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gata
눈을 떠보니 나는 사방이 하얀 벽지로 둘러싸인 방 안에서 하얀 침대 위에 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얼핏 잔상으로 남은 것은 내가 가운을 입은 사람들에게 어딘가로 이끄려 몸이 묶인 채 찌릿 찌릿 나의 온몸이 자극 당했던 순간들뿐이다. 그 때의 고통이 어느 정도 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목소리가 안나올정도로 비명을 질렀던 것 같다. 그래서 난 이 악몽을 떠올려 <The Bell Jar>를 완성했다.
일상 생활을 할 수 있을 만큼 회복이 되어 다시 돌아와, 대학을 마저 졸업하고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나의 재능은 여전히 뛰어났고, 여기저기서 좋은 제안을 받아 한 대학에서 파트타임으로 영문학을 가르쳤다. 훈남인 남편을 만나 결혼까지 성공했다. 나와 남편 사이에 큰 딸과 작은 아들을 가지게 되었지만, 잠잠히 내재되어 있던 나의 발작과 충동은 남편의 외도 사건과 동시에 맞물려 다시 폭발하여 터져버리고 말았다.
처음 알았을 때에는 가정을 지키고 싶어 싸웠으나, 점점 힘이 부쳤다. 아니 왜 내가 이런 고생을 해야하는지 회의감이 들었다. 결국 우리는 별거를 선택했고, 아이들은 내가 데려왔으며 난 이 충동적인 감정과 분노를 글로 풀어냈다. <Daddy>, <Lady Lazarus> 등 수 많은 시들이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유난히 추운 겨울이 찾아왔다. 역대급 한파로 글을 쓰는 것조차 쉽지 않았고, 아이들과의 생계가 위태로웠고 이는 나의 건강과 정신을 몇 배로 악화시켰다. 그리고 어렸을 때 가졌던 부정적인 감정들이 스물스물 내 온몸으로 다시 퍼지기 시작했다.
어느 하루 자고 있던 내게 달빛에 비친 검은 그을음이 지나가 순간 눈을 뜨게 되었다. 온 몸의 피곤한 기색이 여전하고, 달빛이 창문을 통해 청명하게 비치니 아까 눈을 감고 채 1~2시간 밖에 안지난 한 밤 중이다. 옆 방에 소리가 잠잠한 것을 보니, 다행히 아이들은 깨지 않고 깊은 잠에 든 모양이다. 그렇다면 왜 갑자기 눈이 떠진 것일까. 모르겠다. 일단 물 한 컵 마시고 와야지. 방문을 열고 어두운 거실을 지나 유리컵에 물을 따라 세 모금 마신다. 근데 오늘따라 창문에 비친 달빛이 밝다.
마치 누군가를 유혹하는 것처럼 매혹적이다. 달빛에 몸을 맡겨 하늘에 둥둥 떠다닌다면 얼마나 좋을까. 난 속옷을 벗고 맨 몸에 달빛을 담아본다. 덕분일까, 내 몸이 아름다워 보인다. 아이를 둘이나 낳은 몸이기에 뱃살과 군살들이 있지만 그래도 좋다.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아본다. 아까 느낀 피곤함이 사라진 것 같다. 기분이 좋다. 안되겠다. 위스키 반 잔을 따라 마신다. 그리고 이내 생각에 잠긴다. 이대로 생을 마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아이들의 방에서 얼굴을 한번씩 보고 문을 닫고 청테이프로 문지방 곳곳을 막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달님에게 내 소망을 말해본다.
"달님, 고마워요. 내 삶이 이토록 아프고 부서지고 절망이 가득한 심연 속에 있을지라도, 항상 내 곁에서 잔잔한 빛을 비추어 줘서..."
"달님, 우리 아이들을 부탁해요. 나는 떠나고 싶어요. 그동안 너무 힘들었어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었을까요. 그러나 이제는 중요하지 않아요. 세상의 짐을 내려놓고, 내 자신이 될 거에요. 내가 원하는 존재가 되어 날아다닐 거에요."
"달님, 나의 선택을 너무 비난하지 말아줘요. 무언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내 가슴속 짙은 회색 세상의 무게가 그동안 벅찼어요. 그러니 이제는 나를 놓아주세요."
찰나의 장마가 그 해 눈물의 전부인 것처럼 수 많은 추억을 게워내었던 지난 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흐려져가는 기억과 만나 눈물이 되어 가슴 속 방울방울 장식하는 것처럼... 그리고 달빛 아래에서 나는 조금씩 나의 생명의 끈을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