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읽지현 Aug 19. 2023

나도 몰랐던 나

밤새 이불속을 뒤척였다. 어젯밤 회식 자리의 잔상이 끊임없이 되풀이되었기 때문이다. 기숙사 옆 방 언니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도. 더 이상 침묵하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어디에도 말 못 하고 혼자 끙끙 앓아왔던 지난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견디기 어려운 수모를 내 선에서 끊어내고 싶었다. 2차 피해를 막아야 했다. 직급을 이용한 업무보복, 구설수를 예감하면 벌써 피로해졌지만 말이다.


'오늘은 기필코 말하자. 증언해 주겠다는 사람도 많이 있잖아.’


화장대 거울에 비친 내 눈에 긴장감이 서려있었다. 쿵쿵 뛰는 심장을 심호흡으로 애써 누르며 출근길에 나섰다. 그날따라 현관문이 쇳덩이처럼 무거운 건 기분 탓이었을까. 사무실을 쓱 둘러보며 팀장님 안색을 살폈다.


'언제가 좋을까?’


다행히 아침부터 긴급 보고 건으로 찾아온 사람은 없었다. 준비한 말을 당장 쏟아내지 않고서는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을 지경이어서 몸을 일으켜 뚜벅뚜벅 걸어갔다.


"저... 팀장님, 혹시 잠깐 시간 되실까요?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회의실로 들어가는 동안 누구도 고개 들어 쳐다보지 않았지만 동료들의 신경이 온통 나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약간의 수군거림도 들려왔다. 눈치로 먹고사는 직장인이 평소와 다른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꼈으리라. 회의실 문이 딸칵하고 잠겼다.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억눌러 뒀던 말을 처음 입 밖으로 꺼내려하니, 눈물부터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낮고 긴 숨을 몰아쉰 후, 최대한 감정을 배제한 채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사실 제 옆자리에 계신 차장님이 불편합니다. 처음엔 '내가 예민한 건가?’ 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어제 회식 때 차장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저의 문제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뉴스에 나오는 범죄자들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나는 이해가 돼.”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동안의 성적인 말과 행동이 고의였음을 인정한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제 함께 들었던 남자 동료들도 지나친 언행을 지적했고요. 제가 입사하기 전 수년간 비슷한 사례가 반복되어 왔다는 사실도 확인했습니다.”


적잖이 놀란 팀장은 윗선에 즉시 보고할 테니, 모든 일을 빠짐없이 말해달라 요청했다. 받아 적은 수첩은 검은 글씨로 금세 빽빽해졌다. 기억을 되짚는 과정이 고통스러웠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불쾌감을 주었던 불필요한 스킨십, 수치스러운 술시중 강요, 만일을 염두에 둔 듯한 가스라이팅... 지난했던 과거에 비해 보고는 속전속결로 진행되어 사건이 인사팀에서 본사 윤리경영팀으로 접수되었다.


협력사인 외국 기업의 경영방침을 따랐기에 대응 방식은 꽤 앞서가는 편이었다. 회사는 곧바로 차장을 격리시켰고, 나에게 휴가를 권유했다. 사내 노무 담당자가 괜찮다면 집까지 바래다주겠다고 물어왔다. 한 고비를 넘겨 온몸에 힘이 풀리기도 했고, 왠지 내게 따로 할 말이 있어 보여 승낙했다. 그는 일이 일사천리로 처리될 수 있도록 발 벗고 나서준 사람이었다. 고마운 마음을 표현했다가 예상치 못한 질문이 되돌아왔다.


“과장님, 많은 도움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죠? 먼저 공론화시키기 어려웠을 텐데 어떤 마음에서 용기 낼 수 있으셨는지 여쭤보고 싶었어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나는 답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침묵하면 안 된다고 언제부터인지 직감했어요. 수치와 분노, 자책과 갈등으로 힘든 시간이었지만 저로서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2, 3차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막아내서 조금 더 나은 세상이 되길 바랐어요. 딸을 낳아도 불안하지 않은 세상이요.”

“정의로운 분이시네요. 그래서 제가 최선을 다해 돕고 싶었나 봐요.”


