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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도스로 Oct 27. 2020

한글: 한글은 여전히 뜨겁다

- 한글 창제와 훈민정음 해례본 사건

○ 세종대왕최고의 업적 훈민정음 창제

 조선의 4대 임금인 세종은 지금까지도 성군의 대명사로 꼽힐 정도로 치적이 많습니다. 밖으로는 북방의 4군과 6진을 개척하여 영토를 확장하였고, 안으로는 문화와 학문을 번성시켰습니다. 또한 세종은 토지세법을 확정하기 위해 무려 6개월 가까이 일종의 여론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이는 민심을 중요하게 여기는 세종의 통치관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입니다. 여러 업적이 있지만 세종의 최고 업적을 꼽으라면 역시 훈민정음 창제를 선택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만큼 훈민정음은 독보적인 가치를 문자입니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건 세종 25년인 1443년이고, 반포한 건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446년입니다. 오늘날 한글날은 10월 9일인데, 이날은 <훈민정음>이라는 책자를 발간한 날입니다.

 훈민정음은 창제 연도와 원리, 사용법이 분명히 밝혀져 있는데, 이는 세계적으로 매우 희귀한 일입니다. 하지만 훈민정음을 창제한 주체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 세종이 단독으로 만들었다는 설, 세종이 왕자들 가운데 일부와 만들었다는 설도 있지만, 집현전 일부 학자들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 작업을 했다는 주장이 보다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듯합니다.

 훈민정음이 과학적인 문자라는 점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문자를 확장하는 방식도 체계적이라 배우기도 쉽습니다. 그래서 훈민정음을 만드는 일에 관여한 것으로 보이는 정인지는 “슬기로운 사람은 하루아침 만에 깨우치고, 비록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훈민정음의 우수성은 세계적으로도 인정받고 있는데, 영국의 역사학자인 존 맨(John Man)이 “훈민정음은 모든 언어가 꿈꾸는 최고의 알파벳이다”라는 최고의 찬사를 보낼 정도입니다.

 이처럼 뛰어난 점이 많은 훈민정음이지만, 창제 당시에는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훈민정음을 언문(諺文) 등으로 낮잡아 부른 것도 봐도 당시에 훈민정음이 얼마나 홀대 받았는지를 짐작할 수 있죠.

 훈민정음 창제에 가장 강력하게 반발한 신하로는 최만리가 꼽힙니다. 최만리는 집현전 부제학이었는데, 집현전을 실질적으로 책임지는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최만리는 총 여섯 가지의 이유를 들어 훈민정음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지금껏 중화의 제도를 잘 따라왔던 우리나라에서 언문을 창작한 것이 놀랍다. 그리고 언문 창작은 사대모화(事大慕華)의 도리에 부끄러운 일이다.

 둘째, 몽고, 서하, 여진, 일본과 같은 오랑캐만이 자기 글자를 가지고 있는데, 중화를 닮았다는 평가를 받던 우리가 오랑캐가 하는 짓을 하는 걸 좋은 걸 버리고 나쁜 걸 취하는 것이다.

 셋째, 지금까지 이두를 사용하여 왔는데 큰 불편이 없었고, 언문은 학문과 정치 발전에 도움이 안 된다.

 넷째, 백성에게 형벌을 부여하는 일과 관련하여 백성들이 억울함이 가지는 건 글자를 몰라서가 아니라, 형벌을 집행하는 관리가 공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섯째, 모든 일은 신중하게 처리해야 하는데, 급하게 글자를 만들고 전파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여섯째, 동궁(세자)이 학문에 몰두해야 하는 데, 언문을 배우느라 쓸데없는 곳에 시간을 쓴다.     

 이 상소문으로 인해 최만리는 사대주의의 대표주자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합니다. 어느 국어학자는 최만리에 대해 ‘부패한 저능아’, ‘역사의 반역아’라는 극단적인 표현까지 사용한 바 있습니다. 중국의 문화만을 우수한 것으로 평가하고 자기 글자를 갖는 일을 오랑캐나 하는 일로 폄훼하는 주장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강대국에 굴종하는 사대주의로 해석될 여지가 많습니다.

 하지만 최만리를 새롭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제기됩니다. 최만리가 매우 강직한 성품을 가진 훌륭한 관리였고, 최만리가 강조한 사대모화는 당시 지배층의 일반적인 인식이었으므로 현재의 관점에서 지나치게 가혹한 평가를 할 수는 없다는 반론입니다. 세종은 훈민정음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들을 불러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때 세종이 다른 비판에는 적극적으로 반박을 하면서도 “훈민정음이 사대모화에 반한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특별한 반박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근거로 세종도 최만리의 주장에 수긍하는 부분이 있었다는 해석도 있죠.     

 최만리 상소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는 않으나, 한 가지 분명한 점은 당시 한글(훈민정음)은 뜨거운 감자였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훈민정음이 창제된 지 500년이 훌쩍 지난 오늘날도 훈민정음은 여전히 뜨거운 주제입니다. 과거의 논쟁이 훈민정음 자체에 대한 것이라면, 오늘날의 논쟁은 <훈민정음 해례본>이라는 서적을 둘러싼 것입니다.     


