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옹고집전과 타블로 사건
○ 판소리계 소설, 옹고집전
오늘날의 뮤지컬과 비슷한 예술을 조선시대에서 찾는다면 아마 판소리가 그 주인공일 겁니다. 판소리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17세기 서남지방에서 굿판에서 무당이 읊조리는 노래를 새롭게 표현한 것에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판소리는 울의 고유한 전통문화로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었고, 2003년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바도 있습니다.
판소리는 문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판소리 사설의 영향을 받아 정착된 소설을 판소리계 소설이라 부릅니다.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은 현재도 창으로 불리고 있죠. 판소리에 근거하여 창작되었지만 창으로 불리지 않는 작품도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옹고집전>이라는 작품입니다. 옹고집전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옛날 옹진골 옹당촌이라는 마을에 옹고집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는데, 옹고집은 재물은 풍족하였으나 성질은 고약하기로 유명하였습니다. 어머니가 병들어서 누워 있는데 제대로 봉양도 하지 않자 어머니는 서운한 마음에 울면서 신세를 한탄합니다. 그러자 옹고집은 이제 살 만큼 살았으니 오래 살아봐야 아무 쓸데없다고 악담을 퍼붓습니다.
자신을 낳아준 부모에게도 이렇게 못되게 구는데 다른 사람에게 친절한 모습을 보일 리 없습니다. 옹고집이 특히 싫어한 사람은 스님입니다. 불교를 대놓고 무시할 뿐만 아니라, 스님을 보면 이유도 없이 붙잡아 폭행을 가했습니다.
옹고집의 행패가 점점 심해지자 취암사라는 절에 있던 도사가 나섭니다. 그 도사는 도력(道力)이 높을 뿐만 아니라 요술을 부릴 수도 있었는데, 심복에게 옹고집을 혼내주라고 말합니다. 도사의 명령을 받은 심복(스님)이 옹고집의 집을 찾아와서 시주를 요청하지만 옹고집은 단칼에 거절합니다. 스님에게 부모 은혜 배반하고 거짓공부나 하는 사람이라고 막말을 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하인을 시켜서 곤장을 30대나 때립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도사는 옹고집을 응징하기로 맘먹었습니다. 짚단으로 가짜 옹고집을 만들어 옹고집의 집으로 보낸 것이죠. 가짜 옹고집은 진짜 옹고집과 생김새, 말투, 옷, 행동까지 똑같아 누가 진짜인지 가리는 게 매우 어렵습니다. 옹고집의 아내, 며느리, 아들까지 나서지만 가짜 옹고집이 과거의 일까지 술술 읊자 더욱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결국 두 옹고집은 사또를 찾아갑니다. 사또가 호구조사를 시작하며 옹고집에 관한 세세한 사항을 물어보는데 진짜 옹고집은 버벅거리는 반면 가짜 옹고집은 막힘 없이 술술 대답합니다. 그러자 사또가 가짜 옹고집이 진짜라고 판정을 내리고 진짜 옹고집은 매를 맞고 쫓겨납니다.
가짜 옹고집은 진짜 옹고집에 가서 행복하게 살았지만, 진짜 옹고집은 신세가 매우 비참해졌습니다. 한순간 모든 걸 다 잃은 옹고집은 산속에 들어가서 홀로 힘겹게 지냈는데 이렇게 살아서 뭐 하냐는 절망감도 듭니다. 궁핍하고 힘든 환경에서 온갖 고생을 하고 있던 중 도사가 옹고집을 찾아옵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옹고집은 도사에게 자신의 죄를 반성하며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애원합니다. 도사는 옹고집을 혼낸 뒤 앞으로 착하게 살라고 말한 뒤 부적을 써줍니다. 옹고집이 집으로 돌아가자 가짜 옹고집은 다시 짚단으로 변합니다. 완전히 사람이 달라진 옹고집은 부모에게 효도할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에게도 덕을 베풀며 착하게 살았습니다.
