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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다짐 Nov 09. 2018

오늘의 근무일지

이게 나의 자립이고 자아실현이다

11월 달력을 냉장고에 붙였다. 남은 건 한 장, 슬슬 새 달력을 물색해야 할 때다.

취향별 용도별로 여러 개의 달력을 마련해놓는 나는 이 시기가 되면 달력 쇼핑에 열을 올린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선물 받는 재미가 쏠쏠해지면서 내 걸 직접 고르는 건 시들해졌다. 받는 재미는 주는 재미로 번진다. 마음에 쏙 드는 걸 발견하면 두 개를 사야 후련하다.

일 년을 책임진다는 의미에서 달력 선물은 특별하다. 주거니 받거니 서로가 서로에게 일 년치의 행운을 빈다. 무탈하게 지내다가도 다음 달 달력으로 교체하는 순간, 나눈 사람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10월 달력을 11월로 바꾸며 어김없이 떠오른 얼굴 하나가 있었다. 잘 지내고 있으려나. 내년에도 '달력요정'의 활약을 기대하는 바지만 요 며칠 근황이 뜸하다. 지난달 중순 ㅇ가 수강하는 수어교실에 따라간 게 마지막이었다. 적게는 일주일에 한 번, 많게는 주중에도 뻔질나게 왕래하는 사이다 보니 불과 몇 주간의 공백이 무척 허전한 듯하다.


수업이 끝나고 나오는 길, 저녁을 먹네 마네, 니가 사라 마라 장난스레 실랑이가 벌어졌다. 서로의 요정을 자처하는 것과는 별개로, ㅇ와 나는 만날 때마다 무슨 가난뱅이 배틀인 양 습관적으로 옥신각신을 일삼는다. 또 시작이구만. 지금까지의 패턴으로 보건대, 적당한 타이밍에 어느 한쪽이 져주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좀처럼 끝나질 않는다. 간단한 요기라면 그냥저냥 백기를 들겠지만 ㅇ는 오랜만에 기분을 내자고 졸랐다.

사실 기분 내고 싶은 건 오히려 내 쪽이었다. ㅇ와 옛날에 종종 갔던 부암동에서 치킨도 먹고 맥주도 마시고, 기분 좋게 계산하곤 막차 걱정 없이 택시로 귀가하고 싶었다.

문제는 진짜로 돈이 없다는 것. 직장을 그만둔 뒤 통장에 있는 돈은 다달이 카드 대금으로 빠져버리고 파산이 점점 코앞으로 닥쳐왔다. 잔고는 9월에 바닥이 났다. 때마침 들어온 근로장려금을 10월분으로 탈탈 털자 말 그대로 개털 신세.

물론 신용카드가 있다. 하지만 정수기 렌탈이 할인되는 제휴카드는 되도록 실적을 채우는 용도로만 쓴다. 공과금 및 각종 요금이 자동이체 걸려 있어 생활용품을 사거나 개인적인 욕심을 조금만 부려도 금세 실적에 도달한다. 그때그때 필요한 현금은 영감이 조달하고 내 카드의 실적이 차면 영감 카드를 쓰지만, 영감도 여름 즈음 음반매장을 정리하고 다른 사업을 시작한 터라 수입이 불확실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 부부(부부라고 처음 써본다, 이상하네)는 지출만 있는 상태다. 영감이 하는 일이 삼사 개월 내에 자리를 잡아야 그나마 가진 돈을 안 까먹는단 소리다.

구구절절 사정을 말하긴 귀찮으니 이쯤에서 나는 딱 잘라 돈이 없다고 했다. 나도 없어. 아뿔싸, 도돌이표다. 와 이건 흡사 뫼비우스의 띠야. 어이어이, 양쪽 형편 빤한 거 우리 둘이 제일 잘 아는데, 대충 때우거나 더치페이를 하거나 집에 가서 먹으면 되잖아, 피차 곤란한 상황에 뭐 하자는 건지, 내 혈압은 서서히 상승하고 있었다.


끽해봐야 이삼만 원, 화기애애 맛있는 거 한 끼 먹자는 게 뭐가 대수냐 싶다. 이 돈을 쓰는 만큼 다른 지출을 삼가면 그만이다. 그러나 궁색해지면 사람이 옹졸해진다. 나는 그런 작은 그릇이다. 솔직한 심정으론 이 돈을 아껴서 다른 지출을 하고 싶었다. 이런 마음을 먹는 내가 싫다. 괴로워진다.

적게 벌고 적게 쓰는 삶은 하나도 어렵지 않다. 없으면 없는 대로 안 쓰는 것도 불편하지 않다. 형편에 맞게 사는 거니까 아무래도 괜찮다. 내가 괴로운 지점은, 내 코가 석 자라서 베풀 수 없을 때다. 없는 것도 쪼개서 베푸는 대인배 같은 사람들도 많다지만, 게다가 그런 사람들에겐 더 큰 복이 간다지만, 나는 에휴, 아직 멀었다. 스스로 인색한 사람임을 인정하는 마음은 역시 괴롭다. ㅇ가 마냥 밉다. 괜히 한 대 쥐어박고 싶다. 멀어도 한참 멀었다.

