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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도스로 Oct 27. 2020

범죄: 증거가 있어야 처벌할 수 있다

- 조선시대 재판과 듀스 김성재 사건

○ 조선시대의 형사 재판

 ‘척(隻)지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 원한을 품어 반목하게 되다.”라는 뜻인데, 이 말은 소송과 연관이 있습니다. 소송을 제기한 사람을 원고, 소송을 제기 당한 사람을 피고라고 하는데, 조선시대에는 피고를 ‘척(隻)’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소송을 하다보면 상대방에 대한 원망이 쌓이고 사이가 멀어지게 되니 이런 표현이 생긴 모양입니다.

 ‘척지다’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조선시대에도 재판제도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조선의 재판제도는 오늘날의 재판제도와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큰 틀에서는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1차적으로 재판을 담당한 사람은 각 고을의 수령입니다. 수령은 대도호부사, 목사, 군호부사, 유수, 군수, 현령, 현감 등의 지방관을 총칭하는데 속칭 ‘원님’이라고도 불립니다.

 수령이 판결을 내렸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나는 건 아니고 오늘날의 상소 제도와 비슷한 절차가 있었습니다. 수령의 재판에서 패소하면 관찰사에게 재판을 다시 해달라고 요청할 수 있었는데, 이걸 의송(議送)이라고 합니다. 수령과 관찰사는 지방의 관리인데, 이들이 재판에서 패하면 중앙정부의 사법기관에 구제를 청구할 수 있습니다. 중앙정부의 사법기관으로는 의금부, 형조, 사헌부, 한성부 등이 있는데, 죄와 형벌에 관한 형사사건은 주로 형조(刑曹)에서 맡아서 처리했습니다.

 조선시대의 형벌은 태형, 장형, 도형, 유형, 사형이 있었는데, 태형과 장형은 몽둥이로 때리는 것이고, 도형은 군역이나 노역을 하게 하는 것이며 유형은 귀향을 보내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가장 무거운 형벌은 사형인데,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다룰 때에는 임금까지 관여하였습니다. 제22대 왕인 정조는 재판 업무를 열심히 챙겼을 뿐만 판결문을 정리한 책 <심리록>까지 편찬한 바 있습니다. 정조 시대에 있었던 사건을 통해 조선시대의 형사제도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1780년 황해도의 한 마을에서 윤여인이라 불리는 사람이 사망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처음에는 단순 사망사고라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마을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합니다. 소문의 내용은 윤여인이 자연사한 게 아니라 살해당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범인으로 지목된 사람은 윤여인의 남편 조재항이었습니다. 윤여인은 친척 이가원이 조재항을 범인으로 고발하면서 본격적인 수사가 벌어집니다. 그 지방의 수령은 윤여인의 시체를 꺼내 검시를 벌이는데, 검시를 맡은 검시관은 “다른 외상은 없지만 등살이 뼈에 붙어 떨어지지 않은 걸로 보아 윤여인이 타박상을 입었던 것 같다”라는 의견을 냅니다.

 당시 마을에 퍼진 농요(農謠)도 조재항에게는 불리한 요소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부른 “나는 밥 한 사발 때문에 남편에게 맞아 죽었네.”라는 노래는 조재항이 진범이라는 의심을 가중시켰습니다. 하지만 조재항은 “부인은 병에 걸려 죽은 것”이라며 결백을 호소했습니다.

 윤여인 사건은 3년이 지나도록 결론이 나지 않았고, 결국 정조까지 나섭니다. 정조는 윤여인에 대한 수사가 부실하다고 지적합니다. 타박상에 있다는 검시 결과만으로 남편을 범인으로 단정지을 수는 없고 농요는 대체로 은유적인데 윤여인에 관한 농요의 가사가 너무 직설적인 게 이상하다는 것이죠.

 정조의 명령에 따라 다시 철저하게 조사가 벌어집니다. 조사 결과 조재항은 무죄로 밝혀집니다. 이가원이 조재항에게서 돈을 뜯어내기 위해 농요를 퍼트린 게 드러나서 이가원은 결국 유배를 가게 되죠.      

 살인 사건이 발생하면 먼저 피해자의 주변사람을 살피게 됩니다. 주된 목적은 피해자가 평소에 어떻게 생활을 했고 혹시 원한을 가질 만한 사람이 없었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지만 다른 목적도 있습니다. 혹시 가까운 사람이 범인일 수도 있으니 그들도 용의선상에 오르는 것이죠. 피해자와 평소에도 같이 있는 시간이 많고 사망 무렵까지 함께 있었다면 의심의 정도가 더 강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피해자의 주변에 있었다고 해서 혹은 의심스러운 사정이 있다고 해서 진범으로 몰아 무작정 처벌할 수는 없습니다. 범인이라는 증거가 있어야 처벌이 가능합니다.

 윤여인의 사망 사건에서 남편이 범인으로 지목되었듯이, 유명 가수의 사망 사건에서는 그의 여자 친구가 범인으로 지목되었습니다. 그녀는 왜 의심을 받았고 법원은 어떤 판단을 내렸는지 알아보겠습니다.    

