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살아야 했던’ 당신을 위하여
“그냥 내가 하는 게 편해요.”
“도와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요.”
“내가 안 챙기면 안 될 것 같아요.”
이런 말, 자주 하시나요?
“그냥 내가 하는 게 편해.”
“부탁하느니 내가 하지 뭐.”
“내가 안 하면, 일이 엉망이 돼.”
누군가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라 하고,
누군가는 ‘믿음직스럽다’며 칭찬하기도 할 테죠.
하지만 정작 당신의 마음은 어떤가요?
어깨에 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느낌,
도움을 받아도 안심되지 않는 마음은 아닌지요.
그리고 마음속 더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이런 생각…
별생각 없이 흘려보내는 말 같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안엔 참 많은 마음이 담겨 있는 것 같아요. 저 역시 그런 말들을 해왔고, 사실은 아직도 그런 삶의 방식을 완전히 놓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해를 하지 못하고, 오해를 하는 주변인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욕심 많은 사람’이 아니고 ‘모든 걸 통제하려는 사람’도 아닙니다. 어쩌면 오히려, 그렇게 살아야만 했던 사람입니다.
혹시 나도 모르게 너무 오래 버텨온 건 아닐까요?
‘편하다’는 말에 숨어 있는 또 다른 감정
[내가 다 하면 편하다]는 말,
어쩌면 진짜 편안하다는 뜻이라기보다,
예상되는 ‘불편한 일을 피할 수 있어서 덜 힘들다’는 의미로 들리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맡겼다가 일이 어그러진 기억, 도움을 청했다가 돌아온 무심한 반응… 그런 경험들이 쌓이다 보면 '그냥 내가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자연스럽죠. 그 말 뒤에는 어쩌면 이런 속마음이 숨어 있을지도 몰라요. 내가 놓으면 무너질까 봐, 기대했다가 또 실망할까 봐, 어쩌면… 아무도 정말로 내 마음을 모르니까
상담장면에서 ‘내가 다 해야 마음이 편하다’는 말을 하는 분들, 자녀 양육이나 잡안일 하나하나 그 누구도 만족스럽지 못하고 불편하다는 분들을 깊게 만나다 보면 어릴 적부터 책임을 일찍 떠맡은 경험이 있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
감정을 조심하고 눈치를 먼저 읽어야 했던 관계 속에서, ’네가 좀 참아야지, 나라도 하고 말아야지 ‘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내면화했던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 익숙해진 거죠. 그래서인지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해요.
‘전 그냥 원래 그런 사람이에요'
하지만 이야기를 더 나누다 보면, 그게 원래 성격이라기보다 익숙해진 생존 방식이라는 걸 알아차리게 됩니다. 마음의 기원을 따라가다 보면 내담자도 저도 금방 알아차리게 됩니다.
늘 예민한 가족 분위기 속에서 먼저 눈치 보고 움직여야 했던 아이/ 울고 싶어도 참아야 했던 형제 중 ‘괜찮은 쪽’/ 실망한 어른들 대신 관계를 봉합하려 애쓴 중재자/ 스스로 감정을 정리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자라야 했던 아이
그렇게 살아야만 했던 시절이 있었던 나는
일찍 성숙한 아이, 조용한 어른이 되어 있음을요.
어쩌면 그저 성숙한 게 아니라, 빠르게 생존한 것이라 표현해 볼 수 있습니다.
나를 지켜준 조용한 생존 전략
때로는 통제를 통해 안정을 느끼고, 사람을 믿기보다 혼자 감당하는 게 익숙할 수 있습니다. 도움을 받는 일이 어색하고, 부탁을 하면 민폐처럼 느껴질 때도 있죠. 이런 감정은 그 자체로 ‘문제’가 아니라, 나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마음의 구조일 수 있어요. 그 마음의 구조가 나를 어떻게 지켜주었을까요?
+ 통제: 내 손안에 있어야 안심
예측할 수 없는 환경에서 자란 아이는 스스로 통제권을 가져야 덜 불안합니다. 무엇인가라도 내가 해야 존재가 증명되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남에게 맡기기보다는 혼자 감당하고 조율하고 결정하는 방식을 선택하고 버티게 됩니다. 이건 단지 성격 문제가 아니라, 불안을 조절하기 위한 무의식적인 생존전략입니다.
+ 불신: 기대해 봤자, 실망만 남기에
누군가에게 기대했다가 돌아온 건 실망인 경험이 반복되는 경우입니다. 그 실망은 무의식 속에 쌓이고 쌓여 ‘도움받으면 상처받는다’는 신념으로 마음 깊이 자리 잡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것보다 혼자 하는 게 더 정서적으로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 자기 이상화: 나는 약하면 안 되는 사람
어릴 적부터 ‘착한 아이’, ‘잘하는 사람’, ‘든든한 존재’로 살아온 사람은 자신을 '자기에게 기대되는 역할'과 동일시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이상적인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에게 ‘쉬는 것’, ‘기대는 것’, ‘실수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흔드는 일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그래서 무너질까 봐 더 버티고, 감정을 들키기 싫어 더 완벽해지려 합니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이런 외침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도 쉬고 싶어요.”
