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가 하고 싶어?
오디션 프로그램을 즐겨 본다. <무한도전>의 '악동클럽' 코너가 포문을 활짝 열어주었고 그 뒤로 많은 서바이벌 프로를 봤다. <슈퍼스타 K>, <K팝스타> 같은 화제성 짙은 프로그램은 물론 <프로듀스 101>처럼 아이돌을 뽑는 프로그램, YG 엔터테인먼트의 보이그룹 서바이벌 <후이즈 넥스트>, JYP의 걸그룹 서바이벌 <식스틴>, 그밖에 위대한 탄생, 탑 밴드, 쇼미더머니, 언프리티 랩스타, 고등 래퍼 등 웬만큼 대중적인 건 거의 다 본 것 같다. 아니 티비도 없는데 이 많은 걸 언제 다 챙겨봤데.
오디션 프로는 끊임없이 생성된다. 이 프로가 끝나면 저 프로가 시작되고 한 시즌이 끝나면 다음 시즌이 예고된다. 꼭 오디션이 아니더라도 최후의 승자를 가리는 서바이벌 구도의 콘셉트는 <나는 가수다> 시절부터 높은 시청률을 보증해왔다.
개인적으론 왕성하게 활동 중인 연예인 위주의 프로보다 무명가수나 일반인이 나오는 쪽에 훨씬 끌린다. <너의 목소리가 보여>, <듀엣 가요제> 등이 대표적이다.
신선도와 흥미 유발 측면에서 서바이벌 형식을 띤 오디션 프로그램은 승승장구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능력치를 세상에 알리고 싶은 '히든 싱어'가 방방곡곡 수두룩하다는 반증이기도 할 테다.
나도 오디션을 본 적이 있다. 자우림 카피 밴드의 보컬을 뽑는 오디션으로, 자우림 인터넷 팬카페의 소모임에서 모집해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비공식적인 오디션이었으니 공중파 방송의 세트장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내 노래를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다는 바람은 같았다. 무대 위에 선다는 건 긴장되는 일이었지 그다지 두려운 일은 아니었다.
신촌의 한 합주실에서 오디션이 진행됐다. 내 나이는 열여덟 아니면 열아홉이었는데 아마 그때 신촌에 처음 가보지 않았나 싶다. 합주실을 구경한 것도 처음이었다. 거기까지 어떻게 갔는지는 가물가물하지만 합주실 안의 달뜬 공기는 여전히 생생하다.
자우림 카피 밴드를 완성하는 자리여선지 대부분의 지원자들은 자우림 노래를 준비했다. 나는 무반주로 롤러코스터의 '너에게 보내는 노래'를 불렀다. 나름대로의 전략이었다. 열 명 남짓한 지원자 중 두 사람이 약간의 경합을 벌였던 것 같고, 보컬 스타일이 다르다는 의견에 따라 둘 다 뽑혔다. 둘 중 하나가 나다.
밴드 이름이 '소주 한 잔'인가 그랬을 거다. 당시에는 뭐야, 촌스러워서 말하기 창피해, 그랬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참 애환이 담긴 밴드명인 듯하다.
나와 나보다 한 살 어린 베이스만 십 대였고 주축인 드럼과 메인 기타, 서브 기타 포지션은 이삼십대 직장인이었다. 키보드와 또 다른 보컬은 대학생이었다. 그들은 음악과 관련 없는 일, 전공을 하고 있었다.
취미로 만든 밴드, 자작곡 없는 카피 밴드, 밴드 같은 느낌이 별로 안 드는 외모와 옷차림의 멤버들이었지만 모두 열심이었고 즐거워 보였다.
밴드의 일원으로 딱 한 번 공연을 했다. 마스터플랜이었나, 여하튼 홍대 근처 클럽을 서너 시간 대관하기로 했고 멤버들이 티켓을 만들었다. 대관 비용을 메꾸려면 지인을 총동원해야 한다는 현실이 나는 좀 불편했다. 음악 하겠다고 고등학교를 자퇴한 터라 카피 공연을 한다는 것도 마뜩잖았다. 그래서 아무도 부르지 않았다.
그렇게 꼴사나운 태도로 뭘 할 수 있겠어. 당연히 공연을 망쳤다.
보자, 이런 전개여야 정상이겠지만 무대란 신기한 곳이었다. 될 대로 돼라 싶은 마음으로 막상 무대에 오르자 흥이 마구 끓어올라 난동 수준의 난리를 부렸다. 그 난리를 클럽 관계자가 눈여겨봤는지 다른 밴드를 소개시켜주었다. 스리슬쩍 소속을 바꾸며 새로운 밴드의 보컬이 되었다.
유명한 클럽에서 쟁쟁한 밴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공연을 했고 제법 인기도 얻었다.
자, 이런 전개라면 말 그대로 드라마겠지.
옮긴 밴드는 '엑스 재팬'을 롤모델로 한 비주얼 락밴드였다. 다섯 명의 멤버 모두 연령대가 비슷한 여성이었는데, 언뜻 봐선 성별을 분간하기 어려운 여자아이도 있었다. 멤버들 전부 머리카락을 염색하거나 탈색했고 일본어로 된 예명을 사용했다. 나는 체크무늬 더플코트를 입는 평범한 여자애였으나 이 애들을 만난 뒤 샛노랗게 머리색을 물들였다. 그런 아이들이 기타를 메고 드럼 스틱을 들고 우르르 몰려다녔다.
