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내일도 따뜻한 갈빗살에서
오전 11시가 조금 넘은 시각, 이제 나간다는 영감 목소리에 부스스 눈을 떴다. 아무리 졸려도 현관 앞까지는 배웅하자는 다짐을 스스로에게 해두었지만 스스로 한 다짐은 늘 제멋대로다. 잠깐만, 잠깐만, 하며 미적거리는 사이에 영감은 이따 봐, 하곤 쓱 나가버렸다. 현관문이 닫히고 전자음 소리를 듣고서 아아, 정신이 든다.
또 늦잠을 잤구나. 괜히 날씨 탓이다. 춥다, 너무 춥다, 이불 밖이 다 춥다. 집이 이렇게 추운데 바깥은 더 춥겠지. 머쓱하고 미안해진 마음에 핸드폰을 찾아들었다. 일찍부터 카카오톡 알림이 잔뜩 왔다. 창밖을 보라고, 눈이 온다는 ㅇ의 메시지. 그리고 ㅇ가 보내온 눈 덮인 풍경 사진들.
잠든 새 눈이 왔어, 하는 자각과 동시에 원통함이 밀려왔다. 올 겨울 서울에 펑펑 내렸다는 첫눈도 나는 보지 못했다. 금방 녹아 축축하게 젖은 길목에 물웅덩이만 이따금 고여 있었다.
거실로 나가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반쯤 열어봤다. 눈이다. 기다렸던 눈, 놓쳐버린 하얀 눈이 창 너머에 정지해 있다. 반가움보다 실망감. 그 불똥이 곧장 영감에게로 튄다. 전화를 걸어 한바탕 신경질을 부리고는 씩씩거린다.
아름다운 것을 같이 보고 싶었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전하고 싶지 않을까? 눈밭이 된 운동장에는 검은색 패딩을 입은 여학생들이 영화 <러브레터>의 '오겡끼데스까'를 외치며 까불거린다. 나는 안녕 못해, 이 동네에 함께 살면서 처음 맞는 눈이 왔는데 말 한마디 없는 영감이 야속했다. 여보가 자니까, 그게 뭐, 이따가 보면 되지, 로 일관하는 이 남자. 낭만이라곤 쥐뿔도 없어.
혼자 분풀이를 해대자 기가 꺾인다. 창문을 닫아버리고, 커튼도 쳐 버리고, 무력해진 채 커피만 겨우 내려마셨다. 빨래도 설거지도 나 몰라라 하고 난로 앞에 웅크리고 앉아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반을 형벌처럼 듣고 있는 지금, 눈치도 없이 슬금슬금 또 졸음이 쏟아진다. 할 일이 많은데, 고양이 화장실 청소해야 되는데, 국간장이랑 청양고추랑 단무지도 사러 내려가야 하고, 밥도 안쳐놓고 국도 끓여놔야 되는데, 못 꺼낸 겨울옷도 침대 밑에 아직 많고, 중고서점에 판매할 책도 챙겨놔야 하잖아, 앙고라 세탁하려고 세탁망도 사놨으면서, 하는 생각을 할수록 꾸벅꾸벅 눈꺼풀이 감긴다.
자야 할 밤에는 안 자고 요샌 거의 매일을, 버젓이 일을 앞에 두고도 까무룩 잠들어버리기 일쑤다. 어제는 보고 싶던 다큐 <인생 후르츠>를 보러 ㅇ와 극장에 갔는데, 계속 좌석을 옮기느라 피곤해지고, 상영관은 어두컴컴하고, 키키 키린의 내레이션은 자장가 같고... 이건 영감이랑 다시 봐야 되니까, 하면서 속 편히 자버렸다. 집에 돌아와 츠바타 부부의 '후르츠 생활'을 다룬 책 <내일도 따뜻한 햇살에서>를 펼친 걸로 영화를 대신한다. 빌린 책이라 빨리 읽을 요량으로 차례부터 훑곤, 벌써 좋다고 책 주인에게 설레발. 그리고 한 장을 더 넘겨 슈이치 씨의 프로필을 읽은 것까진 기억난다. 슈이치 씨는 보폭이 65센티네, 프로필에 보폭을 다 적는구나, 내 보폭은 몇 센티려나 생각하다가 뚜... 뚜... 어머, 나 또 잠든 거야? 히데코 씨 보폭은 기억에 없어.
그러니 오늘도 날씨 탓을 해본다. 추우니까 잠깐만 침대에 누워 볼까, 명당자리를 차지한 어이와 무이를 옆으로 밀어낸다. 그 속을 비집고 쏙 들어간다. 이 따위 행동력은 왜 이렇게 빠르냐고요. 뜨끈뜨끈한 전기장판에 내 체온이 덧대지고, 다정한 고양이 두 마리는 그 몹쓸 온기 곁으로 모여든다. 그런데 쉬이 잠이 오지 않는다. 알라딘과 예스24 앱을 오가며 한 시간이나 뒤척이기만 한다.
순간 띠링, ㅇ로부터 '커피랑 빵 먹을래? 5시에' 하는 메시지가 왔다. '오늘 소고기무국 끓여놓고 외박 준비해야 한다'라고 핑계를 댔다. 핑계지만, 사실이었다. 뭇국을 끓이겠노라 이틀 전부터 영감에게 큰소리를 쳐놨고, ㅇ네 집 방문을 차일피일 미뤘다. '한 솥 끓여놔라'는 회신에 '일단 졸려서 한숨 잔다'는 답장을 보냈다.
어젯밤에, 책을 마저 읽긴 했다. ㅇ한테 가면 다 본 책을 돌려주며 츠바타 부부의 또 다른 책 <밭일 1시간, 낮잠 2시간>을 빌릴 수 있었을 거다. 어제는 ㅇ가 다시 읽는 중이라기에 제목만 보고 '나야, 이거' 하고 실실 웃었으나 나긴 뭐가 나야, 동경하는 전원생활의 꿈은 바지런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인 것이다, 라는 처참한 교훈을 얻고 씁쓸해졌다. 한 시간이 한 시간 나름이지, 어디 밭일 뿐이더냐.
언젠가 잠에 대한 얘기를 써보려고 글감을 꾸려놨었다. 자다가 생긴 일, 자려고 만든 일, 꿈, 잠꼬대 등 갖가지 해프닝만 옮겨도 거뜬히 몇 페이지는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2008년 3월 일기엔 '내 인생에 있어 악의 근원을 두 가지 꼽자면 잠과 부끄러움이었다.'라고 쓰여 있다. 십 년이 지났는데도 변함이 없다.
안 되지, 안 될 일이지, 이렇게 게을러터져서야 내가 망가진다. 악의 근원을 꼽을 시간에 뽑을 생각은 안 하냐, 허튼소리 집어치우고 야, 움직여, 스스로 윽박을 지르며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내 뺨에 찰싹찰싹 따귀를 때리는 심정으로 타닥타닥 몇 글자 먼저 적어봤다. 그럼 바빠서 이만.
덧1. 오늘의 소고기뭇국엔 정직하게 소고기랑 무만 들어갑니다.
덧2. 토요일에 <패터슨> 보기로 했는데, 에이 설마.
이튿날 아침의 덧3. 어떤 문장이 어렴풋이 생각나 뭐였더라 하며 책을 들춰봤다. 한강의 <흰>. 그녀의 희고 고운 글이 내 어깨를 토닥인다. 당신은 귀한 사람이라고. 당신의 잠은 깨끗하고 당신이 살아 있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