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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지현 Oct 22. 2023

기록만이 살길

2019년 어느 날, 뉴스가 환경 이슈로 뒤덮였다. 전라남도 여수 산업단지에서 기업이 무더기로 적발된 사건 때문이다. 대기오염 방지시설의 오염물질 측정값을 조작한 것이다. 생산설비를 가동하지 않은 채 측정하거나, 측정공이 없는 곳에서 허위로 측정하거나, 측정하지 않고 허위로 값을 기록하거나, 측정대행업체에게 누락, 거짓, 정상측정 방해를 종용하는 등이다. 모두 오염물질 농도가 배출기준치를 초과하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산업단지 근처에 가면 심각한 환경오염을 체감할 수 있다. 탁한 공기는 눈을 뜨고, 숨을 쉬기 어렵게 만든다. 허옇고 누런 입자들이 대기를 가득 메운 채 휘날린다. 고무 타는 듯한 냄새, 각종 화학약품 찌든 내 등으로 매캐하다. 아무래도 발생되는 오염물질량이 가정이나 일상 보다 공장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각 사업장에서 관리를 철저히 한다면 환경 보전에 큰 기여를 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데 마땅히 노력해야 할 기업이 부정적 만행을 일삼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사회가 발칵 뒤집혔다. 단순히 환경 담당자의 근무 태만이라 치부할 수 있을까? 일개 직원이 무책임한 처사를 스스로 행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만에 하나 회사에 앙심을 품고 고의로 문제를 만들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적발된 기업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담당자가 동시에 음흉한 의도를 품었을 리는 없지 않은가. 조금 더 시야를 넓혀 구조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환경관리자로 커리어를 시작하면서 여러 거래처를 만났다. 그중 하나가 대기 자가측정대행업체인데 15년 차 담당 부장이 종종 업계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자리를 뜰 때마다 거듭 주지시켰던 말이 있다.


“전부 기록으로 남겨두세요. 메일이든, 보고서든, 녹음이든 다 좋으니까요.”


지난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상황이 불리해지면 회사가 개인을 버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부장은 실제 목격했던 일을 조심스럽게 꺼내기 시작했다.


“모 사업장에서 있었던 일인데요. 환경 담당자가 평소처럼 대기 집진기를 점검하던 중에 특이사항을 발견했어요. 한 설비에서 집진효율이 거의 나오지 않았던 거죠. 원인은 다양하지만 보통 오염물질을 흡착하는 충진재에 문제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 거든요. 정수기를 예로 들면 불순물을 거르는 필터 있잖아요. 충진재가 같은 역할을 하는데 주기적으로 갈아줘야 해요. 담당자가 사무실로 돌아와 교체 이력을 확인해 봤어요. 그런데 주기가 불규칙하고, 본인이 입사하기 훨씬 오래전에 갈았던 거예요. 의아해서 주변에 수소문하며 히스토리를 알아봤대요. 법적으로 정해진 기준이 없기 때문에 사업장 자체적으로 관리하면 문제없다는 거예요. 논리상 무탈해 보이지만 2가지 허점이 있어요. 상황에 따라 대처했다는 것은 사전 예방이 아니라 사후 조치를 취했다는 뜻이잖아요. 이미 오염농도는 기준치를 초과했는데 충진물 교체 공사가 이후에 이루어졌다는 거예요. 최소 며칠은 걸리는 작업인데 그동안 오염물질이 대기 중에 그대로 배출되고, 자가측정 기록을 허위로 작성하게 되죠. 담당자는 밤에 두 다리 뻗고 못 자는 거예요. 리스크를 온전히 혼자 감수해야 하니까요. 그 사이 환경청에서 불시점검이라도 들어오면 처벌받거든요.”


마냥 남일 같지 않았던 나는 심각해진 표정으로 다급하게 되물었다.


“과거는 어찌할 수 없더라도 담당자가 문제를 알게 된 순간부터라도 바로 잡아가면 되지 않나요? 교체 주기를 조금 타이트하게 잡고, 제때 작업해서 사전에 대비하면서요.”


이어지는 그의 말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누군들 그러고 싶지 않을까요. 그분도 심각성을 파악하고 즉시 팀장에게 보고했어요. 착공을 위한 품의서를 올렸고요. 그런데 예상치 못한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사장이 서명하지 않은 거예요. 지금 적자 실적이 계속되고 있으니, 흑자로 돌아설 때까지 연기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대요. 요즘 너도나도 친환경 기업, ESG 경영을 내세우고 있지만 실상은 환경일을 비용으로 보는 게 회사 입장이에요. 물론 진심으로 투자를 아끼지 않는 기업도 있겠지만요. 영업이나 마케팅 부서는 직접적으로 돈을 벌어다 주는데 환경 팀은 대부분 지출이 필요한 일을 하니까요. 인류상 도덕적으로 중대하고 시급한 일이 후순위로 밀려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법적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정도로만 노력하고, 형식적으로 구색만 맞춰놓자는 인식이 있어요. 예를 들어 업체 규모에 따라 선임해야 하는 환경 관리자 수가 법적으로 정해져 있는데요. 현실적으로 턱없이 부족한 인원인대도 그 이상 채용하지 않는 거예요. 인건비를 최소화하려고요. 그래도 위법은 아니니까요. 절대로 혼자 관리할 수 없는 규모인데 실무자만 죽어나는 겁니다.”


국내 기업 중 환경팀 인원이 두 자리 수인 곳은 손에 꼽을 만큼 드물다. 영세한 소규모 사업장은 사장이 직접 환경일도 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 하나 뽑으면 매출에 직격탄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뿐만 아니라 기업도 난감한 처지다. 입장 차가 있지만 마찬가지로 에러사항을 겪고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길래 이런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을까요?”


답답한 마음에 부장에게 말했다. 나보다 장기간 현안을 고민해 보았을 터였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커지면서 부작용이 터진 게 아닐까 싶어요. 법을 새로 제정할 때 선진국을 따라가곤 하는데요. 효과가 증명된 선례를 참고하는 편이 비교적 안전할 테니까요. 다만 현실적인 여건이 받쳐준다는 전제조건이 필요해요. 최소한 금전적으로 뒷받침해줄 수 있는 제도라도 먼저 마련되어야 하겠죠. 그런데 환경 법은 너무 성급하게 제개정 돼버리는 것 같아요. 정부 기관이 실적을 내야 한다는 압박을 느껴서인지, 지나치게 앞선 의욕 때문인지 모르겠지만요. 사전에 충분히 실정을 파악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일 텐데요. 그래도 한계는 있으니, 사후에 유연한 행정조치를 하거나요. 법적인 잣대만 내세워 처벌하는 강압적인 처사는 역효과를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해요. 거짓말할 수밖에 없고, 숨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는 거죠. 당장은 왜 불가능한 일인지 뜯어보는 자세가 반발심을 불러일으키지 않고, 애꿎은 사람들을 범죄자로 만들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대화를 마치며 부장은 다시 한번 기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환경 개선을 위해 문제를 알렸고, 개선안을 제시했고, 행동을 촉구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서류를 반드시 남겨놓으라는 것이다. 만약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할 경우, 기록이 구제해 줄지도 모른다고. 적어도 힘없는 개인이 죄를 뒤집어쓰는 억울한 상황은 피할 수 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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