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밖은 위험해
나는 아직까지 부모님과 같이 살고 있다.
아무리 부모님 집이라도 공짜로 먹고 자는 데는 응당 대가가 따르는 법.
재활용 쓰레기 버리기와 화장실 청소가 내 담당이다.
화장실 청소는 그렇다 쳐도, 재활용 쓰레기 버리는 것은 정말 고역이다.
왜냐고? 집 밖으로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집순이, 집돌이들은 알겠지만, 이불 밖은 위험하다.
더군다나 나에겐 바깥세상이 더더욱 불편하고 위험천만한데, 당연히 가발 때문이다.
몇 가닥 없는 내 머리카락을 클립으로 고정시키는데, 행여나 바람에 날아갈까 최선을 다해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클립 안으로 꾸겨 넣는다.
자꾸 자극을 주다 보니 그 부위는 상처가 나기 마련이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머리카락이 더 잘 나지 않는다(이런 눈물나는 악순환이라니!).
그래서 집에 있을 때는 최대한 머리카락과 두피를 쉬게 두는 편이다.
그런데 밖으로 나가야 한다면? 맨머리로 나갈 수 없지 않은가?
나만 보면 ‘아구, 이쁘다’ 하며 웃어주시는 아래층 할머니를 놀라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한 아파트에서 15년 가까이 살다 보니 아무래도 눈인사라도 주고받는 이웃들이 많이 생긴다.
아이들도 얼마나 인사를 잘하는지 입 꾹 다물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리는 내 자신이 부끄러워질 정도다.
이뿐만 아니다. 매일 강아지 산책시키는 아주머니(아, 강아지도 날 보면 꼬리를 흔든다), 관리사무소 직원 분들을 비롯하여 자주 가는 세탁소 사장님, 약국의 약사 아저씨 등등 서로 다 알고 지내는 이웃들이다.
이웃끼리 따뜻하게 인사를 주고받는 것만큼 따뜻한 게 어디 있는가. 나도 물론 좋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들에게 숏컷이었다가 긴머리로 갑자기 바뀐 나의 헤어스타일에 대해 자초지종 설명하고 싶지 않을뿐.
그래서 가발 없이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는 것은 큰 결심이 필요하다.
내가 터득한 꿀팁을 소개한다.
첫째. 복도 창문 밖으로 분리수거 장소에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지 세어본다.
둘째. 없을 경우, 엘리베이터가 움직임을 다 멈출 때까지 기다린다.
셋째. 숨 죽이고 인기척을 느껴본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으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다.
넷째. 재빠르게 분리수거 완료!
적어놓고 보니 거의 첩보작전 수준이다. 하지만 아무리 신경을 쓴다하여도,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는 법.
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순간 갑자기 들어오는 이웃을 마주한다면 그날은 실패인 것이다.
결국 정답은 후드다. 나는 늘 커다란 후드를 뒤집어쓰고 다닌다. 원천봉쇄!
그 밖에도 아예 다른 사람인 척하기(상대방이 속을 확률이 과연 몇 퍼센트일까?)와 가게별 방문 기록해 놓기. 예를 들어 [A세탁소: 가발 쓰고 다녀옴, B세탁소: 모자 쓰고 다녀옴]라고 적어 놓는다. 세탁 맡길 때 숏컷이였던 사람이 2-3일 사이에 긴 머리로 세탁물을 찾아가면 아무래도 이상할 테니까. 등등이 있다.
글로 적어놓고 보니 편집광 같아서 글을 얼른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