 

○ 1995년 11월 19일 어느 밤

 김성재, 이현도로 구성된 그룹 듀스는 1990년대 초중반을 대표하는 댄스 그룹입니다. 1990년대 대중음악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을 빼놓고 말하기는 어려운데, 듀스도 상당한 인기와 영향력을 가진 인기가수였습니다. “나를 돌아봐”, “여름 안에서” 등 히트곡도 매우 많았죠.         



 한편, 듀스 멤버 중 한 명인 김성재는 비극적인 죽음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그는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죽음을 둘러싼 논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를 죽인 것으로 의심을 받은 사람은 그의 전 여자친구 A입니다.

 먼저 김성재가 사망하던 날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보겠습니다.

 1995. 11. 19. 김성재는 SBS "생방송 TV 가요 20"이란 프로그램에 출연한 뒤 저녁에 숙소인 호텔방으로 돌아왔습니다. 호텔방에는 A와 김성재, 매니저 등 포함해서 총 9명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거실에 모여 비디오테이프를 재생하여 보다가 한 명씩 잠을 자러 갔고, 거실에는 A와 김성재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다음날이 되었습니다. 새벽 6시쯤 방에서 나온 매니저는 김성재가 혼자 거실 소파에 엎드린 채로 누워 있는 것을 발견하고 흔들어 깨웠습니다. 하지만 김성재는 일어나지 않았죠. 놀란 매니저가 김성재를 병원으로 급하게 후송했지만 매니저가 발견한 당시에 김성재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습니다.

 당대 최고의 인기가수였던 김성재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수사 당국은 사망원인을 밝히기 위해 노력합니다. 김성재의 오른쪽 팔에서는 28군데의 주사바늘 자국이 발견되었고, 신체 내부에서는 ‘틸레타민’과 ‘졸라제팜’이라는 약물이 검출되었습니다.

 한편 A는 김성재가 사망하기 전에 평소 자주 찾아가던 동물병원에서 ‘졸레틸 50’과 ‘황산마그네슘’을 구입하였는데 졸레틸 50은 틸레타민과 졸레제팜이 혼합된 약품입니다. A가 구입한 약품과 김성재의 체내 발견된 성분이 연관성이 있는 겁니다.

 그리고 A는 김성재가 사망한 뒤, 동물병원 주인에게 연락하여 만나자고 한 뒤, “내가 약품을 구입한 사람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이게 사건 전후의 기본적인 사실관계입니다. 이 정도의 정보를 가지고 보면 누가 범인인 것 같나요? 김성재가 사망하기 전에 같이 있었고, 약물을 구입한 여자친구인 A가 범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검찰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 검찰의 주장: “범인은 A이다.” 

 검찰은 김성재를 살해한 게 A라고 판단하여 A를 살인 혐의로 기소했는데, 검찰의 주장을 조금 더 상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아래의 내용은 실제의 사실이 아니라 검찰의 주장인 점의 강조 드립니다). 

 A는 치과대학 본과 3학년에 재학 중일 때 김성재를 만나서 연인관계로 발전하였습니다. 평소 소유욕과 집착이 강한 A는 혼자서만 김성재를 차지하려고 했고, 김성재의 가수 활동도 싫어하였습니다. A의 간섭이 점점 심해지자 김성재는 불만을 터트렸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김성재의 불만을 수용하고 합의점을 찾으려했겠지만 A는 달랐습니다. 더욱 과감하게 행동하는데, 심지어는 김성재에게 가스총을 쏘고 잠든 김성재의 몸을 끈이나 테이프로 묶기까지 합니다.

 도저히 관계를 이어갈 수 없다고 생각한 김성재는 A와 헤어지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하지만 A는 “곧 일본에 유학을 갈 예정이니 그때까지만 만나 달라”고 말하며 계속 매달렸죠. 곧 헤어지겠다는 식으로 말을 하긴 했지만 A의 본심을 달랐고, 김성재와의 관계가 회복될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김성재는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편으로는 김성재에 대한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김성재를 영구히 소유하겠다는 욕심에 가득 찼던 A는 차라리 그를 살해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방법은 약물을 투입하는 것입니다. 치과대학을 다녔으니 주사와 약물은 A에게 익숙한 도구였습니다. 미리 동물병원에서 졸레틸 50과 황산마그네슘을 구입해서 가지고 있던 A는 마침내 기회를 잡았고 그날이 바로 1999. 11. 19.입니다. 먼저 졸레틸 50을 피로회복제라고 속여서 김성재에게 주사하여 김성재를 마취시킨 뒤, 동물안락사용으로 사용되는 독극물인 황산마그네슘을 투입하여 살해한 것입니다.      


○ 법원의 판단: “범인이 A가 아닐 수도 있다.” 

 A에 대한 판결은 심급별로 달랐습니다. 먼저 1심 법원은 검찰의 주장대로 A가 범인이라고 보아 A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하였습니다. 하지만 2심 법원은 A에게 무죄를 선고했고, 3심인 대법원도 2심 법원의 판단이 맞다고 판단하여 A는 무죄가 확정되었습니다. 왜 법원이 A에게 무죄를 선고한 걸까요?

