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어느 문헌 에도 호흡과 연하기능에 관하여 응급이 아닌 한 치료를 서두르도록 권고하고 있지는 않아 치료 시작 전 철저한 병변에 대한 검토와 평가가 필요하며...
이 문장이 모든 계획을 바꾸어버렸다. 난 어제 느닷없이 예약된 유미의 MRI 촬영을 취소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유미의 혹이 다시 많이 줄어들었다.
두 번째, 지금 다니는 병원은 멀고 믿을 수가 없다.
세 번째, 그래서 서두르고 싶지 않다.
세 번째의 이유가 가장 컸다. 서두르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이 상황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인정해야 한다. 유미의 혹은 단기간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머릿속 깊숙이 박아두어야 한다. 이곳에서는 서두를수록 빨라지는 것은 부모의 마음이 부패되는 속도 아닌가 싶어서 말이다. 내 딸의 목에 혹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난 그동안 너무 서둘러왔다. 첫아이를 얻은 기쁨에 누군가 똥을 뿌린 것 같은 이 더러운 기분이 무척이나 싫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시라도 빨리 씻고 싶었다. 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최근 유미의 혹은 정말로 많이 줄어들었다. 재발하기 전과 같이 내가 먼저 말하지 않으면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줄었다. 참 다행이다. 내 딸의 예쁜 얼굴을 다시 즐길 수 있으니까 말이다. 턱 부근 한쪽이 부풀어 올라있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너무나도 심장을 조여 오는 일이다. 풍선을 크게 불 때 느끼는 그 긴장을 극한으로 느낄 수 있는 상황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이것도 부족한 비유가 아닌가 싶다. 그러니 지금 또다시 줄어든 것은 내게 엄청난 안도감을 준다. 아이의 (다발성이지만) 혹 하나가 지금 내 인생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나는 지금 엄청난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다.
"수술하는 방법이 있고 주사하는 방법이 있는데 어떻게 하실래요?"
유미의 초음파 재촬영 결과를 들으러 갔을 때 의사가 내게 했던 첫 질문이다. 솔직히 놀랐다. 놀랐다는 표현이 맞을까? 당황스러웠다고 해야 하나? 당시엔 못 느꼈지만 지금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면 굉장히 불쾌한 질문이었다. 난 그걸 가이드해 줄 전문가가 필요해서 찾아온 것이니 말이다. 그녀는 마치 내가 당장 대답을 해야 한다는 듯이 물어보아서 적잖이 놀랐었다. 그래서 누가 생각해도 수술보다는 더 조심스러운 경화주사요법을 선택했었다. 진료인의 요청은 세월에 네월아 하면서 이런 대답은 왜 당장 해주길 원하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난 이 병원을 믿을 수가 없다. 애초에 첫날부터 처방전을 잊은 것부터 괘씸했으니 말이다. 내가 왜 굳이 먼 병원을 오가며 이런 취급을 받고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나? 그래서 모든 예약을 취소했다. 어차피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라면 집에서 가까운 곳에서 받는 것에 백배 천배 나은 선택일 테니까 말이다. 병원 이름의 유명세가 내 딸에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대기시간만 더 길게 느끼고 진료시간의 압박감은 수배는 더 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전원을 위한 진료의뢰서를 요청했다.
"직접 방문하셔야 하고 환자분도 동행하셔야 해요."
예상된 결과였다. 난 아직도 이해가 안 간다. 지난번의 처방전처럼 의사-약사 간의 문서 팩스전송은 가능하면서 왜 의사-환자 간에는 그것이 불가능한 것일까? 내 아이가 아직 돌도 안 지났다는 것을 알면서 굳이 출근 러시아워를 견디고 데리고 오란다. 그래야 원하는 것을 가져갈 수 있다고 한다. 거지 같아도 당장 옮기고 싶으니 군소리 없이 따르기로 했다. 그래서 내일 새벽부터 아이를 데리고 서울행을 해야 한다. 고작 종이 한 장 가지러 말이다.
사실 옮기고자 하는 병원에도 큰 기대는 없다. 그저 시간과 감정의 낭비를 줄이고 싶은 것뿐이다. 유미의 문제를 당장 지워버릴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렸다. 서울아산병원의 자료에 따르면
"수술적 치료 후의 재발률은 매우 높아 75%로 보고된 바 있으며 침습적인 병변의 경우 완전히절제가 불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이다."라고 한다. 또한 경화주사요법을 진행한다고 해도 얘기가 달라지지 않는다. 운이 좋으면 한방에 치료될 수 있고, 아님 문제가 있을 때마다 계속 주사해 보는 것이고. 이 경우에도 확률에 대한 숫자는 큰 차이가 없다. 림프관 기형이라는 질환에 대해 정보를 얻으면 얻을수록 "원인도 모르고, 보장도 못하고"의 상황만 계속 설명이 된다. 그런데 "양성종양"이므로 큰 병은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출생증명서에는 정상으로 표기가 된다. 그런데 또 목에 발생하는 경우 호흡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어 안심할 수는 없다고 한다. 임상적으로는 심각할 수 있다고 한다. 전체적인 맥락은 단기간 내의 치료를 기대하지 말라고 한다. 원인도 모르고 치료 보장도 할 수 없는 질환이니 가능한 보존적인 방법을 선택하라는 것으로 나는 이해하고 있다.
지금 이런 상황을 부모로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내 아이는 정상인가? 기형인가? 과연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기나 할까? 이건 전혀 상상도 못 했던 인생이다. 지금 병에 걸린 것이 내 아이인지 나인지 모르겠다. 누가 병에 걸린 것인지는 몰라도 정말 제대로 걸린 것 같다. 그래서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