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을 보게 하는 것도 하늘을 보게 만드는 것도
아파트 불빛이 별처럼 환히 반짝이는 운동장을 걷는다. 아이는 걷다가 아빠 품에 안기다가 나에게 안기다가 다시 걷겠다고 발버둥 치길 반복한다. 5미터 가는데 최소 십 분은 걸릴 모양이다. 또다시 걷는가 싶더니만 이내 길가에 난 풀을 잡거나 흙장난을 치다가 옆길로 뒷길로 샌다. 답답한 마음에 번쩍 들어 안아 집으로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못해 찰찰 넘치지만 우린 안다.
이럴 때일수록 기다리고 지켜봐야 한다는 것과
아이를 키우는 일에 인내만큼 소중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아장거리는 아이 맞은편으로 여자아이 둘이서 손을 꼭 잡고 걸어온다. 키도 체형도 비슷한, 아마도 친한 친구 사이다. 재잘재잘 들릴 듯 말듯하던 아이들의 대화가 완전히 들리지 않을 때쯤 그가 묻는다.
아윤이도 친구가 생기겠지? 어떤 아이일까?
친구라. 그러고 보면 '친구'란 한때 내게 무엇보다 중요한 관계였다. 아니, 관계라는 개념을 넘어 태양처럼 생명(=나)을 먹이고 살리는 존재였다. 가난과 고단에 젖어있던 생활을 쨍하니 말려주고 환하게 빛내주던 하나하나의 태양들. 득실 없이 온전히 나와 마주 보며 웃던 이들. 심지어 어떤 친구를 위해서라면 이까짓 가벼운 목숨 조금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땐 정말 그랬다. 나의 숨은 친구의 숨 가까이에서만 안심했다. 지극히 감성적인 십 대 특유의 과장스럽지만 진지한 진심이었다. 그렇게 그 시기의 온 마음과 시간과 용돈은 친구와 먹고 돌아다니는 데 다 썼다. 그래 봤자 떡볶이나 과일 빙수를 먹고 도서관에서 노닥거릴 뿐이었지만 그땐 그게 완전한 세계였다. 이제는 기억나지 않고 연락하지 않는 이들이 대부분이지만 후회는 없다. 오늘의 멀고 가까움, 감정의 연결을 떠나 그들은 내게 여전히 고마운 사람들이다. 함께 고민하고 웃으며 같은 시간을 살던 이들이다. 나는 그들에게 나의 작은 파편을 줬고 그들의 것도 내 안에 새로운 형태로 살아 숨 쉰다.
작가 김영하는 '친구를 훨씬 덜 만났으면 내 인생이 더 풍요로웠을 것 같다'고 썼다. '변덕스럽고 복잡한 여러 친구들의 성향과 성격을 맞춰주느라 힘을 뺄 바에 그 시간에 책이나 읽고 잠을 자거나 음악이나 들을걸' 후회한다. 일리가 있다. 억지스럽고 나를 갉아먹는 관계는 이어가지 않는 게 현명하다. 하지만 어릴 땐 그 차이를 잘 알지 못하기도 하고 모든 것엔 시기가 있다고 생각한다. 친구들과 어울리며 다양한 군상을 살펴볼 시기, 나와 맞는 사람을 알아가는 시기, 뭐 훨씬 그 이전에는 아윤이처럼 걸음마에 빠지는 시기까지도.
'친구를 훨씬 덜 만났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순전히 친구들과 어울리느라 보낸 시간을 그러모아 여행이나 독서, 나를 위한 시간, 알아가는 시간을 보냈다면 분명 나의 오늘은 달랐을 것이다. 거기엔 긍정과 부정이 함께 있다. 혼자서 어떤 능력을 개발했다면 그만큼의 능력치는 올랐을 것이다. 대부분의 능력과 발전은 고독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긍정의 역할이다. 하지만 사람은 관계 속에서 태어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친구들이 준 생활의 망각과 따뜻함이 없었다면 역시나 지금의 나는 달랐을 것이다. 태양빛을 충분히 쬐지 않은 식물 같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영하가 말한 문장에서 중요한 건 '덜'이라는 부사에 있다. 햇빛처럼 따뜻한 사람만을 만나기에도 시간이 없는 건 사실이다.
구원이라는 단어는 주로 종교적으로 쓰인다. 그러나 신 god 과는 관계없이 나도 인생에서 몇 번 구원받았다고 감각한다. 크게는 십 대 때 한번, 이십 대 때 한번, 삼십 대 때 한번. 그리고 자잘한 물수제비처럼 찰나에 가까운 순간들. 돌아보면 그 모든 경우는 관계에서 연유했다. 당시 심취한 음악이나 영화, 손에 쥔 책, 멀리 떠나본 여행이 아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의 오고 가는 말과 기운, 다정함, 혹은 존재 그 자체에서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관계의 시작에서는 불편함을 느끼기도 했고 한동안 어색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이 내게 풍요를 가져다줄지 전연 알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떤 선택이 옳을지는 단언할 수 없다. 저마다 가진 배경과 상처와 힘, 여유에 근거해서 다 다른 값이 나올 테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딱 하나 분명한 건 비가 갠 뒤 진창의 바닥을 보게 하는 것도 비 그친 하늘을 보게 만드는 것도 결국 사람이라는 것이다.
조금 전의 아이들처럼 재잘거릴 아기와 그 곁의 친구를 상상한다.
하지만 일 년 전엔 오늘을 떠올릴 수 없었던 것처럼 도저히 그릴 수 없다.
어떤 모습일까. 서로 닮았을까. 어떤 이야기를 하며 꺄르르 웃을까. 다정한 아이일까. 어떤 친구를 사귀게 될까.
궁금한 게 자꾸자꾸 늘어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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