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왼쪽 교근을, 그리고 왼쪽으로 돌려 오른쪽 교근을 풀어준다. 교근은 씹거나 이를 악 다물 때 쓰는 근육이다. 손가락 가운데 마디로 물둘레를 만들듯 빙글빙글 부드럽게 문지르며 아픈 곳에서는 조금 더 길게 머무른다. 어른 평균 이 센티미터 남짓의 이 작은 것이 신체에서 가장 힘이 센 근육이라니. 그것이 씹고 물고 버텼어야 할 무수한 순간을 생각한다. 요가나 명상을 하면서 떠오르는 생각의 대부분은 그런 것들이다. 편하게 서 있는 자세에서 더 열린 오른쪽 골반이나 일순간 올라가 굳어버린 어깨. 나도 모르고 참고 있는 숨, 수축되어 있는 미간과 교근처럼 사소한 긴장. 그리고 그것을 알아채고 놓아야지, 힘을 빼야지, 되뇌는 호흡.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잘것없는, 겨울 점퍼 사이로 삐져나온 깃털 같은 것들.
결정적인 순간마다 무심코 힘껏 물었을 교근을 살살 달래주며 깊게 숨을 쉰다. 아랫배를 열어 숨을 쉬는 동안 몸은 이완되고 고요해진다. 살갗이 조금 차가워지는 것도 같다. 차분한 서늘. 처음 성당을 갔을 때도 그랬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성당 안에서 빛이 통과하는 스테인드글라스와 붉은 벽돌, 2층을 지키는 오랜 파이프 오르간, 높은 천장이 뒤섞여 불러오던 적요와 차가운 감각. 성당이란 추운 곳이네요, 내가 말하자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십 년을 성당에서 살아온 그였다. 글쎄요. 차분하고 시원하다는 감각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만, 이라던가. 그의 대답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갸웃하던 그 고개만은 또렷이 남아있다. 그때 나는 희미하게나마 느꼈다. 우리가 도저히 타인에게서 이해할 수 없는 건 종교나 사상같이 높고 곧은 것뿐 아니라 냄새, 온도, 정서 같이 사소하고 낮은 보통의 것들이리라고. 우리는 결코 자신의 것과 다른 생활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리라고. 낱낱한 생활의 근거가 깔린 감각들, 그러니까 성당 안에서의 경험, 대화, 시간 그 모든 것의 축적들이 이렇게 우리 둘을 각자 다른 곳으로 데려가고 있는 거라고.
한참이나 지난 지금, 나는 다시 그 붉은 벽돌의 공간 속으로 들어가는 상상을 한다. 유난히 높은 천장과 차분한 공기. 걸을 때마다 심박수가 낮아지는 감각. 그래. 이건 성당이 끌어안고 있는 경건의 온도일지도 모르겠다. 늦은 감각이 열린다. 천천히 몸을 열어 호흡하는 순간처럼 고요한 감각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풀린 얼굴이 되어 등을 바르게 세운다. 가슴을 펴고 턱을 살짝 아주 살짝 당긴다. 스치는 생각을 잡지 않고 그대로 둔다. 당신의 생각은 당신이 아니라는 말을 위로처럼 떠올리며 감사합니다, 습관처럼 속삭이다 목을 곧게 세운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개의 뼈를 가지런히 두고 그 위에 머리를 살포시 둔다. 두개골과 바로 연결되어 있는 뼈는 C1, 아틀라스다. 조금도 쉬지 못하고 하늘을 떠받치는 형벌을 받는 짊어진 자, 아틀라스. 종일 복잡하고 무거운 머리를 이고 사는 뼛조각의 이름인 이유다. 그런 수많은 작은 것들이 내 몸속에 있다. 몸 밖에도 있을 것이다. 살살 교근의 피로를 풀었던 것처럼 목과 등의 근육을 이완시키기 위해 아틀라스 위에 살포시 머리를 놓는다. 숨을 깊이 마신다. 숨을 더 깊이 내쉰다. 어깨와 팔에 힘을 푼다. 살갗의 온도가 그대로 호흡을 타고 인식된다. 천천히 어두운 실내를 걷던 그때처럼 모든 게 느리게만 가는 것 같던 그때처럼.
그렇게, 나는 매일 조금씩 자유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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