○ 훈민정음 해례본이란 뭘까?

 새로운 제품이 나오면 제품의 구성이나 기능을 안내하는 설명서도 만들게 마련입니다. 별것 아닌 전자 제품에도 사용설명서가 있는데, 하물며 훈민정음이라는 아주 생소한 글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새로 창제된 글자인 훈민정음을 설명한 일종의 해설서가 바로 <훈민정음 해례본(解例本)>(이하 “해례본”)인데, 이 책자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첫 번째 부분인 ‘본문(예의)’에서 훈민정음의 창제 목적을 세종대왕이 직접 밝히고 있습니다.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자와로 서르 사맛디 아니할쎄"로 시작하는 유명 구절이 있는 부분이 본문이죠. 두 번째 부분인 ‘해례’는 훈민정음을 만든 원리 및 자음과 모음의 체계 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부분인 ‘정인지 서문’은 훈민정음의 우수성과 편찬자 등이 기재되어 있습니다. 

 해례본을 통해 훈민정음이 백성을 위해서 기획적으로 언어를 창제한 인류 역사상 최초의 문자이며, 특히 발음기관을 본떠 만든 최초의 언어라는 점이 분명히 밝혀졌습니다. 해례본은 그 문화적∙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아, 1962년 12월 국보 제70호로 지정된 뒤,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하였습니다. 


             


 해례본은 간송 전형필 선생이 각고의 노력 끝에 입수하였고 현재 간송미술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해례본은 하나가 아니고, 경북 상주시에도 해례본이 하나 더 있습니다. 간송미술관에 보관된 것(간송본)과 구별하기 위해서 흔히 ‘상주본’이라 부릅니다.

 상주본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난 건 2008년의 일입니다. 경북 상주에 사는 배익기 씨는 안동 MBC에 취재 요청을 하여, 상주본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 겁니다. 그 뒤부터 상주본을 둘러싼 법적 공방이 치열하게 벌어졌습니다. 배 씨가 상주본을 공개하자 골동품상인 조 모씨가 자신의 물건을 배 씨가 훔쳐갔다며 배 씨를 경찰에 고소한 겁니다.

 <문화재보호법>은 문화재인 것을 알면서도 문화재를 손상시키거나 훔치면 2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배 씨는 문화재인 상주본을 훔쳤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 논란의 핵심쟁점은?

 배익기 씨의 형사사건에서 핵심적인 쟁점은 “배 씨가 상주본을 어떻게 가지게 되었는가”였습니다. 이 문제는 상주본의 소유권을 누가 가지는 지와 직결됩니다.

 먼저 배 씨의 주장을 들어보겠습니다. 

 “상주본은 원래부터 저의 것입니다. 집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집수리를 하느라 짐을 들어내는 과정에서 상주본을 발견하였습니다. 워낙 오래 전부터 보관하고 있던 것이라, 언제 누구로부터 취득한 것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골동품상 조 씨의 이야기는 전혀 달랐습니다.

 “배 씨의 말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누구에게 언제 구입했는 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상주본은 약 10년 전에 구입하여 제가 운영하던 골동품상에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배 씨가 저의 골동품점에 와서 상주본을 본 뒤 문화재로서 가치가 높다는 걸 알게 된 모양입니다. 그 뒤 가게로 와서 30만원 어치의 고서적 박스를 두 박스 매입하면서 가게에 있던 상주본을 몰래 훔쳐간 뒤, 마치 자신의 물건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조 씨는 어떻게 상주본을 가지게 된 걸까요? 문화재 절도범인 A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상주본을 확보한 건 1999년 무렵입니다. 안동시에 있는 광흥사라는 사찰에서 유물을 훔쳤는데, 그 유물 중에는 고가의 불경도 있었고 고서적들도 20~30권 있었습니다. 상주본은 그 고서적들 중 하나입니다. 훔친 유물들은 골동품점을 운영하는 조 씨에게 팔았습니다. 불경을 아주 비싼 가격에 팔았기 때문에, 상주본을 포함한 고서적들은 약 500만원 정도로 싸게 팔았습니다.”     

 세 사람의 진술이 조금씩 차이가 나긴 하지만, 조 씨와 A씨의 말을 합쳐보면 A씨가 훔친 유물에서 발견된 상주본을 조 씨가 구입한 뒤 골동품점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배 씨가 상주본을 몰래 훔쳐갔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물론 배 씨는 그 사실을 전면적으로 부인하였죠.     


○ 과연 누구의 말이 맞을까?

 똑같은 상황에 대해서 사람마다 전혀 다른 말을 하는 건 흔히 있는 일입니다. 폭행 사건에 연루되어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는 피의자들은 대체로 “나는 가만히 있는데 저 사람이 먼저 때렸다”라고 목소리를 높이는데, 두 사람의 주장이 양립할 수는 없으니 둘 중 한 명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죠.

