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읽지현 Aug 24. 2023

계란으로 바위 치다.

“네가 해라.”


한마디로 끝. 인수인계랄 것도 없었다. 키보드 위로 춤추던 손이 멈췄다. 돌아보니 사수 뒤통수만 보였다. 2주 뒤면 자리에 없을 사람. 대한민국 메이저 3사 중 한 곳에 합격한 것이다. 대형 프로젝트를 무사히 마무리한 시점이었지만 한 고비 넘겼을 뿐 뒷감당할 일이 산더미였다. 남아있는 자가 어떻게든 해내야 할 숙제다. 한동안 나는 얼빠진 사람처럼 벙쪄있었다. 사수가 그동안 어떤 마음고생을 해왔는지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봐 왔기에 숙명처럼 받아들였지만 그늘진 얼굴을 숨길 수는 없었나 보다. 나조차 퇴사하면 팀이 붕괴돼버려서 노심초사하는 분위기였다. 본부장이 인사팀에 채용을 강력하게 요청하여 얼마 후 신입사원 1명, 경력직 1명이 합류했다. 어느덧 송별회 날이 다가왔고, 애써주신 분들을 안심시켜 드려야겠다는 심산으로 말했다.


“사수를 뛰어넘어 보겠습니다!”


패기 넘치는 건배사와 달리 어깨가 많이 무거웠다. 어쩌다 고참이 돼버렸는데 아직 해보지 못한 일 투성이에 팀을 이끌기까지 해야 하는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3년 차였던 나는 중압감을 떨치려 책 <리더를 위한 멘탈 수업>을 들춰보았다. 책은 언제나 변함없는 기댈 구석이었지만 공부로 리더십을 금방 체화할 순 없었다.

 

신입은 열정이 넘쳤지만 직무 경험이 전무해서 일거수일투족 알려주어야 했다. 인계받은 업무를 쳐내랴, 인수해 주랴 우당탕탕하는 나날이었다. 연차가 동일한 경력직은 눈치가 빨랐다. 열심히 하는 자에게 일이 몰린다는 이치라도 전 회사에서 깨우친 모양인지 시종일관 수동적이고, 방어적인 태도였다. 시키는 일만 최소한으로 하고, 신규 프로젝트나 이슈가 생기면 나몰라라 했다. 부동산 투자 대출 건으로 은행에 가봐야 한다며 반차를 밥 먹듯 쓰기도 했다. 여태껏 아랫사람 역할만 해본 사원에게 업무 지시는 어색하고 서툰 일이었다. 방어적인 동료에겐 더 어려웠다.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업무는 정기검사였다. 유해화학물질 취급 설비에 대해 법적 요구 사항을 적용하고, 서면 자료를 꾸려 정부 산하 기관에 검사받는 일이다. 깜깜했다. 내게는 달랑 폴더 하나만 주어졌기 때문이다. 파일을 하나씩 열어보며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수많은 공란들을 어떻게 다 채우지? 어떤 레퍼런스를 찾아봐야 하는 걸까? 처음 들어보는 기계용어는 언제 다 파악하고?’


그래도 아직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질 사수가 있다! 서둘러 방법을 물어보았지만 비수 같은 대답이 날아왔다.


“이걸 아직도 몰라? 와, 너 이제 어떡할래?”


말문이 막혔다. 찰나에 수 만 가지 감정이 뒤죽박죽 엉켰다. 억울하고, 서럽고, 수치스럽고, 분했다.


‘해 본 적도, 가르쳐 준 적도 없는 일인데 당연히 모를 수밖에 없지 않나? 한 번쯤 물어볼 수도 있잖아. 혼자 생각하고 판단하다 일을 그르치면? 후배들 앞에서 꼭 공개적으로 핀잔을 줘야 할까.’


억화심정이 밀려오고, 자존심이 상했다. 그러나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래, 아무리 바빴어도 사수 업무에 관심 가졌어야지. 이제 와서 붙잡아본들 무슨 소용이야. 의존하지 말자. 지금부터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임하자. 스스로 결정하고, 혼자 헤쳐나가자.’


온종일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점심 먹으러 가자는 팀원의 만류도 뿌리쳤다.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모니터를 째려보던 눈에서 구슬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입술을 물어뜯으며 좋은 생각으로 전환해 보았지만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마감을 맞추기는커녕 '부적합'이라는 결과가 나올 것 같았다. 다시 업무에 몰두했다. 현장에 전화를 돌리고, 메일로 서류 양식을 보냈다. 중견기업에선 내가 직접 배관을 타며 서류를 작성할 수 있었지만 대기업에서는 불가능했다. 공장 부지가 30만 평이었기 때문이다. 규모가 클수록 시스템이 필요한 법. 부서별 키맨을 정하고, 총괄 관리와 피드백을 맡았다. 대신 각 부서 담당이 협조해주지 않으면 망한다. 친목을 쌓건 겁을 주건 키맨을 어떻게든 구워삶아야 일이 굴러간다.


