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남자가 미팅룸으로 들어왔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가 “잠깐 보고 있으세요.”라며 내게 두꺼운 노트북을 건네주고 나갔다. 입사 첫날이라 해야 할 일도 없고, 딱히 시선 둘 곳도 없었는데 잘됐다 싶었다. 우두커니 앉아있는 나를 배려해 주는 것 같아 은근히 고맙기까지 했다. 무심코 열어본 컴퓨터 바탕화면은 영화 속 한 장면을 캡처한 사진이었다. 해리포터 시리즈 등장인물 중 하나였다. 쭈글쭈글하고 귀가 뾰족한 집요정, 도비. 아래쪽에는 ‘도비는 자유예요.’라는 자막이 쓰여있었다.
‘뭐야, 기이한 사진이네. 근데 회사에서 이런 이미지로 해둬도 되나?’
어쩐지 의아했지만 아이콘으로 시선이 옮겨갔다. 전임자 이름으로 보이는 폴더를 클릭했다. 퇴사 후 새 직장으로 환승 이직한 그의 유일한 흔적. 가장 먼저 연도별로 정리된 폴더가 나왔다. 최근 연도를 들어가 보니, 업무별 폴더가 우후죽순 튀어나왔다. 그 속에는 엑셀, 한글, 프레젠테이션 파일이 뒤죽박죽 섞여있었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처럼 무제한 확장되는 자료를 보다가 그만 아득해졌다. 척 보고 바로 이해할 수 있는 내용도 아니었다.
차근차근 배워가 보자고, 할 수 있다고 마음을 고쳐먹는 찰나 40대 중후반 즈음으로 보이는 남자가 들어왔다. 오늘은 직무 교육을 한다고 했다. 주요 생산품은 신발에 들어가는 원단이었는데 제조 공정부터 설명하기 시작했다. 시간을 들여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나누어 주는 게 얼마나 값지고 감사한 일인지 알기에 집중력을 최대로 그러모았다. 하지만 암호 같은 전문용어와 관심 밖인 분야의 스토리가 자꾸만 정신을 흐트러놓았다. 이야기는 과거 빛바랜 성과와 그래서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 인가로 점점 변질되어 갔다. 벌써 2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아까 잠깐 열어봤던 폴더 속 업무에 관한 실마리는 전혀 얻지 못했다. 명목상 직무 교육은 허무하게 끝이 났다.
젊은 남자가 다시 들어왔다. 어딘가 신나 보였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가져온 노트북을 케이블에 꽂았다. 프로젝터에 띄워진 화면이 차츰 선명해지더니, ‘근태관리 시스템’이라는 창이 보였다. 각 팀에서 한 명씩 출퇴근 기록을 관리하고, 매달 마감하여 인사팀에 보내주는 업무라고 했다. 직무와 무관한 일이라 다들 피해서 어쩔 수 없이 팀 막내에게 던져졌다고 했다. 정문에서 출입 카드를 찍으면 연동된 시스템에 기록되는데 종종 오류가 나거나, 누락되는 경우가 있어 수기로 입력해줘야 하는 일이다. 설명은 간단했지만 품이 꽤 드는 일이었다. 우리 파트는 4명뿐이지만 특이하게 현장 인원까지 30명을 도맡아야 했다. 변수가 늘어났다. 3조 2교대라 근무시간이 다르고 조출, 특근, 대휴 등 복잡한 요소가 헷갈리게 만들었다. 근무자에게 연락받을 때마다 크로스 체크를 위해 시스템에 접속하다 보니, 업무 흐름이 깨지기 일쑤였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하는 단골 멘트가 있었다.
‘엇, 나 방금 뭐 하려고 했지?’
긴급하고 중요한 환경 업무가 남아있는데 근태 마감 때문에 야근하는 날에는 딜레마에 빠졌다. 근무시간은 월급과 직결되어 소홀히 했다간 민원 전화가 폭주하고, 재정산을 위한 협조전을 올리고, 다음 달 근태 데이터까지 영향이 갈 터였다. 젊은 남자가 왜 오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성가시고 귀찮은 일을 덜어낸 자의 홀가분한 표정이었던 것이다. 수많은 직장에서 막내는 하찮고 번거로운 업무를 떠안게 될 표적인 것이다.
어찌하겠는가. 그것이 룰이라면 지킬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다만 인수인계받은 시점 이후부터 가르침은 더 이상 받을 수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고통이 시작된다. 한 번만에 완전히 이해하기란 한계가 있고, 하다 보면 예기치 못한 이슈가 발생한다. 그러나 일에서 손을 뗀 자는 관심도 거둬진다. 전임자를 붙잡고 물어봐도 허탈한 대답만 돌아올 뿐이다.
“저도 잘 몰라요. 그건 그 팀 담당자한테 물어보는 게 나으실 거예요.”
남 일이라고 생각하니, 굳이 나서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해결책을 알고 있었다 해도 일을 넘긴 순간부터 잊어버렸을 터이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부지런한 뇌는 필요 없는 정보를 주기적으로 지운다. 사실 해야할 이유를 찾지 못한 채 억지로 떠맡아온 일에 깊은 고민이 깃들어있을 리도 만무하다. 본인이 담당했던 시기에 겪어보지 못한 문제라 진짜로 모를 수도 있다. 그리고 일일이 신경 쓸 시간도 없이 바삐 돌아가는 회사생활이다. 자신의 일을 쳐내기도 급급하다. 후임자가 처한 곤경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말이다. <세이노의 가르침>에서 저자는 말했다. “전쟁터에서 휴머니즘을 찾으면 당신이 죽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다. 회사는 학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조곤조곤 자상하게 가르쳐줄 사수, 일인분을 해낼 때까지 인내심 있게 기다려줄 상사는 없다. 기댈 곳은 전임자의 폴더와 협력업체 담당자, 유관부서 담당자, 공무원 등 서류 접수처이다. 교과서처럼 기초부터 심화까지 차례대로 배울 수 있는 여건도 아니다. 지금 당장 닥친 일이 우선순위가 된다. 왜 하는지 모르겠지만 하나씩 해내다 보면 퍼즐처럼 맞춰지는 날이 온다. 허가증에 적혀있는 숫자들이 어디서 나왔는지 근거를 몰라도 수수께끼 맞추듯 과거 자료를 뒤지다 보면 답이 있다. 멘땅에 헤딩하면 아프다. 길을 돌아가면 힘들다. 그런데 아프고 힘들게 얻은 지식과 경험은 평생 잊히지 않는다. 온전히 내 자산이 되는 것이다. 더럽고 치사하고 억울한 순간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똑같은 오피스 빌런으로 퇴화하지 않으려면 부정적인 감정에 빠져있지 않길 바란다. 스스로 찾아보고 이룩한 성과들이 언젠가 회사 밖에서 내 사업을 할 때 든든한 밑거름이 되어줄 테니까.
- 저의 연재를 응원하신다면 구독해 주세요 :)
- 인스타그램 : @reader_j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