취직 안 해? 이 녀석이 기어코 나를 궁지로 몰았다. 자기 딴에는 진심으로 염려스러웠을 거다. 언제까지 무직으로 버티는지 궁금했을 거다. 누누이 얘기했었다. 이제 안 할 거라고. 집에서 살림하며 글 쓸 거라고. 근데 또 그 얘기야. 하아.

영감이 없으면 나는 정말 개털일까, 이런 걸 두고 취집이라고 하는 건가. 갑작스럽게 처량해졌다. 바래다주겠다는 ㅇ를 쳐다보지도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내게 주어진 이 환경을 감사히 여긴다. 혼자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매달 들어가는 고정지출에, 카드값을 치르고 나면 저금할 돈도 모자라는데 무슨 깡으로 직장을 관두겠는가. 무턱대고 때려치웠다 치자, 넋 놓고 있을 새가 어딨어. 모아둔 게 없는 이상 여기저기 내키지 않는 이력서를 내야 한다. 그 과정이 녹록지 않다는 것쯤 숱하게 경험했다.

영감이 현실의 무게를 짊어진 덕에 나는 표면적인 압박에서 벗어났다. 우리가 쪽박을 차지 않는 한, 그가 내게 부여한 시간은 무한대므로 그 시간을 활용하는 건 순전히 내 몫이다.

그래서 집안을 돌보고 글을 짓는다. 말하자면, 집으로 출근해서 브런치로 퇴근한다.

빨래, 설거지, 고양이 화장실 청소, 이 방 저 방 정리정돈이 매일 반복되는 일이고 주요 할당량이다. 영감이 돌아올 시간에 맞춰 같이 먹을 저녁상을 준비한다. 먹고 들어오는 날은 자유다. 그런 날이면 나는 대개 식사를 건너뛴다. 계절이 바뀔 때 옷장 정리를 하고, 분리수거를 하거나 청소기를 돌리는 등의, 하고 나면 방전이 돼버리는 업무는 특근으로 분류했다. 때때로 시장으로 물가조사를 나가고, 도서관에 가는 날은 나름대로 외근이다. 더러는 ㅇ나 ㅇ의 집에 우렁각시 출장을 간다. 잔업과 야근도 만만찮다. 그러나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고, 무단으로 연차를 쓰는 것도 허용된다. 주 5일제에 회식도 있는 데다 복지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수준(차차 나아지리라). 그리고 내 경우엔, 어떻게 마음을 먹고 시간을 분배하냐에 따라 집안일의 순서와 속도가 달라진다. 세세하게 처리해야 할 일들이 성가실 뿐이지 게으름 피우지 않으면 얼마든지 금방 끝낼 수 있다.

졸리면 자고, 읽고 싶으면 읽고, 놀고 싶으면 놀다가, 그제야 쓰기 시작한다. 그제야 쓰기 시작하지만 종일 곱씹고 있던 거다. 브런치에 매일 글을 발행할 역량은 못 되어도 수시로 들어와 글감이라도 던져놓는다. 한없이 미뤄져도 가뿐한 퇴근이다. 다음 날 또 집으로 출근해서 근무를 시작한다. 그러고는 흩어진 미끼를 물기 위해 요리조리 골몰한다.


요즘 부쩍 바쁘다. 할 일도 많고 쓰고 싶은 글도 많다. 단지 수익이 발생되지 않을 뿐이다. 그게 뭐. 나는 사회에서 커리어를 쌓고 싶은 야심이 없다. 내 꿈은 그저 죽기 직전까지 정성껏 일상의 켜를 기록하는 것이다. 이게 나의 자립이고 자아실현이다. 그걸 책으로 한 권 갖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미래의 대작가는 백 년 후를 기약해본다. 그러나 이번 생엔 어느 때고 첫 독자가 되어주는 영감이 있고 지켜봐 주는 친구들이 있다. 아픈 데 없는 어이와 무이에게도 고맙다.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면 우리 부모님과 영감 부모님인데, 죄송해요,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나는 나대로, 영감은 영감대로, 각자의 방식으로 효도하리라 믿는다.

그런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잘릴 일도, 때려치울 생각도 없는 무사한 날들. 그 안에 희노애락애오욕이 다 있다.

있지, 나 그걸 하고 있다. 내가 더 잘하는 것,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있다. 그러니 걱정 말게나. 조만간 부암동에 가자. 쪼잔하게 굴어서 미안. 이 글 안 보겠지만. (링크 보낼 거다.)

  

덧. 나 없으면 ㅇ도 영감도 개털이다. 둘 다 알아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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