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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지현 Oct 22. 2023

우리는 모험가

고전소설은 매번 내 팔에 닭살을 오돌토돌 돋운다. 오래전부터 인생의 진리를 이미 터득한 저자에게 꿈쩍꿈쩍 놀란 터. 책에 나오는 장소, 직업, 교통수단 등을 현대식 단어로 바꾸면 지금 우리네 삶과 전혀 다를 바 없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것이 별반 차이 없기 때문일까? 


고단한 현생에서 나는 자주 선택의 기로를 헤맨다. 그러다 고전을 보면 갑자기 내 인생이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보인다. 내가 잘하고 있는지, 앞으로 가야 할 길은 어딘지,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명확해지는 것이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를 보면서도 그랬다. 산티아고가 연금술을 찾아가는 모험이 곧 내 인생 같았다.


양치기인 그가 몰았던 양은 '직장에 안주하는 회사원'을 가리키는 듯했다. '양들은 물과 먹이만 있으면 즐거워했다'는 구절에서 물과 먹이는 월급과 구내식당으로 읽혔다. '착하게도 그 대가로 양털을 제공하고, 때로는 자신들의 고기까지 내주었다.'는 문장에서 양털과 고기는 우리의 시간과 노동력, 영혼을 가리키는 듯했다. '양들은 친구들이 거의 다 죽고 난 후에야 알아차릴 거야. 내게만 의지해 본능에 따라 사는 법을 잊어버렸기 때문이지. 내가 자기들을 먹어주니까.'라는 독백은 냉혹한 현실과 같았다. 동료들이 하나 둘 지쳐 퇴사해도 우리는 당장 심각성을 느끼지 못한다. 직장이 주는 소속감, 지위, 생계비에 기대면 왠지 안심되니까. 그러나 지나친 의존은 스스로 설 수 있는 힘을 꺾고, 뇌를 마비시킬 수도 있다. 어느 부장님이 내가 퇴사하는 날 던진 말을 듣고 깨달은 것이다.


"치킨집 차리는 게 나은지, 회사 다니는 게 나은지 한 번 보자고."


항상 똑같은 사람들하고만 있으면 그들은 우리의 삶을 차지해 급기야 나를 바꾸려 든다고 한다. 바라는 대로 바뀌지 않으면 불만스러워하면서. 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는 잘 모른다. 그러니까 내 앞길은 스스로 결정하는 편이 낫다. 인생의 갈림길에 설 때마다 나는 책을 펼쳤다. 부모님은 삼 형제를 먹여 살리느라 바쁘셨고, 내 인간관계는 깊지만 좁았고, 고민을 토로할 사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산티아고도 말한다. '원하기만 하면 언제나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들과 함께 하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다'라고.


회사 일은 2년 6개월이면 누구든 어느 정도 혼자 해낼 수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나는 그때마다 이직했다. 혹자는 말한다. 일이 손에 익어 편해질 때인데 왜 사서 고생을 하느냐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게는 배움 없이 같은 일을 반복하는 삶이 더 지옥이다. 강물에 둥둥 떠다니는 죽은 생선처럼 변하는 나를 견딜 수 없었다.


산티아고도 더 넓은 세상을 알고 싶어 모험하기로 작정한다. '인생을 살맛 나게 해주는 건 꿈이 실현되리라고 믿는 것이지'라고 외치며. 아버지는 그를 나무라지만 부러운 눈빛은 숨겨지지 않는다. 사실 그도 세상을 여행하고 싶었지만 안정적인 생활을 포기할 수 없어 가슴속에 꿈을 묻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퇴사 후 세계여행 떠난 부부'나 '하고 싶은 일로 성공한 사람'을 부러워하는 이유도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만 현실과 타협해 꿈을 꾹꾹 눌러두었기 때문 아닐까.


자아의 신화를 찾아 나선 산티아고. 자아의 신화란 '항상 이루기를 소망해 오던 것'이다. 어릴 땐 그 소망이 무엇인지 뚜렷이 알고 있고, 가능해 보이지만 점점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불가능함을 깨닫게 한다고 한다. 이를테면 가수가 되고 싶지만 유명해질 때까지 생계유지가 어려워서, 나보다 탁월한 사람이 많아서 등 생각만 해도 두려운 이유로 우리는 무색무취의 회사원이 되고 만다.


책에 나오는 팝콘 장수도 남보기 근사해서, 집을 가질 수 있어서, 결혼에 유리해서 그 직업을 선택했다. 그러나 원치 않는 일이기에 불행해한다. '어떤 식으로든 인생의 모든 일에는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는 대목은 진리가 아닐까?


주인공은 팝콘 장수를 보며 고민한다. 이미 익숙해져 있는 것과 가지고 싶은 것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기 때문이다. 어디든 갈 수 있는 바람의 자유를 부러워하는 순간 그는 깨닫는다. 앞길을 가로막는 벽은 자신밖에 없다는 실상을. 그리고 이루지 못할 이유도 없다는 것을.