멋진 어른만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이런 말을 할 줄 아는 어른이 되겠다고 결심한 순간이었다. 사람은 자신과 비슷한 사람에게 자석처럼 끌리는 걸까? 주변에 있는 다섯 사람이 곧 내 모습이라는 명언이 있다.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좋은 사람이 곁에 하나 둘 모이다 보면 마침내 좋은 세상이 될 테니까. 몇 주만에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서로를 응원하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미소를 완전히 되찾지는 못했다. 사내 인트라넷에 해고 공지가 올라오기 전까지 말이다. 자꾸만 뒤를 돌아다보는 습관이 생겼다. 우리 사무실만 외진 곳에 동떨어져 있었는데 현장을 통과하는 길에 차장이 불쑥 나타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일을 겪은 분에게 들은 말도 일조했다. 그가 갑자기 찾아와 문을 걸어 잠그고, 해고만은 막아달라며 애걸복걸했다는 것이다. 내선전화는 발신번호가 뜨지 않는 기종이었는데 무심코 받았다가 그 사람이었던 적도 있다고 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긴장과 공포는 오랫동안 그림자처럼 따라왔다. 평소 차장과 친분이 두터웠던 측근이 어느 날 내게 다가와 말했다.


“상황이 힘들겠지만 딸린 처자식도 있는데 한 번만 참고 넘어가주면 안 되겠나? 타 부서로 보내는 방법도 있고…”


과한 처사였나 잠깐 혼란스러웠지만 이내 섬뜩해졌다. 차장이 심약한 사람만 공략해 뒤에서 조종을 했던 것이다. 결국 사장님은 단호하게 해고 통보를 내리셨다. 며칠 지나자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모두가 일상으로 돌아갔다.


예상보다 그의 공백은 크지 않았다. 1년 차 실무자인 내가 17년 차 총괄 관리자 없이 할 수 있을까 초조했는데 말이다. 다만 부서 간 업무 협의는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각 팀장 속에서 사원은 나뿐이었다. 매 순간 링 위에서 라이트급이 헤비급과 싸우는 기분이었다. 경력이 많은 사람은 업무의 경중을 판가름할 줄 아는 안목이 있다. 성과가 될 만한 일, 손만 많이 가는 일을 빠르게 구별할 수 있다. 정신 차리고 보면 후자가 나에게 떠넘겨져 있었다. 방패가 없어지자 우리 팀은 동네북이 되었다. 회사 히스토리와 공정을 상대적으로 모르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팀장님은 시시때때로 호출했다. 내가 유일한 실무자였으니까. 혹시라도 즉각 적절한 답을 내놓지 못할까 봐 신경은 늘 곤두서 있었다. 법적 이슈가 터지면 팀장은 발을 동동 구르며 다그치곤 했다.


충분히 예상했고,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 후회하진 않았다. 내가 조금 더 감당할 수 있어 보이는 선택지는 ‘사람’보다 ‘일’이었다. 힘들어도 커리어가 쌓이니까 남는 장사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팀장이 될 텐데 지금부터 누구에게 의존하지 않고 성장하는 법을 연마하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위태로운 매일이었지만 나는 조금씩 강해지고 있었다. 인풋과 아웃풋이 동시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공부해서 바로 실무에 써먹어야 하는 환경이었기에 오히려 성장이 빨랐던 것 같다. 20년 차 팀장님도 모르는 것을 내가 점점 더 많이 알게 되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모르는 걸 내가 알고 있으면 그야말로 대체 불가능한 인력인 거잖아?’


오랜 세월 고군분투한 끝에 내가 성장하는 방향으로 사고하게 되었다. 신입사원일 때는 사수나 상사가 없으면 업무가 마비될 것 같아 덜컥 겁이 날 수 있다. 그러나 믿었던 존재가 알고 보면 성장을 막는 걸림돌이었을 수 있다. 어쩌면 무거운 돌덩이를 치워야 훨훨 날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보다 자신의 날개가 크고 튼튼하다는 걸 자각하면서.




- 저의 연재를 응원하신다면 구독해 주세요 :)

- 인스타그램 : @reader_jh



이전 01화 최초의 여직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