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안의 모성
당신 안의 모성을 기억하고, 전하고 있는 당신에게
앞 글에 남겼듯, 우리는 누군가의 손길로 이 세상에 놓였습니다. 그게 꼭 따뜻하고 완벽한 사랑은 아니었을지라도, 그 존재들 덕분에 우리는 세상의 온기를 배웠습니다. 한 번쯤은 누군가의 따뜻함을 먹고 자라났고 살아내고 있다. 그것이 엄마와 아빠였을 수도 있고, 꼭 부모나 가족이 아니었어도 어느 순간 다정한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봐 준 사람이 있었을 것 입니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사랑을 받은 당신이 다른 누군가에게 조용히 사랑을 건네고 있는 순간을 느낀 적 있으신가요?
그 느낌에 대해 글로 남겨보려 합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향해 다정함을 베풀고, 자신을 조금씩 내려놓으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런 순간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모성’의 깃들어 있다.
진화심리학은 모성애를 유전자의 생존 전략으로 설명한다.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로 남기기 위해 어미가 새끼를 보호하고 키우는 건 본능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아기는 너무나 미숙한 상태로 태어난다. 몸도 작고,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그래서 인간의 양육에는 더 긴 시간과 감정적 연대가 필요하다. 이유 없이 우는 아이를 밤새 달래고, 먹여주고, 안아주고, 그저 숨 쉬는 것만으로도 존재를 지지하는 시간들이 필요하다. 그 사랑을 받은 아이는 마음속에 이렇게 새긴다.
이런 정서 기억은 씨앗처럼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삶을 견디는 힘이 된다. 심리학에서는 이걸 애착 기반으로 이해한다. 즉, 인간의 모성애는 단순한 보호 본능이 아니라, 타인과 살아가는 세상에 긍정적 정서를 뿌리내리게 하는 힘이 된다.
우리가 흔히 듣는 자존감, 관계, 정서 조절력의 뿌리는 모두 바로 그 ‘애착된 경험’에서 자라난다.
'좋은 엄마가 되고 싶은데, 자꾸 부족하다고 느껴요'라고 많은 양육자들이 말한다. 아이들 더 잘 키우고 싶고, 기능하도록 알려주고 싶은 본능의 마음들 사이에 깊은 사랑이 자리 잡고 있다. 내가 자라 낸 환경보다 더 나은 조건을 제공하고 싶은 마음은 참으로 자연스러운 욕구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마음이 커질수록 사랑이 과대하게 되고, 양육자인 나 자신을 더 자주 탓하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 기억해야 한다. 좋은 부모는 완벽한 부모가 아니라, 실수한 후에도 다시 다가가는 부모라는 것을 말이다. 아이들은 부모의 잘못이나 실수에 민감한 것이 아니라, 그것에 어떻게 반응하고 조율해 가는지에 더 민감한 태도로 보고 습하게 된다. 정서적 조율(emotional attunement)이란, 늘 정확하게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연결하려는 시도' 그 자체이다.
꼭 부모나 양육자가 된 경험이 아니라도 당신이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눈빛 하나에 마음을 읽고, 조용히 위로를 건낸 적이 있다면 당신은 이미 ‘모성’을 나눈 적이 있는 것이다. 또 모성애는 성별이나 관계에 한정된 개념이 아닌 것 같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애착 형성’은 양육자라면 누구든 가질 수 있는 반응이다. 아이를 키우는 조부모, 입양 부모, 때론 형제자매 가족이 아닌 돌봄 종사자와도 이 감정을 경험한다.
나는 모래놀이상담을 통해 베이비박스에 유기되어 시설에서 자란 아이들을 상담실에서 만나기도 한다. 어쩌면 처음부터 큰 박탈감을 경험하고 자라난 아이들로 추측하고 우려의 눈길을 보내게 된다. 실제 아이들은 불신감과 불안을 드러내며, 적응에 어려움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주어진 삶 속에서 살아내며 주고받은 온기, 돌봄의 시간들에 대한 믿음이 있다. 그 결과 그들의 마음속에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모래로 만든 자기 세상 속에서 스스로를 구하기도 하고, 작은 피규어 하나에도 정성을 쏟는 그 모습을 보면 충분한 가능성의 씨앗을 본다. 그러면서 나에게 내미는 자신들 편지, 종이로 만든 작품, 자랑하고 싶어 하는 무엇인가를 받아들일 때, '아, 참 다행이다, 아이의 마음의 반짝이는구나!' 하는 감사함이 찾아온다.
아이들에게 직접 표현해주기도 한다. 너의 부모가 어떤 사정이 있어서 이든, 너를 생명으로 지켜내고 안전한 곳에 돌봄 받을 수 있게 조치를 취한 것임을 또, 부모라는 형태 외에도 다양한 사회적 지지체계, 공동체는 존재하고 그 안에서 많은 어른들을 너를 지켜내기 위해 사랑의 마음으로 품었음을 말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자원을 함께 찾아갈 때 그 자원은 회복력의 토대가 된다는 것을 경험한다.
모성애는 본능이나 유전이 아니라 기억되는 감정이고, 지속되는 따뜻함인 것 같다.
“저 엄마는 모성이 없어 보여요.”
그 말속에는 종종 이런 뉘앙스가 담긴다.
+ 아이에게 정서적 반응을 잘 못 해주는 사람
+ 돌봄에 적극적이지 않은 사람
+ 냉정하거나 거리감 있어 보이는 사람
하지만 상담자의 시선으로 보면, 그녀는 모성이 결핍된 존재라기보다, 모성의 감정을 표현하거나 연결하기 어려운 상태에 있는 경우가 많다. 받아본 적이 없는 감정을 타인에게 표현하기는 정말 어렵다. 또 겉보기에 냉정하고 무심한 사람의 깊은 내면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패막이를 들고 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모성과 관련된 감정은 너무 깊고, 무력감을 동반하는 감정일 수 있기에 ‘애써 모른 척’하거나 ‘돌보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보호하려는 마음일 수 있다. 이런 경우 '모성이 없다'는 말보다, '회복이 필요하다'는 말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또 모성애는 꼭 부드럽고, 감성 가득한 방식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어떤 이는 구체적인 행동을 하고 어떤 이는 거리를 둔 채 자기 책임을 다함으로써 모성을 표현하기도 하는 것이다. 내가 혹은 많은 이들이 기대하는 방식으로만 누군가의 모성을 평가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모성이 보이지 않는 그나 그녀도 사실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어디에선가 마음을 내어주고 있었을지 모른다. 무엇인가를 돌보고 있는 행위 그 자체말이다. 그 대상이 아이든, 반려동물이든, 힘들어하는 동료이든 누군가를 돌보거나 그것의 내면을 지지한다면 이미 모성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한밤 중에 친구의 전화를 기꺼이 받아주고,
아이에게 화낸 후 다시 안아주기도 하고
상처받는 동료에게 따뜻한 밥 한 끼 함께 하며 말이다.
다정함으로 표현되는 그 모성의 언어가 누군가에게는 또 다시 모성으로 다가가 세상을 견디는 힘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 글이 당신안의 모성을 발견하고
다정함을 전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누군가에게 받은 온기를 떠올리며
상처 받은 치유자로 더 단단히 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