그러나 모험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모아둔 경비를 도둑맞고 만다. 내가 꿈을 안고 이직한 회사에서 된통 당했듯이. 대기업이었지만 종잣돈을 빠르게 모을 수 있을 정도의 월급은 아니었고, 주먹구구식 업무 처리는 마찬가지였고, 롤모델은 없고 일 떠넘기기 바쁜 상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퇴사하고 원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는 만큼의 자금이 없었고, 현금흐름을 만들어줄 자산도 없었기에 버텨야 했다.


패배자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크리스털 가게에서 1년 동안 쉬지 않고 일한 산티아고처럼 돈을 모았다. 처음엔 3년 가까운 시간을 돈 버느라 소모한 것 같아 손해 보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이 문장을 보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찌 되었든 보물에 두 시간 거리만큼 더 가까이 와 있는 셈 아닌가. 이 두 시간 거리를 오는 데 꼬박 일 년 가까운 시간이 걸린 거야.' 어찌 됐든 내가 원하는 삶에 가까워졌다는 사실만 보기로 했다.


주인공은 한 가지 일이 다른 일로 연결되는 신비로운 경험을 한다. 양치기가 되고, 계속 똑같은 꿈을 꾸고, 아프리카에 가까운 도시로 가고, 광장에서 늙은 왕을 만고, 가진 것을 모두 털리고, 크리스털 상인을 만난다. 내가 엔지니어가 되고, 계속 작가를 꿈꾸고, 청년 창업 세미나 모집 공고를 보게 되고, 독립 서점 대표님을 만나고, 건강을 잃어 퇴사하고, 하루 만에 브런치 작가로 선정되고 8천 뷰를 돌파한 경험이 스쳐 지나갔다.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가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는 말이 정말일까.


산티아고는 여정 중 파티마라는 여성과 사랑에 빠진다. 이대로 정착하고 싶었지만 꿈을 위해 다시 길을 나서겠다고 결심한다. 파티마는 기다릴 누군가가 생겼다는 기대로 행복하며, 운명이라면 다시 만날 것이고, 내 남자가 바람처럼 자유로이 길을 가길 원한다고 말한다. '소유하지 않는 사랑'이 참 멋지다. 새로운 일을 시작한 나 또한 최소 5년은 일에만 몰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과거 경험을 돌이켜 봤을 때 한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는 데 필요한 시간이다. 안타깝게도 내 연인은 파티마처럼 생각하지 않았고, 그를 파티마처럼 만들고 싶지도 않아 이별을 택했다.


갈등하는 주인공에게 누군가 말했다.


"결혼하면 일 년간은 두 사람 모두 행복할 것이네. 2년째에는 꿈을 기억하고 있지만 잊으려 무진장 애를 쓰며 살아갈 것이네. 3년째에는 못 이룬 꿈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게 되어 배우자는 자책감을 느끼는 슬픈 여인이 되고, 사랑을 잃을까 두려워 떠나지 못한 과거의 자신을 원망하게 될 걸세. 4년째에는 다시 시작하기엔 너무 늦었다는 걸 아프게 깨달으며 끊임없이 번민할 걸세."


결국 내면의 소리를 외면하면 모두가 불행해진다는 이야기다. 정말 서로를 위한다면 결별도 차선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갖은 고난과 역경을 겪으며 자신을 의심하기도 하지만 주인공은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기로 한다. 내일 죽게 될지라도, 집을 떠나온 후로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았고, 해협을 건너고, 크리스털 가게에서 일해보고, 파티마라는 여자를 만나며 전보다 훨씬 많은 걸 보았다는 자체가 자랑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책에서 줄곧 강조하는 메시지가 있다.


"그대의 마음에 귀 기울이게. 그대의 마음이 모든 것을 알 테니."


하지만 산티아고는 변덕스럽고 간사한 마음에 혼란스러워한다. 나도 직장인의 옷을 벗고 사업가가 되겠다고 떠난 여정에서 뜻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불확실한 미래에 벌벌 떨었다. 공백 기간이 더 늘어나지 않도록 지금이라도 회사로 돌아가야 하나 갈등했다. 북크리에이터이자 작가로 전향했으니, 출판사 문을 두드리며 가능성을 재단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두려움이 솟구칠 때마다 긍정 확언을 되뇌었다. 실패보다 두려운 마음 때문에 포기하는 게 더 나쁘니까.


연금술사는 '마음이 본디 그렇다'라고 말한다. 꿈은 말 그대로 높은 목표라서 스스로 자격이 없거나, 불가능할 거라 생각하기에 두려울 수밖에 없다고. 그러나 어떤 일을 할 때 두렵다면 그 일은 내가 진실로 바라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꿈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뿐이다.


결국 연금술은 금덩어리를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삶'을 뜻했다. 지금의 우리보다 더 나아지기를 갈구할 때,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도 함께 나아진다는 뜻이다. 내게 맞는 방식과 속도로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나는 모든 면에서 나아지고 있다. 몸도 마음도 관계도 능력도 성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이미 자아의 신화를 찾은 건지도 모르겠다. 보물은 바로 앞에 놓여있었는데 이제야 보이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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