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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사랑 May 31. 2019

아무 일도 없는데 다치고 있는 당신에게



臥式人間

Epilogue.



같은 시간에 눈을 뜨고 같은 시간에 집을 나와 같은 시간에 버스 정류장에 가면, 오늘도 대여섯 명의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 저마다 버스를 기다린다.


오늘은 백팩을 메고 뛰어가는 학생과 힐을 신고 핸드메이드 코트를 입은 긴 머리 여자와 물끄러미 버스 노선도를 쳐다보는 중년 남자를 봤다. 그들은 어디를 향해 가려고 나와 같은 시간에 이곳에 왔을까.


예전만큼 우울하지는 않다. 조금은 이성적인 사람이 되었다. 정신은 오히려 멀쩡해서, 보다 덜 건강한 주변 사람의 문제를 눈치채곤 한다. 보이는 것과 달리 외로워하는 사람을 마주할 때면 조금 안쓰러워 숙연해지다가도 그것조차 오지랖 같아 눈을 감아 버린다.


새로 온 옆자리 동료와는 아직 조금 어색하고, 일을 마치면 늘 머리가 띵하다. 술을 사 주겠다고 부르는 친구가 있어 퇴근 후 상수동으로 넘어가 젊은 사람이 많이 거니는 거리를 걸었다.


세상의 어디를 가도 사람, 사람, 사람이 있었다.


한 남자가 나와 같은 길을 걸어가며 앞에서 담배를 피웠다. 그 남자의 옆을 걸어가던 여자가 좀 더 옆으로 멀찍이 떨어져 걷기 시작했다. 그 여자는 아마 속으로 짜증을 냈을 것이다. 나는 그 남자와 거리를 벌리지 않고 그저 묵묵히 담배 냄새를 맡으며 계속 걸었다. 겉으로도 속으로도 짜증을 내지 않았다. 흡연하는 친구가 많아 익숙하다. 간접흡연으로 상할 폐도 별로 걱정되지 않는다. 그것보단 내 인생이 더 걱정된다.


예전엔 이러지 않았는데. 불의를 못 참는 나는 화장실 환풍구로 담배 냄새가 넘어오면 어떻게 해서든 범인을 잡아내려고 이를 갈았다. 복도식 아파트에 살 때 방 창문으로 옆집 아저씨의 담배 연기가 새어 들어오면 복장이 터져서 “아, 담배 냄새!”라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그 이후 담배 냄새가 들어오는 빈도가 급격히 낮아졌다.


요즘은 그냥 그러려니 한다. 그때 당시 내가 쫓아낸 아저씨에게 오히려 연민을 느낀다. 언제부턴가 보이지 않더니 병세가 심해져 돌아가셨다고 한다. 왠지 미안했다. 살날도 얼마 안 남은 사람이 담배 좀 피우겠다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막은 꼴이었다.


하여간 지금의 나에게는 담배를 피우는 자에게 화를 내는 것 대신 칼로리를 써야 할 다른 일이 많이 생겼다. 장을 보거나 청소를 하는 것 같은. 그리고 이상하게 불쾌하지 않아졌다. ‘인간에게 담배란 무엇?’ 심지어 철학적인 성찰을 하기까지 이르렀다.


길거리를 걸으며 담배를 피우는 사람, 그걸 보고 피하는 사람, 그걸 보고도 피하지 않는 사람. 비슷한 나이의 인간인데 어쩌면 행동하는 게 이렇게 다른지 신기했다.


서로 다른 가치관, 서로 다른 기준, 서로 다른 인생.


셋 중 가장 착한 사람은 누구일까? 가장 악한 사람은?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는 건 나쁘지만 사실 남자의 다른 면은 좋을 수 있다. 여자에게도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만큼 나쁜 버릇이 있을지도. 나는 우리가 만약 같은 학교나 회사에 다닌다면 서로 친구가 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술을 마시러 가면서 그런 쓸데없는 걸 궁금해했다.


절대적으로 정해진 정답은 없다. 우리 셋은 모두 각자의 기준에서 옳다. 어쩔 수 없는 나쁜 버릇이 있어도 우리 셋은 모두 젊고 우리 셋의 인생은 모두 가치 있다.


나는 사람들이 그걸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보이는 것과 다른 면. 2차원이 아닌 3차원을 보는 법. 모두의 삶에는 가치가 있다는 것. 그걸 안다면 그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을 관찰했다.


그들은 어딜 가든 하염없이 떠들었다. 전화를 하면서도 떠들고 친구를 만나서도 떠들고 밥을 먹고 술을 마시면서도 떠들었다. 그들은 일과 애인과 미래에 대해 떠들고 있었을 것이다. 짜증 나는 직장 상사에 대해, 동생이나 엄마나 친구에 대해, 좋아하는 축구 선수나 게임에 대해 떠들었을 수도 있다.


사람들이 떠드는 이유는 외로워서일까? 자기 마음에, 삶에 공감해 주길 바라서일까?


하지만 길거리를 걸으며 담배를 피우는 사람의 말을, 길거리를 걸으며 담배를 피우는 사람에게서 한 걸음 떨어져 걷는 사람이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서로 다른 가치관과 기준과 인생을 가진 사람들이 과연 관계를 만들고 대화를 한다고 해서 서로를 완벽히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런 고민.


인간관계는 어쩌면 그래서 재미있는 걸지도. 늘 일정량의 의심과 호기심이 존재해야만 사람들은 서로의 지속되는 삶을 궁금해한다.


