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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지현 Jul 28. 2023

최초의 여직원

'이곳까지 떨어지면 잠시 쉬어가자.'


불합격이라는 단어에 무감각해질 무렵, 마지막으로 지원한 섬유 제조 업체에서 연락이 왔다. 환경공학 학사 졸업장을 받은 지 2년 만에 신발, 자동차 시트, 생활 관련 원단을 만드는 회사로 첫 출근을 하게 되었다. 채용 공고에 따르면 환경 법규에 따라 인허가를 받고, 설비를 관리하고, 작업자를 교육하고, 환경 사고에 대응하고, 공무원을 상대하는 일인 것 같았다. 함께 면접 본 남자 둘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한 명만 수시로 채용하는 경우여서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없을 터였다.


입사 첫날, 인사 담당자를 뒤따라 배치된 부서로 향했다. 이상하다. 사무실은 본관 2층에서 본 것 같은데. 그는 건너편 빛바랜 상아색을 띤 공장동으로 들어갔다. 대화가 불가능한 크기의 기계 소음과 바닥에 질퍽이는 거무튀튀한 염색 폐수가 뒤섞인 곳이었다. 후문으로 나오자 빌라 한 채 만한 탱크와 수십 가닥의 배관이 꼬여있는 설비가 서있었다. 바로 왼쪽의 외진 구석에는 2층 높이의 계단과 판넬로 된 가건물이 있었다. 인사 담당자는 이곳이 사무실이라고 말했다. 철문이 끼익 열리자 사람들이 보였다. 전원 남자였다.


"엥? 여자가?" 시설팀 정 과장이라고 불리는 중년 남자가 말했다.


회사의 결정을 믿을 수 없는 듯한 눈치였다. 역사상 환경 직무에 여직원을 뽑은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나는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최초라니. 내가 새로운 역사를 쓴 장본인이란 말인가. 아니면 남자를 채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는 걸까. 어쨌거나 잘 해내고 싶었다. 첫 타자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후발주자의 존재 유무가 결정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남자만 할 수 있는 일, 여자라서 하지 못할 일이 몇이나 될까? 호기심과 우려가 뒤섞인 시선을 한 몸에 받는 동안 다짐했다.


 ‘선입견을 깨부수자.’


점심시간이 되자 마음은 더욱 굳건해졌다. 구내식당으로 가려면 공장동을 통과해야만 했는데 작업자들이 나를 보면 귀신이라도 본 마냥 멈춰서는 것이었다. 염색기에서 원단을 빼다가 힐끗거리는 사람, 불량을 확인하다 말고 내 뒤통수가 보일 때까지 뚫어져라 응시하는 사람, 내 옆의 상사에게 와 "새로 들어왔습니까" 하며 히죽거리는 사람, 홍일점이니 분위기가 화사해졌다느니, 어쩐지 시원한 웃음이 나오지 않는 말들이 자꾸만 귀에 꽂혔다. 식사를 마치고 본관 앞을 지나가던 중 누군가 나를 불렀다.


"같이 가자. 아직 위치 잘 모르니까. 조금씩 알려줄게." 우리 팀 총괄감독자 김 차장이 말했다.


사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출근길에 현장을 헤매다 지각할 뻔했다. 3만 평 부지가 완벽히 머릿속에 들어오려면 시간이 걸릴 터였다. 안내 표지판도 전달받은 배치도도 전무했으니 말이다. 이곳은 원단동이다, 저곳은 합성피혁동이다, 이것은 대기오염방지시설이다, 저것은 부원료 저장탱크다, 설명하던 김 차장이 불현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검지가 가리킨 곳은 다름 아닌 화장실이었다.


"입사 전에 우리가 얼마나 바빴는지 모르제? 여자 탈의실 만든다고 창고 다 치우고, 여자 화장실 공사하고. 내가 비대까지 달아달라고 해놨데이."


그렇게 현장에 처음으로 여자 화장실이 생긴 것이었다. 나는 별안간 최초의 여직원이자 최초의 여자 탈의실과 최초의 여자 화장실을 만든 자가 되었다. 화장실은 사무실 바깥의 2층짜리 철 계단을 내려와 부원료 회수설비를 지나야 갈 수 있었다. 나무토막이 문틈에 끼워져 있어서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세면대 한 개와 양변기 한 개가 놓인 칸막이. 손은 사무실에 올라가서야 씻을 수 있었다. 수도꼭지에서 검은 녹가루와 누런 물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비대를 제대로 누릴 수도 없었다. 입구에서 가동되고 있는 설비에서 화학물질 특유의 생선 비린내가 진동했고, 변기 근처 바닥에는 커다란 바퀴벌레 시체가 뒤집혀 있었기 때문이다.


