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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왓에버 Sep 26. 2024

다섯 시에 일어나서 아홉 시에 퇴근했다

5 O'clock in the morning

왜 모든 일은 항상 몰아서 오는 것일까? 요즘 갑자기 몰려온 작업의뢰들 처리하느라 매우 수면부족이다. 어젯밤에도 겨우 세 시간밖에 잠들지 못했다. 오늘은 유미와 함께 회송서라 불리는 그놈의 병원이동허가증 쪼가리 받으러 서울에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벽 정각 5시에 기상했다. 고맙게도 아내는 한국어 수업 참여를 포기하고 나와 동행하겠다고 했다. 환자인 주제에 힘은 세고 행동은 건강한 내 딸을 안고 나 혼자서 모든 것을 처리할 자신이 없었다. 특히나 병원에 가야 할 상황이면 더 그렇다. 이젠 정말 병원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로 외래진료는 상상만 해도 기운이 쫙 빠지는 일이다. 방문해야 할 시간이 9시 반이면 더더욱 그렇다. 때문에 러시아워는 피하고 싶어서 5시에 일어났다. 차라리 일찍 나가서 아침 공기를 마시자는 생각으로 말이다.


그런데 문을 나서자마자 불안했다. 생각해 보니 병원에서 예약확인 문자를 보내주지 않았다. 이거 헛걸음하는 것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앱을 통해 확인해 보니 다행히 예약은 제대로 되어 있었다. 그렇게 안도의 한숨을 쉬는 찰나에 아내가 사고를 쳤다. 횡단보도를 건너려는데 신호가 거의 끝나가기에 아내에게 멈추라고 했다. 그런데 아내는 내 말을 무시하고 그냥 건너려고 했다. 유미가 타고 있는 유모차를 끌면서 말이다. 그것 때문에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버렸다. 그렇게 시작된 하루였다.


당장은 화를 삭인 뒤, 어쨌든 계획한 대로 일찍 움직였기에 우리는 붐비는 출근시간은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사히 병원에 도착해 접수까지 마쳤다. 이때까진 좋았다. 그런데 진료실을 들어가는 순간부터 모든 불쾌함이 시작되었다. 


 "아이 상태 좀 볼까요?"


 "네, 지금은 혹이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아 네 좋네요. 초음파 한번 더 찍어봅시다."


응? 초음파? 난 병원 옮기기 위해 서류받으러 온 사람인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리고 우리가 찍기로 한 것은 MRI였는데 갑자기 뭔 또 초음파? 자기가 MRI 찍자고 해놓고? 정말로 단 한 번의 예외 없이 이런 식으로 언제나 방문인을 당황하게 만드는 의사다. 방문 목적과 전후관계 등 모든 걸 다 다시 설명할까 했지만 진짜 너무 짜증 나고 귀찮았다. 그래서


 "병원 옮기려고요."


 "네, 가실 때 수납하고 서류받아 가세요."


진짜 이렇게 두 줄로 대화를 끝내고 나왔다. 이 사람에게 내 딸을 맡기지 않기로 한 것은 매우 잘한 결정이라는 뿌듯함을 느끼면서 말이다. 그리고 괘씸했다. 처음에 유미의 혹이 줄었다고 말했을 때 그녀는 본인의 진료 덕분이라는 듯이 행동하고 있는 것처럼 느꼈기 때문이다. 글쎄... 이건 내가 너무 안 좋게 본 것일 수도 있지만 Whatever. 유미의 혹을 처음 발견했을 때도 그렇고, 잇몸에 좁쌀 같은 것들을 발견했을 때도 그렇고, 장난치다 눈 위가 찢어져 응급실을 갔을 때도 그렇고, 그리고 혹이 재발한 지금의 경우에도 그렇고... 우린 단 한 번도 병원의 덕을 본 적이 없다. 병원에 방문하면 받게 되는 것은 약이나 위로보단 다른 병원 가라는 의뢰서가 훨씬 많았다. 그래서 괘씸했다. 하지만 어쨌든 방문목적은 달성했으니 바로 집에 갈 생각이었으나 오산이었다.


진료실을 나온 뒤 회송서와 의무기록사본을 받아가는 과정에 복병이 숨어있었다. 바로 가족관계증명서였다. 이건 의무기록사본을 받아갈 때 제출하는 서류인데 난 신분증만 가져오면 된다고 안내받았었다. 이 병원은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아주 끝까지 똥을 뿌리네. 아까 힘들게 삭혔던 화가 다시 폭발하기 직전까지 차 올랐었다. 어차피 온라인으로 발급받아 출력하면 되는 일이긴 하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정보를 왜 아무도 내게 말을 안 해주는 거지? 예약 잡을 때 병원 옮기려고 한다고 방문목적 얘기 했잖아? 그러니깐 서류는 와서 받아가라며? 그런데 뭐야 이 상황은? 장난하나 진짜.


마침 노트북을 가지고 나왔었기에 정부 24에 접속해 바로 발급받아 출력을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이놈의 병원은 프린트 시스템도 거지 같았다. 모바일 팩스앱을 이용해 지정된 번호로 팩스를 보내야 내가 필요한 서류를 얻을 수 있었다. 정말 웃기지 않은가? 병원까지 직접 방문해서 병원에 팩스를 보내고 있는 내 모습. 그 팩스를 보내는 과정에서 모바일 팩스앱의 짜증 나는 계정탈퇴 시스템까지 얘기하면 얘기는 엄청나게 길어진다. 설상가상으로, 각 창구에 안내를 담당한다는 분들은 어떻게든 최대한 비협조적으로 응대한다. 의무기록사본을 받으러 갔더니 얼굴은 책상 쪽으로 향하며 나보고 번호표 뽑고 오란다. 이봐, 번호표 뽑아서 왔잖아. 좀 보고 얘기를 해. 어린이병원이라더니 어린이들이 응대를 해서 어린이병원인가?


그러고 집에 돌아오니 약 오후 1시 즈음되었고, 그제야 오늘의 내 업무를 시작할 수 있었다. 클라이언트는 내일까지 보내주면 된다고 했으니 오늘은 그냥 쉬고 내일까지 어떻게든 보내주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도 금요일 저녁에 업무연락받는 것은 매우 짜증 나니까 말이다. 프리랜서로 살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싫은 부분이다. 또한, 다른 의뢰도 많이 쌓인 상태다. 한동안은 일이 없어 걱정이었는데 지금은 일이 많아서 걱정하고 있다. 유미가 건강할 땐 일이 없었는데 유미가 아프니까 일이 많다. 왜 항상 이런 것일까 싶지만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하는 것이 프리랜서의 숙명이 이기에... 아무리 싫어도 병원을 안 갈 수는 없기에... 기회가 있을 때 벌어야 한다. 그렇게 꾸역꾸역 어떻게든 해야 할 일을 마무리 짓고 메일 예약전송 버튼을 클릭하고 나니 정각 9시였다. 오늘은 아침 5시에 일어나서 밤 9시에 퇴근했다. 응? 5 to 9? 왠지 익숙하다. 


아 맞다. 우리 아빠가 저렇게 살았었다. 주 6일을 일하던 시절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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