많은 고전소설처럼 옹고집전도 권선징악을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주제는 사실 평범합니다. 옹고집전의 묘미는 가짜와 진짜가 대립하는데 가짜가 진짜를 이긴다는 점입니다.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인 셈입니다. 그런데 가짜가 진짜로 대우받고, 진짜는 가짜로 취급받는 일은 종종 일어납니다. 그룹 에픽하이의 타블로도 본인이 진짜라는 사실을 당연한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했던 사람 중의 한 명입니다.
○ 타블로의 진실
2003년 1집 앨범 “Map Of The Human Soul”로 데뷔한 에픽하이는 타블로(리더, 랩, 보컬), 미쓰라(랩, 보컬), 투컷(DJ)의 3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정규 1집이 대중의 큰 호응을 얻은 것은 아니지만, 다음 해 정규 2집이 발매된 후부터 조금씩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초기에 에픽하이라는 팀을 알리는 데에는 타블로(본명: 이선웅)의 역할이 컸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그의 학력에서 비롯된 면이 있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습니다.
타블로는 미국의 대학교에서 영문학과 창작문예학 전공 학사, 영문학과 석사 과정을 마친 인재였는데 타블로가 졸업한 학교는 명문대로 널리 알려진 스탠포드 대학이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손에 꼽는 우수 대학에서 학사와 석사를 3년 반만에 마치고 상까지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타블로는 ‘엄친아’ 이미지를 얻었습니다. 그 이미지가 타블로의 인기를 높이고 신인 그룹인 에픽하이를 알리는데 적잖은 역할을 했지만, 그로 인해 타블로가 겪은 고통은 매우 큽니다.
타블로의 비극은 일부 사람들이 그의 학력에 대해 의심을 품고 문제를 제기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급기야 2010년 '타블로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이하 '타진요')라는 온라인 모임을 만들어서 조직적인 활동까지 펼치는데, 한때 '타진요'는 회원이 20만 명에 달했습니다.
스탠포드를 졸업하게 맞다고 말하는 타블로, 거짓 학력으로 대중을 속인다고 주장하는 타진요! 누구의 말이 맞을까요? 타블로에게 끈질기게 소위 ‘진실’을 요구하던 일부(9명) 타진요 회원들에 대한 판결을 통해서, 타블로의 진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타진요는 타블로가 스탠포드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음에도 학력을 위조하여 마치 스탠포드를 졸업한 것처럼 행세한다고 주장하며 타블로를 비방하기 위해서 개설된 카페입니다. 타진요 회원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아래의 내용은 실제 사실이 아니라, 그들의 일방적 주장입니다).
“타블로의 학력은 모두 허위이고 사실 타블로는 스탠포드 대학에 입학한 적이 없다. 타블로가 제시한 성적증명서는 모두 위조한 것이고, 졸업 사진은 합성한 것이다.”
“타블로는 전문 브로커를 이용하여 실제 스탠포드를 졸업한 다른 사람의 이름을 도용한 것이다.”
“타블로의 가족은 돈을 벌기 위해 한국에서 10년간 학력, 경력을 속여 사기를 쳐 온 사기꾼 집단이다.”
“타블로는 1998년에 스탠포드에 입학했다고 주장하는데, 1998년부터 2002년까지 타블로는 아예 미국에 간 적이 없다.”