공연은 두 번 했다. 롤링스톤즈에서 한 번, 퀸에서 한 번.
서태지 트리뷰트 페스트에 참여했던 롤링스톤즈에서는 '서태지와 아이들' 노래만 두어 곡 불렀고, 퀸에서는 주로 '라르크 앙 시엘' 같은 밴드의 노래를 커버했다. 나는 겨우 부탁해서 공연곡 리스트에 '두 애즈 인피니티'의 노래를 포함시켰다. 그런데 멤버들이, 첫 곡으로 배치한 'Break of dawn'의 분위기가 처진다고 간주 때 관객에게 사탕을 던지자고 했다. 분위기 처지는 게 낫지 진저리 처질만큼 싫었다. 하지만 결국 츄파춥스를 사방천지 뿌려야 했다. 관객의 호응은 미미했고 나는 의기소침해졌다. 맹꽁이처럼 멀뚱히 서서 노래를 불렀다.
전주에 있는 엄마까지 불러들였었다. 엄마는 무대 위의 내가 딱해서 울었단다. 알 만하다.
지금도 츄파춥스를 떠올리면 자다가도 이불을 찬다. 하필 그 공연은 영상으로 길이 남기는 쓸모없는 짓까지 해버려서 시디로 건네받았다. 호기심에 한 번은 봤지만 두 번은 못 보겠더라.
비주얼 락밴드에서 빠지고 내 비주얼에 맞는 밴드를 찾아 오디션을 보러 돌아다녔다. 나의 밴드 생활은 이쯤에서 끝났다. 어디에도 영입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변변한 실력도, 치열한 노력도 없이 겉멋에만 치중했던 내게 과거의 오디션은 쓰라릴 자격도 없는 실패담이다. 내가 유달리 오디션 프로그램에 몰입하는 까닭은 나와는 차원이 다른 마음가짐으로 임하는 사람들의 간절함 때문일 것이다. 특히 나이가 어린 친구들에게서 드러나는 간절함은 간절함 그 자체로 간절하다.
그들은 자주 운다. 떨려서 울고, 떨어질까 봐 울고, 떨어져서 운다. 순위권이 아니면 인생 끝난다는 듯 울고불고하는 아이들을 보면 피식 웃음이 날 때도 있다. 그거 아니어도 인생 안 끝나, 괜한 흑역사 만들지 말고 다른 길 찾아봐라.
하지만 그들은 나와 다르다. 오로지 데뷔만 바라본다. 그 간절한 열망이 과정에 담긴다.
여름 내내 <프로듀스 48>에 빠져 지냈다. 본방사수, 복습에 모니터링까지 꼼꼼히 챙기며 침대 위에서 허투루 시간을 보냈다. 친구는 한심하다는 투로 제발 딴 거 보자 하고, 끝까지 버티던 나는 흥도 떨어지고 기분도 안 나 시무룩해졌다. 이런 나를 따스이 감싸준 빛기둥 같은 존재는 이승기 대표님...
순위 발표식을 앞둔 어느 날, 국민 프로듀서 대표 이승기는 연습생들을 향해 말한다. 국민 프로듀서가 너희들에게 사랑을 주는 이유는 너희들의 성실함, 노력, 꿈을 향한 지지 않는 열정 때문이다. 그 모습을 마지막까지 잃지 말고 최선을 다해서 멋진 레이스를 해주기 바란다.
내 마음이 한껏 어루만져진 듯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럴 수 있냐고 묻는 이승기 대표에게 연습생들은 우렁차게 답한다. 네에에에에에에. 나도 한 목소리 보탠다. 넵.
축 늘어져있던 연습생들은 활활 다시 힘을 내고 간절함을 불사 지른다. 마치 '붐바야 조'의 치바 에리이와 사토 미나미처럼.
국민 프로듀서의 한 사람으로서 매번 두 사람을 포함해 투표권을 행사했다. 에리이와 미나미는 세 번째 순위 발표식에서 방출당했지만 상관없다. 나는 데뷔가 아니라 과정을 응원한다. 못 추는 연습생(무리데쓰)이 추는 연습생이 되는 기적, 못 부르는 연구생(보카루데쓰)이 부르는 연구생이 되는 기적을 기특해 한다.
프로그램이 끝난 지금은 치바 에리이가 JYP로 이적한다는 소문이 사실이든 아니든 연구생인 사토 미나미가 당당히 데뷔하든 말든 관심 밖이다. 알아서들 하겠거니.
그저 나는 <프로듀스 48>에서 하차하자마자 <쇼미더머니 777>로 환승할 수 있음에 광분한다. pH-1 만세.
여담이지만 내 생애 첫 오디션은 중학교 2학년 때다. 예당미디어 주최의 번듯한 오디션이었다. 그때 나는 진심으로 S.E.S나 핑클 같은 걸그룹이 되려고 했다. 심사위원들의 생각은 달랐던가 싶지만.
사실 이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아무래도 이게 오디션 프로그램에 집착하는 진짜 이유였던 듯싶네.
좋아, 말 나온 김에 더 거슬러 올라가 본다. 내 생애 처음으로 넋을 놓고 본 티비 프로그램은 만화영화 <천사소녀 새롬이>였다. 새롬이는 아이돌이다.
결론은 무엇이냐.
다짐아, 여태 가수가 하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