 상주본 사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상주본의 취득 경위에 대해 누군가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누구의 말이 진실에 따라, 배 씨가 조 씨의 상주본을 훔친 것인지가 가려지게 됩니다. CCTV 같은 객관적인 물증이 있다면 문제가 쉽게 해결되겠지만, 이 사건에는 물증이 없고 상반된 진술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법원은 누구의 말이 더 믿을 만한 것인지를 판단하여 사실관계를 재구성할 수밖에 없는데, 신빙성을 판단할 때 주요한 역할을 하는 두 가지 요소는 바로 진술의 일관성과 구체성입니다.

 ‘사기도 머리가 좋아야 친다’라는 말이 있듯이, 거짓말을 일관되게 하는 건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말을 지어내다 보면 어딘가 막히는 부분이 있게 마련이고 그 과정에서 처음에 했던 이야기와 모순되는 이야기를 하는 일이 생깁니다. 그래서 일관성이 깨지면 신뢰도가 깎일 수밖에 없죠.

 법원은 골동품상인 조 씨의 진술이 바뀐 점에 주목했습니다. 조 씨는 상주본 취득 과정에서 대해 처음에는 “누군가로부터 상주본을 구입한 것이다.”라고 말했다가, 나중에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상주본의 보관 장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데, 당초에는 “골동품점 안에 있는 나무궤짝 위에 보관하고 있었다.”가 했다가 그 뒤에는 “골동품점에 있는 책상 서랍 안에 보관하고 있었다.”라고 진술을 바꿨습니다.     

 또한 법원은 문화점 절도범 A씨의 진술에도 의문을 가졌는데, 이번엔 구체성이 문제였습니다. 직접 경험을 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경험 사실을 이야기할 때 다르게 이야기합니다. 실제 경험과 다르게 지어서 이야기를 하려면 구체성이 떨어지고 추상적이고 모호하게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 일을 겪은 사람은 다릅니다. 사건이 일어난 장소, 분위기 등 구체적인 사항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법원이 누군가의 말을 진실로 판단할 때에는 그 논거로 “직접 겪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자세한 이야기”를 제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이고 자세한 진술이라고 해서 항상 진실성을 담보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독이 되는 경우도 있는데, A씨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A씨는 상주본을 훔친 장소와 시기, 판매한 과정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상주본의 앞표지 색깔, 앞부분과 뒷부분의 종이가 떨어져 있던 점까지 아주 세세한 내용까지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법원은 그게 오히려 의심스럽다고 봤습니다. A씨가 상주본을 훔쳤다고 한 시기는 1999년이고 상주본이 세상에 알려져서 화제가 된 건 2008년이니 약 10년이 지났는데도 너무 지나치게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겁니다. 특히 A씨의 주장에 따르면 A씨는 상주본의 가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해 다른 책들과 함께 아주 헐값에 팔아버렸고 그 이야기는 상주본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는 말인데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아주 자세히 기억한다는 게 이상하다고 판단했습니다. 판결문에 직접적으로 기재되지는 않았지만 법원은 A씨가 MBC에 보도된 내용을 보고 거짓말을 꾸며냈을 것이라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 외에도 배 씨가 상주본을 훔쳤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사정들도 다수 있었습니다. 

 조 씨의 주장에 따르면, 배 씨가 상주본을 훔쳐 간 건 2008년 7월 26일입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이틀 뒤인 2008년 7월 28일 배 씨는 안동 MBC에 취재요청을 했고, 실제로 안동 MBC는 2008년 7월 30일에 배 씨를 취재했습니다. 만약 상주본을 훔친 사람이라면 그게 들통날까 봐 쉬쉬하게 마련이므로 훔친 지 4일 만에 언론에 공개한다는 건 아무래도 이상해 보입니다.

 안동 MBC 보도 이후에 조 씨가 보인 반응도 이상합니다. 만약 물건을 도둑맞은 사람이라면 “당장 내 물건을 돌려달라.”고 요구하는 게 일반적인데, 조 씨는 배 씨에게 “상주본을 내가 팔아주겠으니 한 번 보여달라.”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법원은 배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상주본을 훔쳤다는 배 씨의 혐의에 대한 증거로는 조 씨와 A씨의 진술밖에 없는데, 그들의 말을 충분히 믿기가 어려우니 유죄의 증거가 없다고 보아 무죄 판결이 나왔습니다.  

   

<사족>

 배 씨가 형사소송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고 해서 문제가 모두 해결된 건 아닙니다. 법원 판결의 의미는 배 씨가 조 씨의 골동품점에서 상주본을 훔쳤다는 증거가 없다는 것이지, 상주본의 주인이 배 씨라는 걸 명확하게 확인해 준 건 아닙니다. 본문에서 자세하게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배 씨에 대한 형사소송이 있기 전에 배 씨와 조 씨의 민사소송이 진행되었는데, 민사소송에서는 상주본이 조 씨의 소유이니 배 씨는 조 씨에게 상주본을 돌려줘야 한다는 판결이 선고되기도 했습니다(엄밀히 따지면 민사소송의 결론과 형사소송의 결론이 다른 셈입니다). 

 상주본의 법적인 소유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가리는 일이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하지만 사회 공동체의 전체적인 관점에서 보면 법적인 소유권자를 따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가치가 매우 높은 문화재가 빛을 보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다는 사실일 겁니다. 모쪼록 바람직한 해결책이 모색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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