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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다짐 Jan 30. 2019

오늘의 오이

그게 전부 오이로 이어져

난데없이 뭔 꿈이람. 대관절 내가 여러 사람을 모아 두고 오이 써는 시범을 보이고 있었다. 여러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고 아무튼 사람들이 내게 오이 자르는 걸 한 번만 보여달라고 싱크대 앞으로 잡아끌었다. 영문도 모른 채 칼을 손에 쥐려니까 음식물 쓰레기봉투가 거슬린다. 꽉 찬 봉투가 터지기 일보직전이라 일단 매듭을 끄른다. 음식물 쓰레기 위엔 빈 음식물 쓰레기봉투가 봉긋하게 덮여 있다. 어떤 손 하나가 덮인 봉투의 중간 부위를 가위로 자르려 한다. 내가 바로 저지, 이건 다시 쓸 수 있잖아요, 잘라버리면 새 것을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진데. '생활의 지혜'라며 사람들이 감탄한다. 이게 무슨 생활의 지혜야, 애초에 봉투 두 개에 나눠 담았으면 이런 일 없잖아.

이제 오이를 썬다. 어째서지. 어째서 내가 사람들 앞에서 오이를 썰고 있냐. 칼질이 그다지 뛰어나지도 않은데. 채를 써는 것도 아니고 동그랑땡처럼 댕강댕강 자르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또 사람들이 엄지를 치켜든다. 뭐냐고. 놀리냐 지금.


게슴츠레 눈을 떴다. 황당무계한 꿈을 꾼 바람에 눈뜨자마자 헛웃음이 나와버렸다. 아직 아무도 깨지 않은 조용한 시간, 머리맡의 어이를 쓰다듬고 상반신을 일으킨다. 어젯밤 각자 다른 방향으로 머리를 두고 잔 탓에 몸을 일으키자 영감의 얼굴이 보인다. 졸음이 채 가시지 않은 눈으로 잠든 얼굴을 마냥 바라보다가 이렇게 쳐다보고 있으면 시선이 느껴지려나, 눈을 뜨시오, 내 시선을 알아채시오, 하고 계속 본다. 전혀 깨지 않는다. 앉은 자세 그대로 나도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다 오이소박이 먹고 싶네, 로 무의식이 점프하더니 완전히 잠에서 깼다. 그때 영감이 '이리 와' 한다. 그 소리가 듣기 좋아서 옆자리로 파고든다. 오이 생각은 까맣게 잊고 영감이 일어날 때까지 잠자코 누워 있었다.

영감이 나간 후 일찍 일어난 김에 집안일을 서두른다. 설거지를 마치고 어제 사온 포기김치를 잘라 큰 통, 중간 통, 작은 통 세 개에 나눠 담았다. 주변에 떨어진 김칫국물을 닦아내고 손을 씻다가, 오이 생각이 났다.


그 꿈, 뭐지. 새벽에 <매트릭스>를 끝까지 보고 잠들었다. 매트릭스와 오이라. 매트릭스 프로그래밍 코드 색상이 오이 색깔이긴 했지만 관계없는 것 같다. 영화 보기 전에는 <디디의 우산>을 읽었다. 우산이 뭐, 오늘 내가 구사하는 문체엔 황정은의 영향이 있을지언정, 우산대라든가 알파벳 d가 오이랑 닮았다는 억지는 부리지 말자. 저녁 식탁으로 거슬러 가본다. 된장찌개 한 뚝배기로 영감의 찬사를 이끌어냈다. 자랑하냐, 응, 자랑. 반찬은 케첩 바른 계란 프라이와 비엔나소시지, 김, 담근 무 피클. 무 피클 너, 여기 오이가 있어, 무에 섞여 있어. 심지어 꿈에서 자른 그 동그란 모양으로. 아니 근데 이게 꿈에 등장할 정도로 자랑스러운 일이던가. 재롱은 된장찌개가 피웠구만 피클 담근 지가 언젠데.

오이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뭔가를 호소하고 싶었던 걸까. d의 심정에 빗대자면, 초록을 가진 오이가 아름다울 수 있으며,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아름답다고 여길 수 있는 마음으로도 오이 서글퍼지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걸까.  


웬일이니. 이건 계시야. 다음 글로 들어가라는 <매트릭스>의 전화벨이야. 새해 들어 브런치에 한 편의 글도 발행하지 못했다. '작가의 서랍'에 쓰다 만 글만 쌓였다. 알뜰한 로맨스에 대해 쓰다 엎어졌고, 집과 얽힌 얘기도 신나게 쓰다 흐지부지됐고, 월요일의 아날로그에 대하여도, 서재에 관한 생각들도, 이런저런 글감들도 마침표 없이 늘어지기만 했다. 그런데 그게 전부 오이로 이어져(갑자기 헷갈린다, 오이 겐자부로냐 오에 겐자부로냐).

물론 과장입니다. 하지만 두어 개의 글은 정말 오이로 이을 수 있다. 이를테면 알뜰한 로맨스. 마지막으로 발행한 글을 쓸 당시 나는 소고기 뭇국을 끓였다. 뭇국을 끓이고 남은 식재료가 뭐야. 뭐긴 뭐야 무야. 그 많은 무를 어디다 써. 일단 썰어, 놔두면 버리니까. 그게 피클이 됐다, 오백 원 주고 산 무 다섯 개가. 무가 사라진 자리는 영롱한 빛깔의 오이가 채웠다. 그걸 영감과 김치 대신 줄기차게 먹었으니 너무 알뜰해서 견딜 수가 없지?

그리고 또. 언젠가 집에 오이를 심었지... 다음 주 월요일엔 오이 색깔 스웨터를 입으면 될 터... 오이처럼 해체되는 서재의 이혼은 어떠냐... 그러냐? 사기를 치지 마라...

사기 아니다. 두어 개의 글이랬잖냐. 지금 이 글이 오이잖냐. 오이 쓰는 걸 보여달라잖냐. 꽉 찬 글이 터질 지경이니 매듭을 푸르라잖냐. 그리고 오이를 쓰라잖냐. 그러니까 결국 오이잖냐. 오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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