생산팀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먼저 인원이 부족해 초과근무를 해야 했다. 그런데 주 52시간 근무제를 따를 수밖에 없어 일이 진척되지 않았다. 한편, 그들에게 환경 업무는 사실상 ‘과업 외 일’이었고, 법적인 리스크는 커서 기피대상이었다. 신입사원에게 던져지는 일이다 보니, 잦은 담당자 변경과 인수인계 부재로 업무 흐름이 매번 끊겨버렸다. 기한 내 회신을 주는 부서가 극히 드물었다. 일부 접수된 자료도 엉터리였다. 검사일이 목전에 다가오자 결국 직접 나야 했다. 설비 도면을 가지고 현장에 갔지만 헛수고였다. 서류와 현장이 불일치하고, 표지조차 붙어있지 않아서 검사 대상 설비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서류라도 완벽히 준비해보려 했지만 작성 근거인 사양서를 구할 수 없었고, 설비 명패도 노후되어 알아볼 수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검사 당일이 되었다. 입술이 바짝바짝 타서 생수병을 내내 붙들고 있었다. 검사관을 차에 태우고 현장으로 갔다. 도면을 짚으며 해당 배관의 위치를 물어왔다. 그러나 생산팀 담당자는 당황한 기색으로 헤매기 시작했다. 공부도 하지 않고 시험 보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임기응변이 거짓으로 거듭 탄로 나자 검사관이의 의심은 극에 달했고, 믿음은 밑바닥으로 추락했다. 이리저리 끌려다니던 그의 얼굴이 점점 붉게 변했다.


“도저히 안 되겠어요. 여기서 중단하시죠. 부적합입니다.”


사무실로 돌아와 종결회의를 하는데 한 분이 분통을 터트렸다. 그러다 다른 분이 끼어들었다.


“왜 혼을 내고 그래요. 사원님 잘못도 아닌데..”


변명할 거리도 없어 죄인처럼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정문으로 차가 줄지어 빠져나갔다. 이제 진짜 올 것이 남아있었다. 본부장실로 팀 전원이 호출되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자초지종 듣던 본부장이 호통쳤다.


“문제가 있으면 사전에 알려줘야지! 각 팀장 불러서 내가 어떻게든 해봤을 거 아냐. 팀장도 몰랐나? 팀장이란 사람이 관심도 없나? 사원 한 명한테 떠맡기고 나 몰라라 하면 다야?”


방은 쥐 죽은 듯 침묵이 감돌았다. 입구에 있던 비서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부적합 결과가 나오면 재검사를 받으면 된다. 하지만 관할 지자체에 이력이 남고, 불시점검을 받게 된다. 문제아로 낙인찍히는 것이다. 적합 결과를 받기까지 설비를 가동할 수도 없다. 생산량이 줄어들면 매출에 직격타다. 나쁜 일이 도미노처럼 연달아 생긴다. 어쩌겠는가. 좌절은 짧게, 수습은 빨리 하는 편이 낫다. 팀장이 해결책을 논하려는지 나를 불러냈다.


“문제가 있었으면 진작 얘기 좀 해주지. 괜히 일만 키웠잖아. 아쉽다.”


착각이었다. 예상을 한참 빗나간 이야기였다. 나는 팀장이 일부러 귀를 닫았던 건지, 정말 들리지 않았던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른 파트에서 나를 ‘소녀가장’이라 불렀다. 혼자 다 짊어지고, 일하는 사람처럼 보여서일까. 가장 무서운 존재는 자신의 상사다. 사원에겐 대리가, 팀장에겐 임원이 두려운 존재다. 밥줄을 움켜쥐고 있는 사람이 권력자다. 사원의 백 마디 말보다 임원의 한 마디가 훨씬 위력이 클 터이다.


이런 상황은 지긋지긋하게 반복된다. 일이 악화된 뒤에야 관심이 쏠린다. 이번만 넘기자는 미봉책이 난무한다. 똥줄 타는 쪽은 실무자다. 퇴사 사유가 한결같은 이유다. 팀 근속연수는 최대 2년이라고 농담 같은 진담이 돈다. 지난 고생이 한순간 물거품이 돼버리자 치밀어 올랐던 부하는 체념으로 바뀌었다.


‘어디서부터 잘 못 된 걸까?’


경영진부터 담당 부서, 유관 부서까지 일심동체가 되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 반복될 일이었다. 전사 환경 인식을 개선하지 않으면 밝은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 혼자만 잘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기업 문화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수 십 년간 굳어진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은 쉽사리 변하지 않는다. 무력한 개인이 단번에 깨부술 재간은 없다.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남은 선택지는 하나. 쉽고 간단하다. 문화를 그대로 수용하고 젖어드는 것이다. 이를 역이용하는 사람도 있다. 고민 없이 회사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되니까. 문제가 터지면 하라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둘러대면 그만인 것이다.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살아갈 원동력을 앗아가는 태도였기 때문이다. 나는 작은 재능으로나마 떳떳하고, 유의미한 일을 할 때 활력이 돋는 사람이다. 노력에 걸맞은 성과도 얻고 싶다. 조직보다 1인 기업이 어울리는 사람인 것이다. 새하얀 도화지에 나만의 길을 그려나가기로 결심했다. 누구보다 통제하기 쉬운 나를 직원으로 삼아서. 안타깝게도 남들이 선망하는 기업, 연봉 높은 대기업이 내게 맞는 환경은 아니었다. 무엇이 정답이라 단정 지을 순 없다. 단지 자신에게 맞는 정답이 있을 뿐이다. 내가 몰랐던 나를 알 수 있게 해 준 기회가 주어졌음에 감사하다. 겪어봐야 알 수 있으니까.




- 저의 연재를 응원하신다면 구독해 주세요 :)

- 인스타그램 : @reader_jh

이전 05화 기록만이 살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