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세상을 구할줄 알았다
장래희망칸을 채우는 일은 자주 설렜다. 주변을 깨끗하게 하는 환경미화원 일때도, 사회를 고발하는 기자 일때도, 첨단기술로 애국(?)하는 과학자 일때도, UN이나 OECD에 들어가서 변화를 만드는 사회학자 일때도. 내가 무엇이 되어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상상을 하면 마음이 간지럽다 못해 쿵쿵 뛰기도 했다. 꿈으로 벅차던 때였다. 하나의 전문직업을 그리며.
작가 프레모레비 책에서 개념을 빌려보면 이를 ‘멍키스패너’라고 부를 수 있다. 동명의 책은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조립공 파우소네의 이야기이다.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것은 (불행히도 그것은 소수의 특권이다) 자신의 행복에 구체적으로 가장 훌륭하게 다가가는 것이 된다.”
멍키스패너는 일에 대한 사랑과 자유로운 삶을 상징한다. 반면 현실의 다수는 ‘비스킷’이 된다. 작가 알랭드 보통은 ‘일의 슬픔과 기쁨’을 탐구하려 했다. 그는 식량 창고, 비스킷 공장, 회계사 사무실 등에 찾아가 그 직업을 가진 사람들과 일과를 함께 한다. 그리고 관찰한다. 그 중 비스킷 공장에서 유독, 의미없는 노동에 대한 씁쓸함을 발견한다.
“비스킷의 생산과 마케팅은 사실 그것(비스킷)이 덜어준다고 주장하는 공허감과 신경의 긴장을 오히려 조장하는 것은 아닐까? (…) 진짜 문제는 비스킷을 굽는 것이 의미가 있느냐가 아니라, 그 일이 5천명의 삶과 6개의 제조 현장으로 계속 확장되고 분화된 뒤에도 여전히 의미있게 여겨지느냐 하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 가까이엔 비스킷이 많고 멀리엔 멍키스패너가 많아 보일 것이다. “일하러 가는 아침이 즐겁다”는 사람은 주변에 별로 없는 반면, TV에 나오는 사람들은 “가슴 뛰는 일을 하라”고들 한다. 비스킷 라인에 서서 초콜릿 덩어리를 심지만, 멍키스패너를 휘두룰 나날을 꿈꾸는 나는, 한동안 그 괴리감에 절망했었다. 어떻게 되는 지는 모르겠지만, 뭐가 되기 위해 내가 가진 것을 세어보면 한없이 가난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직업 그리고 일에 의미를 찾는 여정을 시작하며, 과거에 대한 원망이나 안될 거라는 냉소를 내려 놓기로 했다. (실은 아직도 연습 중이다.) 이를 위해 알아야 할 점은, 비스킷 공장에 간 것은 꼭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멍키스패너는 꼭 하나의 직업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날의 보통 사람은 상당한 재미와 쾌락을 맛보고 있음에도 우울과 권태를 느낀다. (…) 자본주의 안에서 인간은 필연적으로 불안, 우울, 권태 그리고 허무를 겪는다.”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건강한 인간을 만드는 특정 사회 모습이 있다고 보았다. 다섯가지로 인간이 가진 욕구를 정리해 볼 수 있는데, 이 욕구가 긍정적으로 충족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고, 그 방식이 사회의 지배적 ·대표적 충족 방식일 때 그 사회는 건전하다. 욕구를 조합해 정리해 보면 이렇다. 자기가 합리적이라고 믿는 방향/의미로 나아가기. 타인 혹은 관계에 일체감과 고착감을 느끼기. 목적을 갖고 자유로이 창조하는 활동을 하기. 그래서 원하지도 않았는데 세상에 내던져진 자신의 운명에 대한 피동성을 초월하기.
