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삶을 바꾼 것
초등생 시절
대학생이던 사촌언니에게 과외를 받았다. 언니는 단정, 단아, 다정함의 표본이었고, 목소리는 완만하고 부드러웠다. 언니의 가르침은 고막을 간지럽히는 ASMR 같아서, 나는 척수반사처럼 잠들곤 했다. 언니는 내가 꾸벅꾸벅 졸고 있어도 결코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부드럽고 차분한 음색으로 다정히 이름을 불러주었다.
“이다야아. 이다야~”
고등학교 진학 후, 사촌언니를 복제한 듯한 선생님을 만났다. 그 시절 우리 반 여자애들은 사춘기 소녀라기보다 급식실을 향해 질주하는 적토마 같았다. 그런 우리를 품위 있게 대해주던 국사 선생님. 존경하는 선생님을 위해 상호 존중을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선생님의 수업을 1년 동안, 단 한 번도 끝까지 들을 수 없었다. 느린 템포의 잔잔한 목소리는 몸의 긴장을 풀었고, 잠이 솔솔 쏟아졌다. 선생님의 수업은 구전 설화처럼 빌린 노트로만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잠들지 않는 수업은 늘 한결같은 공통점이 있었다. 목소리에 힘이 넘치고 유머를 묘기처럼 다루는 선생님들이었다. 만점을 받았던, 고등학교 일본어 수업처럼.
히라가나의 후는 “후까시의 후”라며, 정수리에 뽕 넣는 몸짓을 더해 열정적인 수업을 이어가던 선생님. 단어 설명 하나에도 특별한 노하우가 있었다.
50분의 수업, 지루할 틈 없이 분석하고 연구한 흔적이 선명했다. 수업은 한 편의 잘 짜인 드라마를 보는 듯 즐거웠다. 하지만 그런 수업은 드물었다.
코로나 시절, 비대면으로 글쓰기 강의를 들었다. 긴장했던 첫 피드백 날, 선생님은 수강생들의 글을 읽어오지 않았다. 내 순서는 수업이 끝난 뒤에 돌아왔다. 눈대중으로 순식간에 끝난 피드백. 내 글이 초라하게 느껴져 원고를 삭제했다. 이후 더는 글을 쓰지 않았다.
몇 해가 지났다.
도서관으로 출근하던 어느 날. 도서관 벽보에서 글쓰기 홍보 포스터를 보았다. 그리고 어딘가 익숙한 프로필 사진. 광고와 AI로 점령당한 네이버 블로그 속, 진솔한 이야기가 가득했던 블로그. 재밌게 보던 블로그의 프로필 사진이었다.
두근거렸다. 만점 시험지를 받았던 일본어 선생님의 수업만큼, 또다시 빠져들지 않을까?
수강 신청에 성공했다.
매 수업, 선생님의 입담에 웃음이 터졌다. 집중을 끌어내는 수업에 귀 기울였다. 일상 에피소드와 영화 리뷰를 하나로 엮는 기술을 들을 땐, 옛 일본어 선생님을 떠오르게 했다.
그리웠던 즐거움.
매주 글쓰기 수업을 기다렸다. 집을 나설 때, 가방 속 필기구를 여러 번 확인했다. 수업을 들을 때면 죽은 동태눈이 생태처럼 활기를 찾았다. 졸음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다.
내가 받은 글쓰기 과제는 여행.
지난해 다녀온 일본 소도시 여행기를 쓰기로 했다. 실직도, 층간소음도 없던, 즐거운 이야기를 담을 수 있었다. 글을 쓰면서도 혹여 내 불행이 글에 옮겨 붙진 않았나 샅샅이 검역했다.
선생님은 수강생의 블로그에 일일이 찾아와 글을 읽고 댓글을 남겼다. 꼼꼼하게 첨삭해 주며 수강생에게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누군가의 작은 친절은 한 사람의 삶을 바꾸기도 한다. 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지 않던가.
그날 이후 용기를 얻은 나는 블로그에 여행기 연재를 시작했고, 브런치 작가 신청까지 마쳤다. 이후 인스타에 에세이툰을 연재했고, 다시 그림을 그리면서 이모티콘 창작으로 영역을 넓혔다. 다양한 이모티콘을 제안한 끝에 출시까지 성공했다.
지금은 매일 글을 쓰며, 바늘구멍 취업에 매달리기 보다 정년이 없는 일거리를 발굴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당장 수익이 나오는 일부터, 장기 먹거리가 될 일감을 기획하고 구체화시키려 노력한다. 뭐라도 하다 보면, 뭐라도 되어 빛을 발하는 날이 올 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