이 정도만 해도 타블로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하기 충분한 수준인데, 피고인들은 타블로와 그 가족들을 향해 “그 애비에 그 자식”, “돌대가리”, “과대망상환자”와 같이 원색적인 모욕까지 퍼부었습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 타블로는 명예훼손을 이유로 타진요 회원들 중 일부를 고소했습니다. 검찰은 타진요 회원들에 대해 조사를 실시하였는데, 그들이 범죄를 저질렀다고 판단해서 기소하였는데 이때 적용한 법률은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약칭: 정보통신망법)”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허위의 사실을 적시하여 다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하면 형법에 따라 5년 이하의 징역,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집니다. 하지만 인터넷과 같은 정보통신망을 이용하여 공공연하게 거짓의 사실을 드러내어 다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하면 7년 이하의 징역,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5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집니다. 오프라인 공간에서의 명예훼손 행위보다 온라인 공간에서의 명예훼손을 더 무겁게 처벌하는 것이죠. 그 이유는 온라인은 누구나 게시글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이 활동하는 공간이라 명예훼손 행위가 더욱 쉽게 전파되고 오랫동안 남아있어 피해자에게 끼치는 피해가 더 크기 때문입니다.
○ 법원의 판단: “타블로는 스탠포드를 졸업한 게 맞다.”
검찰의 기소로 재판을 받은 타진요 회원은 모두 9명(이하 “피고인들”)이었습니다. 법원은 이들 모두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습니다. 허위 사실이 아니라 진실한 사실을 말하는 경우에도 명예훼손죄가 성립할 수 있지만, 법원은 피고인들이 허위의 사실을 유포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법원이 인정한 사실관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타블로는 1988년 8월경 가족들과 함께 캐나다로 이민을 가서 1992년 11월 13일 캐나다 국적을 취득하였습니다. 1994년에 국내에 입국하여 잠시 학교를 다녔지만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1998년 9월 미국 스탠포드 대학에 입학하여 2001년 영문학 학사 학위를 취득한 뒤, 석사와 학사를 동시에 하는 coterminal 과정을 통해 2002년 영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법원이 타블로가 스탠포드를 졸업한 게 맞다고 인정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건 바로 증거들이 일관되게 그 사실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타블로가 스탠포드를 다녔는지를 제일 잘 아는 곳은 바로 스탠포드 대학인데, 스탠포드는 타블로의 졸업증명서 및 성적증명서를 직접 법원에 보내 타블로가 스탠포드를 졸업했다는 사실을 확인하여 주었습니다. 타블로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도용했다고 피고인들은 주장했지만, 스탠포드 대학이 보내 준 타블로의 입학서류에 따르면 입학서류에 기재된 생년월일, 가족들의 이름, 직업, 학력 등의 정보가 타블로의 정보와 일치하는 걸로 보아 도용 주장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타블로가 제시한 성적증명서는 스탠포드 대학의 공식적인 기록으로 확인되었으며 대검찰청 과학수사담당관 역시 졸업증명서, 성적증명서 등이 위조나 변조한 서류가 아니라는 걸 확인하였습니다. 이 외에도 NSC(미국 국립 학생정보 처리기관), ETS(미국 교육평가원)의 확인 결과도 타블로의 주장과 일치했습니다.
물적 증거뿐만 아니라 인적 증거도 있었습니다. 스탠포드 대학의 교무과장, 타블로 지도교수, 스탠포드 동문들도 하나같이 타블로가 스탠포드에서 공부한 게 맞다고 말했습니다.
타블로는 자신이 스탠포드 대학을 졸업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을 충분히 제시했지만, 피고인들은 숱한 증거들은 외면하고 본인들의 주장만 고집했습니다. 타블로가 성적증명서를 증거로 제시하면 과목명칭이 이상하다고 트집을 잡는 식이었죠. 다시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하면 구체적이고 정확한 근거도 없이 “모든 자료가 위조되어 믿을 수 없다”며 타블로에 대한 비방을 계속하였습니다.
즉 타블로는 스탠포드 대학을 정상적으로 졸업한 게 맞는데도 피고인들이 인터넷이라는 정보통신망을 이용하여 악의적으로 거짓 사실을 주장하며 타블로의 명예를 훼손하였기에 정보통신망법에 따라 처벌받게 된 겁니다.