프롬의 분석을 참고하면, 자본주의는 병든 인간을 생산한다. 생산수단을 일부 개인이 가져 생기는 고용형태와 시장에 휩쓸리는 불안정성 때문이다. 다수의 사람들은 시간을 지불하고 고용되어 생존을 이어간다. 스스로 믿는 방향 보다는 고용주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야한다. 주체적인 방향을 정하고 나아간다는 느낌을 상실한다. 자영업을 한다고 해도 시장의 흐름에 내던져진다. 방향을 정하고 나아가는 인간보다는, 불안한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내는 인간들이 만들어진다.
더욱이, 일자리는 이윤 창출을 위해 존재한다. 이익이라는 목표는 인간에게 ‘행동의 방향이 옮다’는 충만감을 주기 어렵다. 돈은 교환을 위한 도구이지 지향점 즉, 그 자체가 의미를 부여하는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돈 때문에 일을 하지만, 매일 노동의 결과물에 ‘내 일부’라는 일체감 이나 과정에서의 ‘옳다, 의미 있다’는 관계성을 느끼지 못한다.이렇게 ‘행위와 목적, 의미 방향이 행위자로부터 분리된 상태’를 소외라고 한다. 열심히 살지만 그 과정과 결과물에 소외된 우리는 우울하고 허무해진다.
매일 아침 출근 전 30분 그리고 주말에 글을 쓴다. 친구가 “뭐하니”라고 물으면 “집필 좀 하고 있다”고 대답한다. 메일로 인터뷰이들과 연락 할 때는 “인터뷰 집을 발간 중인 OOO 입니다”라고 쓴다. 하지만 이럴 때 불쑥 누군가 말한다. ‘웃기시네. 집필이라고? 너가 무슨 작가로 등단 했니?’ 혹은 ‘정식 매체의 기자도 아닌데 왠 인터뷰 요청서? 거창도 하셔라.’ 이렇게 비꼬는 사람은 바로, 내 자신이다. 이 일로 돈을 벌고 있지 않으니까, 편집자로서 사회적 인정을 받지 못하니까, 내 스스로도 글쓰고 책 만드는 일을 ‘내 일’로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왜 그럴까? 우리는 누군가를 처음 만나면 “어디 다니세요?” 혹은 “뭐 하세요?”라고 물으며, 한 개의 직장 혹은 직업을 기대한다. 일이 곧 그 사람을 설명해 준다고 믿으며, 하나의 직업이자 직장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개 직업/직장은 그 사람이 무엇을 궁금해하고, 잘하고 싶어하고, 열정이 있는지를 말해주지 못한다. 직업이란 그 사람이 어떤 노동을 하는 지를, 직장이란 연봉이나 몸 담고 있는 분야만 알려줄 뿐이다.
‘일은 한 개이며, 다니는 직장에 국한되며, 생계를 꾸리는 주 수단이며, 사회적 인정을 받는 것’이라는 좁은 정의는 다양한 열정과 재능의 숨을 죽인다. 직업/직장이 되지 않은 것들은 ‘내 정체성’이기 보단 ‘별거 아닌 것’이 되는데, 이는 다양한 관심사를 지속적으로 개발하는 데 심리적 장애물이 된다.
TED 강연자 Emily Webnick은 우리가 스페셜리스트를 심히 낭만화 하는 사회에 산다고 지적한다. 이는 자신의 다양한 관심사를 ‘산만하다’, ‘전문적이지 못해 아무것도 안 될 것이다’라고 평가절하 하게 한다. 덧붙여, 그녀는 전문 직종을 많이 보여주지만 N잡러를 보여주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하나의 직업에 가두는 경향을 포착한다. 그러면서 다양한 관심사에 대한 죄책감을 내려놓고, 본인의 여러 열정을 품으라고 조언한다. Embrace your many passion!
제현주씨의 책에는 만화가 김성희씨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녀는 만화로 돈을 벌기는 어려워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렇다고 그녀 스스로 만화는 취미일 뿐이라 여기진 않을 것이다. 나도 그녀에게 만화가라는 정체성을 부여하는데, 이 관대한 일의 관념을 내게도 적용하기로 했고, 더욱 본격적으로 집필을 해 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