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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mihlapinatapai

by Andrew Hong

오늘은 여타 다른 날 보다도 더욱 뉴욕스러운 날씨였다. 구름에 드리워져 햇빛이 없는 적적한 공기, 부슬부슬 그칠 줄 모르고 계속해서 잔잔하게 내리는 비. 나는 돌아가던 마차에서 이 사실을 털어 놓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이별을 고했고, 난 달리기 시작했다. 어릴적부터 그녀와 놀았던 장소이자 아직도 매일 아침마다 그곳에서 러닝을 하는 그녀를 지금 달려가면 마주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달려가면 내가 그토록 원했던 소울메이트와의 사랑, 그토록 원했던 자유로운 예술, 아니 정확히는 진짜 내 자신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난 미치도록 우산없이 빗속을 달렸다. 내 온 힘을 다해 그녀에게 닿고자 했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은 설레임과 기대감 그리고 행복함으로 가득한 채...


어릴적 천부적 재능을 인정받아 피아노 전공으로 지바센 예술학교에 들어갔다. 하지만 내겐 이름만 번지르르한 허울뿐인 학교였다. 명문 학교일수록 틀에 박히고 따분한 수업은 세계 어딜가나 공통인 것일까. 심지어 교양 과목마저 지루하다. 그리고 어느 날 이 지루한 교양 과목에서 각자 개인 발표 시간이 다가왔다. 난 오늘도 맨 뒷자리에 앉아 다리를 꼬고 빌려온 소설책을 읽기 시작했다. 발표자들이 뭐라 떠들건 내가 읽는 소설책이 훨씬 더 유용하단 확신이 있었다. 그러다 한 아이의 발표가 유난히 내 귀를 거슬리게 했다. 정확히는 나의 관심을 자극했다.



금발에 외관상으로도 빛나는 외모였지만 그보다 그녀의 말투와 언어에서, 어른들의 틀에 박힌 세속적 표현이 없었다. 즉 어떠한 대상에게도 선입견없이 오로지 자기만의 관점에서 군더더기 없는 순도 높은 표현으로 발표를 이어나갔다. 그 부분이 난 인상 깊었다. 그녀와 난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발표가 끝나고, 난 그녀에게 고백했다.



그녀의 이름은 애슐리, 애슐리는 빛나는 외관과는 달리 어렸을 적부터 잔병치레가 많았다. 학기가 끝나고 방학을 맞자마자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두 달치 약을 타왔다. 사실 의사 선생님은 당분간 푹 쉬면서 입원하는 게 좋겠다고 권고했지만, 그녀는 당당히 거절하고 오히려 내게 뉴욕 여행을 가자고 했다. 나는 순간 당황했지만 그녀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뉴욕의 맨해튼은 내게 조금은 특별한 도시이기도 하기에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잠시나마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기대감도 들었다.



맨해튼은 나의 고향이자 나의 연애 등 모든 성장사가 담긴 곳이다. 어쨌든 우린 <그랜드부다페스트 호텔>의 장면과 비슷한 아름다운 호텔을 예약하고 사랑을 나눈 뒤, 그녀는 잠시 유명인을 인터뷰하러 자리를 비웠다. 오랜만에 맨해튼에서 혼자만의 시간이 생긴 나는, 나의 고향 길거리를 정처없이 배회하기 시작했다. 담배 홀더를 사서 길 모퉁이에서 시가를 한대 피고 있었다. 건너편에 사람들이 모여있다. 짐 벌이 있는 걸 보니, 무슨 촬영을 하는 것 같았다. 난 한 모금 연기를 뿜어내며 천천히 다가가 누가 촬영하나 까치발을 들고 살짝 보았다. 내 첫사랑의 여동생 '챈'이었다.



챈은 스몰 영화의 한 장면을 찍고 있었던 것 같았다. 굳이 아는 척은 하지 않고 난 멀리서 구경했다. 사실 어릴적을 떠올리면 챈과 굉장히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지만, 그것은 순전히 챈의 언니 '에이미'가 내 첫사랑이었기 때문이었다. 여하튼 우리는 셋이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내며 놀았고, 그만큼 서로에게 익숙해져 있었다.

에이미는 도도하고 세련된 성격과 성품을 지녔다면, 챈은 보다 둥글둥글하고 장난끼 넘치며 발랄함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매번 에이미의 시선을 갈구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챈의 위로였다. 그러다보니 챈은 내게 말동무로서 최고의 베프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랬던 그녀가 어느덧 성인이 되어 장발의 매혹적인 외모로 영화를 찍고 있는 장면을 보니, 빠르게 지나가는 세월의 야속함에 감회가 새로웠다. 그렇게 살살 쳐다보다가 실수로 챈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잘 지냈어?"

촬영이 끝나자마자 챈이 내게 다가왔다. 우리는 오랜만에 만났음에도 쭉 만나왔던 것처럼 너무 자연스레 대화의 물꼬를 틀었다. 어릴 때와 같이 맨해튼의 길거리를 배회하며 그동안 쌓인 대화를 정신없이 풀어나갔다. 어릴적 나보다 키가 컸던 챈에서 이제는 나보다 작아진 챈만 달라졌을 뿐, 우리의 정서와 관심사는 여전히 같았고 대화는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편안했으며 침묵속에서도 우리는 서로가 비슷한 것을 원하고 비슷한 생각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의 가장 큰 공통점은 재즈였다. 어릴적 에이미에게 들려주기 위해 재즈를 연습할 때마다, 챈은 내 옆에서 엉망인 내 음악을 감상해줬다. 그리고 오늘 어차피 애슐리의 인터뷰 작업이 길어진다는 소식을 받았으니, 나는 오랜만에 챈의 집에가서 어릴적 연주했던 Erroll Garner의 <Misty>를 연주했다. 이 곡은 비가 적적히 내리고 약간의 적막함과 고요함이 적셔있는 이 도시와 굉장히 어울리는 곡이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기도 했다. 오랜만에 나의 연주를 들은 챈은 눈빛으로 다시 한 번 내 연주에 박수를 쳐주었다. 형식적인 예술학교에서의 따분함이 아닌, 간만에 재즈 예술가로서 다시 태어난 느낌을 순간적으로 받았다. 그리고 이 느낌은 결코 단순한 게 아닌 묵직한 것임을 나는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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