○ 처벌 수위의 결정
법원이 피고인들의 행동이 범죄에 해당하여 유죄라는 판단을 내렸으니 다음으로는 처벌 수위를 정해야 합니다.
피고인들은 처벌 수위를 낮추기 위해 타블로가 공인이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공인에 대해서는 표현의 자유가 폭넓게 보장되어야 하니 자신들에게 과도한 처벌을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었죠. 이 주장에는 나름의 법적인 근거가 있습니다.
우리 법원은 어떤 표현이 명예훼손이 되는지를 판가름할 때 표현의 대상이 공인인지의 여부를 중요하게 고려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견제와 균형을 바탕으로 한 정치 체제입니다. 권력의 독주를 감시하려면 표현의 자유가 당연히 보장되어야 하고 특히 시민들은 공적 영역에 대해서는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유력 정치인, 고위 관료와 같은 공인은 늘 관심을 받고 잘못된 행동을 하면 날카로운 비판도 가합니다.
연예인이 공인(公人)에 해당하는지는 다소 의문이 있지만, 대중의 관심을 받으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공인과 비슷한 면이 있는 건 사실이니다. 하지만 아무리 공인이라고 하더라도 모든 자유를 빼앗기는 건 아닙니다. 공인에 대한 비판이 폭넓게 허용되는 건 그 공인이 사회와 국가의 공적인 일에 연관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공인이라고 하더라도 공적인 일과 무관한 개인적인 일에 대해서는 보호를 받아야 하는 겁니다.
법원은 타블로의 학력이 공적인 영역은 아니라고 봤습니다. 타블로는 직업이 가수이지 교수는 아니고, 스탠포드라는 학력이 가수를 하는데 필수요소도 아닙니다. 타블로의 학력은 공적 영역이라기보다는 사적 영역에 속하는 것인데, 피고인들은 명확한 근거도 없이 학력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며 아주 집요하고 악의적인 공격을 가했습니다. 즉, 공인이라서 괜찮다는 피고인들의 주장은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악플을 달아 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을 받으면 대체로 벌금형이 선고되고 설령 징역형이 선고되더라도 집행유예가 붙어 실제로 교도소에 수감되는 일은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는 일부 피고인들에게는 실형이 선고되었습니다. 범행의 동기가 불순하고 잘못된 범행이 여러 차례 반복되었으며 공격의 정도도 너무 심했기 때문입니다. 타블로와 그 가족들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밝히는데도 피고인들은 타블로에게 거짓말쟁이라는 누명을 씌운 채 공격을 가해 타블로의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가 무시되었습니다. 또한 타블로의 아버지는 사건이 한창 진행되던 중에 사망하였는데 이 사건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사망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사족>
옹고집전에서 진짜 옹고집은 가짜 옹고집에게 패해서 온갖 고생을 하는데, 평소 옹고집의 행실을 보면 이 고생은 옹고집이 자초한 면이 큽니다. 하지만 보통의 사람들은 자신이 진짜라는 사실을 구태여 증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간혹 의혹이 생겨 해명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합리적인 수준으로 증거를 제시하면 됩니다.
하지만 아무리 말을 하고 근거를 대도 절대 믿지 않겠다고 버티면 방법이 없습니다. 믿고 싶은 대로 믿고, 믿고 있는 것이 진실이라 단정하는 맹목(盲目) 앞에서는 어떠한 증거도 소용이 없죠.
피고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생각이 ‘진실’이라는 확신에 찬 나머지 객관적인 증거들에는 눈을 돌리고 보고 싶은 대로만 세상을 보았습니다. 법원 판결문의 일부를 인용하겠습니다.
“내가 나의 학력이나 경력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일견 매우 쉬운 것으로 생각되나, 누군가가 내가 내어 놓은 모든 증거들을 일방적으로 모두 믿을 수 없다고 한다면, 결국 어떤 증거를 보여도 믿게 할 수 없고, 위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내가 나임을 증명하기조차 불가능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