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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순 May 24. 2019

[연수편_2]인생의 신호등

굴러가 어쨌든






사막의 흔한 멈춤 신호





“자 이제 출발해.”

“네??????”

“출발하라고.”



대망의 연수 첫 날이 밝았다. 집 앞에 나가보니 늙고 고되어 보이는 흰색 SUV 한 대가 시동을 끈 채 서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희끗한 머리의 연수 선생님이 이미 조수석에 앉아있다.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자마자 그가 반말과 존댓말을 8대 2정도의 비율로 섞어가며 노련하게 설명을 시작한다.



“좋아요 집순씨. 운전을 하기로 생각한 건 아주 잘 한 일이야. 운전은 힐링이에요.”

“아, 예… 힐링…”



내 대답을 듣는 둥 마는 둥 그는 말을 이어간다. “자, 한 번만 설명할 테니까 잘 들어. 이게 뭐야. 속도계지? 이건 볼 필요 없어요. 연수생들이 하도 속도계만 들여다봐서 내가 선을 끊어버렸으니까. (네? 뭐라구요?) 그리고 이건 연료계, 이건 엑셀, 저건…”



이것저것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설명을 한 지 한 오분쯤 지났을까, 그가 숨쉬듯 아무렇지도 않게 나에게 출발을 지시했다. “자, 이제 출발하세요.” 놀란 내 입에서는 에...어... 같은 외마디만 나올 뿐이었다. "아 어서 출발하라고!" 그의 호통과 심드렁한 표정에 순간 현실감이 사라진 나는 브레이크를 놓고 엑셀에 발을 가져다 댔다. 차가 슬슬 움직이며 집 앞 골목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여기서 5초면 차가 다니는 진짜 도로인데, 선생님은 멈추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자 좌회전 신호 켜고. 도로 진입해.”



토요일 아침이라 도로는 한산했다. 하지만 나는 어찌나 긴장을 했는지 어깨가 솟다 못해 귀에 닿을 지경이었다. 이대로 두 시간을 꼼짝없이 운전석에 앉아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한 겨울인데도 도로에 아지랑이가 피어 오르듯 아득해 보였다. 그러나 일단 도로로 나온 이상 길바닥 한 가운데에 멈춰있을 수는 없는 일. 나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나야 혈혈단신 1인가구라지만 선생님은 한 가정의 가장이야. 나는 선생님과 한 가정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돼.'



선생님은 이런 내 속도 모르고 자기가 한평생 가르친 여자 운전자가 삼천 명은 된다는 둥 그 분들을 다 동원하면 선거에서 무조건 당선이라는 둥 헛소리를 시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패닉 속에서 차를 몰기를 삼십분쯤 지났을까 선생님이 어느 아파트 단지 주차장에 차를 세우도록 했다. 핸들에 고개를 처박고 있는 나를 두고 혼자서 휘적휘적 어딘가로 향한 그는, 믿을 수 없겠지만, 로또를 사왔다. 이 선생님, 믿어도 되는걸까?



로또를 소중히 주머니에 담은 선생님을 태우고, 연수가 재개됐다. 그나마 위로가 된 것은, 그거 한 박자 쉬었다고, 처음 시동을 걸 때와는 조금 다른 여유가 감돌았다는 사실이다. 그제서야 차창 밖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서울에 10년 넘게 살았는데도 차 앞 유리를 통해 보는 도로 풍경은 낯설기 그지없었다. 걸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듯이, 운전을 해야만 보이는 것들도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도로 위를 달리는 각양각색의 차들은 4색 신호등에 맞춰 가고 서기를 반복했다. 얼굴도 보이지 않고, 말소리도 들리지 않는 운전자들이 고작 네 개에 불과한 신호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신기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저렇게 선명한 4색 신호등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인간관계에는 빨간색과 초록색, 초록색과 노란색 사이에 너무도 많은 채도와 명도의 색이 있어서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 없을 때가 많으니까.



이런 생각에 잠겨있는데 뒤에서 ‘빵!’하고 엄청나게 큰 경적소리가 들렸다. 덤프트럭이었다. 내가 진로 방해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의자에서 튀어 오를 정도로 내가 당황하자 선생님이 베테랑 연수선생의 태세를 갖추고 침착하게 옆 차선으로 물러서라고 지시를 내렸다. 가까스로 상황을 모면하고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저 혼자서 운전할 때 아까처럼 뒤에서 빵빵거리면 어떡해요? 패닉에 빠져서 도로에 멈춰 서버릴 것 같아요.”

선생님은 그날 본 것 중 가장 어른스럽고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점잖게 나무랐다.

“그런 바보 같은 소리가 어딨어. 대답해봐 집순씨. 이 도로에서 나를 가게하고 서게 하는 건 단 하나야. 그게 뭐야?”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꾸짖는 것 같았지만 그의 목소리엔 격려가 담겨있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너의 길을 가라는 응원이 옅게나마 묻어있었다. 솔직히 나는 그때, 이 선생님에게 조금 감동하고 말았다. 맞다. 이 도로에서, 아니 내 인생에서 나를 가게하고 서게 할 수 있는 건 오직 나 하나 뿐이다. 내가 느끼고 판단한 것. 그걸 믿으면 되는 거다. 집순아, 지금까지 남의 신호만 보고 따라 오느라 힘들었지? 이젠 그러지마. 그럴 필요 없어! 역시 이 선생님 내공이 장난 아니신 분이었어. 선생님, 아니 스승님!



눈가가 조금 붉어진 채로, 나는 그의 질문에 답했다.



“저 자신이요. 이 도로에서 나를 가게하고 서게 하는 유일한 존재.”



내 대답에 그도 조금 먹먹해진 것일까? 선생님은 앞 유리창을 응시한 채 말이 없었다. 그렇게 몇 초의 침묵이 흐르고 그가 답했다.



“뭔… 소리야. 신호등이지.”


이전 02화 [연수편_1]차 없이 운전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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