“누가 좀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나도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요.”
이런 내 마음속 구조는 나를 오래도록 버티게 해 준 고마운 전략입니다. 지금의 나를 존재하게 한, 또 여기기까지 오게 한 힘일 테지요. 다만, 이 글의 제목에 이끌리고, 멈칫함이 생겼다면 스스로에게 한 가지 질문은 던져볼 수 있을 것 같아요.
“혹시 이제는 조금 지쳐 있는 건 아닐까?”
당신은 정말 편하기만 한가요?
내가 아니라 내 주변이 편한 건 아닌지 떠올려 보세요. ‘다 잘하니까 맡기게 돼, 그 사람한테 맡기면 확실해, 말 안 해도 척척해내는 사람이라 정말 편해, 어떻게 저렇게 열심히 살까, 존경스러워 ‘ 주변에서는 이런 마음으로 믿음을 갖고 점점 기대를 하게 되고, 누군가는 의존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칭찬과 의존은 시간이 지나며 익숙함과 당연함으로 변화됩니다. ‘당연히 해줄 거라 생각했어, 항상 해왔잖아, 그게 너 스타일이잖아, 그건 네가 좋아서 하는 줄 알았어.’ 도움과 헌신이 당연시되기 시작하면, 간혹 서운함에서 시작되어 존중받지 못함, 무시당함 더 나아가 고립감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더 큰 어려움은 주변 사람들이 당신에게 이런 감정이 있다는 걸 모른다는 겁니다. 나는 점점 지치고 감정이 고갈되었을 때, 문득 폭발하듯 말하거나 거리를 두기를 선택하게 됩니다. 주변 사람들은 이렇게 반응할 수 있어요. ‘왜 갑자기 화를 내? 그 정도로 힘들었으면 미리 말하지 그랬어 ‘
이쯤 되면 가까운 관계는 균열이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상대방은 그동안 이 사람이 지쳐가는 걸 못 봤고, 당신은 오랜 시간 외면당해 왔다고 느끼기 때문이에요. 늦게 터진 감정은 또다시 이해받지 못하게 됩니다.
지금 이 글이 어떻게 느껴지시나요?
결국, 듣고 싶었던 말은…
‘항상 고맙다는 말을 못 했네
이젠 네가 혼자 다 하지 않아도 돼 ‘이었을 텐데요.
이런 글을 읽으며 마음이 동하는 분들이 있다면,
스스로에게도 이런 질문을 던져 보세요.
• 나는 언제부터 ‘내가 해야 안심이 된다’고
느끼기 시작했을까?
• 그렇게 살아오면서,
나는 무엇을 지켜내려고 했을까?
• 누구에게 기대는 걸 어려워했던 기억이 있을까?
• 지금의 나는,
어떤 방식으로 더 편해지고 싶은 걸까?
이 질문에 선뜻 답이 떠오르지 않아도 괜찮아요.
조금씩 들여다보며 찾아가면 됩니다.
‘내가 그 역할을 놓으면 나란 사람이 사라질까 봐.’ 깊은 마움 속애서 무언가 내려놓기를 진정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이 변화는 ‘무언가를 버리는 일’이 아니라, 잃어버린 자신을 되찾는 회복의 여정으로 존중되어야 할 것입니다. 누군가 쉽게 내려놓으라, 너 아니어도 세상은 돌아간다는 말은 더더욱 당신의 마음을 닫게 할지도 모릅니다.
내가 회복을 결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을 존중하는 일
+ 거절당해도 괜찮다는 감각을 다시 회복하는 일
+ 일이 아닌 존재로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신념을 새로 만드는 일
‘내가 다 해야 한다’는 말속엔 참 많은 외로움과 슬픔이 숨어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당신은 더 이상 혼자 감당해야 할 사람이 아니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임을 기억해 주세요.
꼭 혼자 다 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혹시 당신이 지금껏 모든 걸 스스로 감당해 왔다면, 그건 분명 강함의 증거이자 애씀의 흔적일 거예요. 지금까지의 당신은 그 방식으로 살아내느라 정말 애썼고, 이제는 그 방식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조금씩 쉬어도 됩니다.
조금 느슨해져도 괜찮고
부탁해도 괜찮습니다.
조금 덜 완벽해도, 여전히 충분한 사람입니다.
이 글을 읽은 지금
누구보다 나 자신에게 다정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