠다.



아직 해가 지기에 시간이 많이 남은 것 같아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그냥 발길이 닿는 곳으로 무작정 걸었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장면이 나오면 사진을 찍고, 더우면 쉬었다가 전망대 주변을 크게 한 바퀴 돌았다. 나중에는 길을 잃어버려 구글 지도를 결국 켜야 했지만, 모험을 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지루하지 않은 산책이었다. 


걷다가 목이 말라서 배회하던 중 때마침 발견한 작은 가게에서 생수 한 병을 사들고 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이번 여행에서 그리고 내가 그동안 여행 다니면서 남긴 사진 중에서 베스트 5위 안에 드는 장면을 만났다. 온몸에 흐르는 전율과 동시에 무조건 셔터를 눌러야 한다는 생각에 급하게 카메라로 그 모습을 담았다. 다른 사람이 본다면 그냥 그런 사진이지만, 난 이 사진이 너무 좋아 한동안 행복했었다. 오래된 자동차와 노인. 세월의 느낌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듯해서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Old Man, Old Car

이 사진 한 장에 기분 좋아 한참 들떠있다가 하늘을 보니 해가 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서둘러 다시 돌아온 니콜라스 전망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틈을 겨우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만들고 나서 화려한 조명이 들어온 알함브라 궁전의 모습을 담기 시작했다. 그라나다에서 가장 화려하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다른 관광객들도 같은 느낌이었는지 전부 이 모습을 각자의 카메라와 눈에 담기 시작하며 감성이란 양념을 더 하고 있었는데, 단체 관광객으로 온 한국인 가이드의 '소매치기 조심하세요'라는 외침에 일몰에 깊이 빠지던 나의 감성은 다시 얕아지고 말았다.

 


해가 지평선 뒤로 넘어가고, 하늘은 보랏빛으로 물들고 점점 더 진해지는 알함브라 궁전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시원한 맥주 한잔이 생각났다. 목을 톡 쏘는 라거가 아닌 다양한 맛을 내는 에일 맥주가 너무 마시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을 바라보는 느낌이 에일 맥주가 가지는 맛의 매력과 같아서일까. 주위를 둘러봐도 당장 맥주를 사 올 수 있는 곳이 없었다. 맥주 한 캔이 간절했지만, 결국 마시지 못했다. 스페인에 다시 온다면(아마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완공이 되는 해이겠지만.) 알함브라 궁전의 일몰과 야경을 바라보며 시원한 맥주 한잔을 꼭 하기 위해 그라나다에 다시 오리라 다짐했다. 


해가 완전히 다 넘어가고 어두워졌을 때, 광장에 펼쳐진 플라멩코 공연을 잠시 감상하고 다시 골목길을 따라 내려왔다. 낮에 올라오면서 봤던 그 골목길이 밤이 되니, 화려하고 멋스러워지게 변신해있었다. 오늘 하루를 버틴 나의 작은 카메라의 얼마 남지 않은 배터리를 이 곳의 장면을 담는데 모두 소진하고, 숙소로 들어왔다.



스페인 여행을 하면서 그라나다를 1박 2일만 계획했었다. 충분할 줄 알았다. 알함브라 궁전만 보면 끝날 줄 알았던 이 작은 도시가, 사진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그 어떤 도시보다 만족스러운 연출력을 보여줬다. 그래서 너무 아쉬워서, 다음에는 최소 2박 3일은 머물러야겠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에게는 스쳐 지나가는 이 작은 도시가, 나에게는 가슴 한구석에 아쉬움으로 가득 담겨있는 도시가 돼버렸다.


다른 화에 비해서 유난히 이번화에는 사진이 많이 담겼다. 더 담고 싶었지만, 지루함이 담길까 봐 조절하느라 힘들었다. 그만큼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은 사진을 많이 남긴 곳이 그라나다인데, 다시 방문하는 그 날에 이번에 하지 못한 아쉬운 것들을 전부 다 털어내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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