 법원은 먼저 살해동기부터 검찰과 생각이 달랐습니다. 검찰은 김성재는 헤어지려고 하는데, A가 억지로 매달리는 상황으로 봤지만 법원은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있기는 했지만 그렇게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던 것 같다고 판단했습니다. 그 근거로 김성재의 어머니가 김성재가 미국으로 간 사이에 A를 불러 밥을 사준 사실이 있고, 김성재가 미국에 있을 때 두 사람이 수십 차례 통화를 하였고 가장 길게 통화한 시간은 1시간 14분이 넘고 김성재가 미국에서 돌아온 뒤 거의 매일 A를 만난걸 보면 두 사람이 계속 연인 관계를 유지해 왔다고 본 겁니다. 

 A가 구입한 약물에 대해서도 검찰과 법원의 판단이 달랐습니다. 법원도 A가 ‘황산마그네슘’과 ‘졸레틸 50’을 구입한 사실 자체는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A가 구입한 황산마그네슘의 양은 3.5g이었는데, 이 정도 양으로는 한꺼번에 정맥투여하지 않는 이상 인체에 해를 끼치지 않는데 A가 구입한 3cc 주사기로는 황산마그네슘을 한꺼번에 정맥투여하기는 어렵다고 봤습니다. ‘졸레틸 50’도 마찬가지입니다. ‘졸레틸 50’ 1병은 사람에게 충분한 마취효과를 낼 수는 있지만 사람을 죽이기에 충분한 양은 아니라는 겁니다.

 A의 행동 중 가장 의심스러운 부분은 약물을 구입한 동물병원 주인에게 “약 구매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고 부탁한 대목입니다. ‘도둑이 제 발 저린 격’이라고 볼 수 있는 상황이죠. 법원도 이 부분을 매우 의심스럽게 본 건 사실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이것만으로 A를 범인으로 단정할 수 없다는 게 법원의 결론입니다. A의 해명은 이렇습니다.

 “사건 발생 무렵 김성재의 마약상습투약으로 인한 사망설이 돌고 여기에 제가 연루되었다는 이야기도 많이 나오는 상황이었어요. 제가 구입한 약물은 환각작용이 있는데, 그 약물을 사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더욱 곤란해질까 봐 두려웠어요. 그래서 동물병원 주인을 찾아가서 부탁을 한 것인지 제가 범인이어서 그랬던 건 결코 아닙니다.” 

 법원은 A의 해명이 사실일 가능성이 있다고 봤고, 이외에도 여러 증거들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A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무죄가 선고된 건 사실이지만, A가 범인이 절대 아니라고 법원이 확인을 해 준 건 아닙니다.

 형사재판에서 피고인에게 유죄를 선고하려면 피고인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검찰이 증명해야 합니다. 만약 검찰이 입증을 못하면 무죄가 선고되는 것이죠. 그럼 어느 정도로 증명을 해야 할까요? 법원은 ‘합리적 의심’이라는 잣대를 사용합니다. 

 “피고인이 범인이 아닐 수도 있을 것 같다.”라는 의심이 들고 그 의심이 일반적인 상식이나 과학 법칙 등에 근거했을 때 합리적이라고 볼 수 있다면 검찰이 증명을 제대로 못한 겁니다. ‘합리적 의심’의 원칙에 따르면 범인인지 좀 의심스럽긴 하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무죄가 선고됩니다. 이걸 ‘의심스러울 때에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고 표현하기도 하죠.

 유죄 선고를 하기 위한 증명의 정도를 숫자로 표현하는 건 상당히 힘든 일이지만 대략적으로는 법관이 80~90%의 확신이 들 정도로 증명을 해야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엄격한 증명을 요구하면서 범인일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풀어주는 건 문제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런 지적도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의심이 든다는 이유로 사람을 처벌했을 때의 폐단도 생각해야 합니다.

 형사 처벌은 한 사람의 인생에 엄청난 영향을 미칩니다. 교도소에 갇혀 마음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상태로 지내다보면 신체의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지를 절절하게 깨닫게 됩니다. 꼭 징역형의 처벌이 아니더라도 처벌 자체가 주는 위압감은 상당하고 전과자라는 낙인은 매우 고통스럽습니다.

 이처럼 형사 처벌이 가지는 무게감을 생각하면 합리적 의심을 요구하면서 증명이 충분히 된 사람만 처벌하는 게 차선책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사족>

 듀스 김성재 사망 사건의 진실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범인으로 의심받던 A에게 무죄가 선고되었고 그 판결은 확정되었으니 법적으로는 종결된 사건입니다. 법원은 A가 진범이라는 증명이 부족하다고 판단해서 무죄 판결을 내렸고 A가 이 사건으로 처벌을 받을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무죄 판결이 A가 절대 범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100% 담보하는 건 아닙니다.

 듀스의 “우리는”이라는 노래에는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이 노래에 빗대 이 사건을 보면, ‘범인은 누군가, 또 범인은 어디있나’라고 물어야 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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