아스팔트가 부글부글 끓는 듯한 어느 여름이었다. 사무실에는 산업용 대형 에어컨이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웅웅 거리는 소음을 뚫고 전화벨이 날카롭게 울렸다. 수화기를 든 정 과장의 낯빛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비상! 우수로에 물 색깔이 탁하다는데 만일 폐수가 유출된 거면 공장 문 닫아야 된다!"

  

그의 외침과 동시에 이미 몇 사람이 현장으로 헐레벌떡 뛰어나갔지만 팀 전원이 자리를 비울 순 없었다. 적어도 한 명은 사무실에 남아있어야 했다. 민원 전화나 관공서 연락을 놓치면 일이 커지기 때문이다. 어쩐지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그러나 못 본 척 외면하고 따라나섰다. 회사에서 남녀는 없고, 직원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최전선에서 환경 사고를 막아내는 일이 내겐 더 큰 의미로 다가왔다. 환경공학을 전공한 이유도 다음 세대에게 온전한 지구를 넘겨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현장에 도착하니 검붉은 염색 폐수가 흰 연기를 내뿜으며 출렁였다. 1차로 우수로를 차단하고, 2차로 흡착포를 던지고 건져 올리기를 반복했다. 뙤약볕에 달궈진 땅과 한증막 같은 스팀의 열기, 형언할 수 없는 악취로 구역질과 현기증이 났다. 정 과장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기계 소음을 뚫고 귀에 꽂혀 간신히 정신을 부여잡았다.


“돈 벌기 힘들제? 남의 돈 벌기가 이렇게 힘들다. 하하.”


익숙한 일이라는 듯 웃어 보이는 그의 이마에 구슬땀이 흐르고 있었다. 흡착포가 어느새 바닥을 보였다. 얼른 손 들어 가져오겠다고 말했다. 솔직히 잠시라도 신선한 공기를 마셔야만 끝까지 자리를 지킬 수 있을 것 같았다. 목숨부터 건사해야 큰 일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방재장비가 들어있는 보호구함은 먼 곳에 있었다. 그늘 한 점 없는 길에 안전화가 질질 끌렸다. 흡착포 더미를 양팔 가득 안고 돌아오니, 급한 불은 꺼진 상태였다. 신속히 대응한 결과, 큰 사고 없이 일단락되었다. 곧장 사무실에 돌아와 밀린 서류를 처리하다 보니, 금세 퇴근 시간이었다. 통근버스는 10분 뒤에 떠난다. 우리 팀만 후문에 위치하여 전력질주 해야지만 겨우 탈 수 있었다. 사복을 가방에 아무렇게나 쑤셔놓고 땀자국이 선명한 작업복 차림으로 내달렸다. 몸은 무거웠지만 마음은 두둥실 떠올랐다. 퇴근 전에 해야 할 일을 끝마친 드문 날이었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월요일은 사무실 바깥으로 팀원들의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저번주 금요일에 작업복 입고 통근버스 탔어?” 팀장이 물었다.

“아, 네.”

“생산팀 박 차장이 그러더라고. 얼마나 일을 많이 시켰으면 옷도 못 갈아입고 나왔겠느냐고.”


돌이켜보니 버스에서 내리고도 유니폼을 입은 채 시내를 활보했던 것 같다. 누가 봐도 공장에서 입을 법한 디자인에 걸치기만 해도 명함이 되는 회사 로고도 아닌 근무복. 어떻게 남의 시선에 이토록 아랑곳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창피할 겨를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일촉즉발의 환경 사고를 막아냈던 현장을 머릿속으로 되풀이하느라. 겉모습은 공순이였을지라도 그날의 나는 영웅이었으니까.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내가 나여서 좋다고 생각했던 날이었다.


이어서 철문이 열렸다. 출근한 팀원들이 다들 한 마디씩 내게 던졌다. 정확히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들에게서 처음 본 표정이었다. 눈가에 선한 주름이 잡히고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지난 사고 이후 마음의 문을 열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나의 일을 해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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