인간관계는 즐거움이 아니다. 언제나 아슬아슬한 줄타기와 다름없다. 우리는 넘어질 듯 넘어지지 않으며 쉬엄쉬엄 서로를 생각하고 그러다 불현듯 묘한 힘에 이끌려 다시 발을 딛는다. 너의 담배 냄새는 싫어도 다른 모습은 좋고, 더 알고 싶으니까 다가간다. 그 모습이 우스우면서도 용기 있고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지나온 줄을 돌이켜 보면 그건 행복보다 후회와 슬픔을 더 많이 남기는데.


그렇게, 다들 관계를 발전시키고,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면서 나아가는데, 왜 나는 미련을 품고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쳐 대기만 할까. 사람을 고르는 기준이 너무 높다.


좋은 인간관계를 갖고 싶다면 스스로 노력을 해야지. 그렇게 생각했지만 사실 가장 노력을 안 하는 건 나인 것 같았다. 앞으로 나아가는 발이 남들보다 더뎌 항상 과거에 발목을 붙잡힌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고, 그리워하고, 그때의 나는 왜 더 노력하지 않았나 후회하기나 한다.


실시간으로 과거를 털어 내고 현재와 미래를 향해 힘차게 사는 사람과 발맞춰야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세상일에 관심을 두고 다수를 쫓아 사는 삶은 피곤했다. 변두리에 외따로 떨어져 안위하고 관망하고만 싶었다.


이런 내 삶의 방식이 안타깝다고 말하는 사람들. 왜 더 큰 일을 하지 않냐고, 왜 그걸로 만족하냐고 하는 사람들. 편견, 어림잡기, 판단하기.


나는 물리적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언제나 다치는 느낌이 들었다.



재작년 가을에는 클럽에 갔다. 재미없는 음악을 들으며 술을 마시고 늦은 새벽 재미없는 식당에 들어가 재미없는 인생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갑자기 나는 삶을 살아가는 게 엄청나게 무서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술을 보관하는 냉장고를 정리하는 아르바이트생과 저들끼리 싸워 대는 외국인 무리와 앞에 앉은 내 친구들을 번갈아 보면서 모든 사람은 불쌍하다는 생각도 했다. 왜? 쓸데없이 사회적인 동물이라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모든 사람은 불쌍해, 라고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숟가락을 쥔 손을 내려다보니 손목에 ‘1:30’이 쓰여 있었다. 덩치 큰 아저씨가 클럽 앞에서 우리 손목에 1:30을 쓰고 이때까지는 꼭 안에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딴 건 도대체 왜 쓰는 거지? 이 시간까지 여자들이 클럽에 있어야 성비가 맞으니까? 참 싫다가도 나는 또 연민을 느꼈다. 이걸 써야만 장사가 되는 그 아저씨에게, 이게 적힌 나에게, 그 클럽 안에 있던 사람들에게.


나는 1:30을 바로 지우지 않았다. 머리 아픈 술을 억지로 퍼붓지 않아도, 클럽 안에서 누구의 눈도 마주치지 않아도, 결국 재미없는 인생 이야기만 늘어놓게 되었어도, 그 1:30 덕분에 내가 아주 열심히 살아서 놀았다는 게 실감이 났다.


“다들 삶에 밀리고 치여 여기까지 온 걸 텐데.”


문득 홍대에 사는 친구의 말이 머릿속에 맴돈다. 밀리고 치이고 외로운 젊은이들. 내 손목에 1:30을 쓰던 그 아저씨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그 사람은 내 손목에 1:30을 쓰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도 여자들 손목에 1:30을 쓰는 행위를 싫어할까? 아마 아무 생각 없겠지. 나는 또 쓸데없는 게 궁금해졌다. 다른 사람은 하등의 의문도 갖지 않는 것들이.


쓸데없는 인류애, 쓸데없는 관심, 쓸데없는 호기심. 결국은 또 인간으로 인해 상처받고 도망치게 될 거면서, 나는 쓸데없는 것이 궁금하다.


그리고 누구라도 붙잡고 말하고 싶다. 그저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불안한 거 다 안다고. 삶에는 절대적인 정답이 없다고. 당신이 무슨 일을 하고 어떤 인생을 살든 기죽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당신의 삶은 가치 있고 아름답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당신이 어떻게 사랑하고 웃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여기 있다는 걸 알아 달라고.


그러니 담배를 피우는 당신과 그걸 보고 피하는 당신과 오늘도 네임 펜으로 누군가의 손목에 1:30을 쓸 당신은 아름답다. 당신을 아름답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해라. 그쪽이 틀렸습니다. 교복을 입고 보라색 머리끈으로 머리를 묶고 친구를 보며 환하게 웃는 당신도 아름답다. 당신을 아름답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해라. 그쪽이 틀렸습니다. 남색 후드를 입고 검은 가방을 끌어안고 버스에서 조는 당신도 아름답다. 당신을 아름답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해라. 당신이 틀렸습니다. 아르바이트하는 식당 앞에 유니폼을 입고 쪼그려 앉아 한숨 쉬는 당신도 아름답다. 당신이 아름답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해라. 그쪽이 틀렸습니다. 청춘에게 부럽다고 말하며 어깨에 멘 가방을 꼭 쥐고 구두 소리를 내며 걸어가는 당신도 아름답다. 당신이 아름답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해라. 그쪽이 틀렸습니다.


당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해야 당신의 삶이 되는데 그걸 하지 말라는 사람에게 크게 말해라. 그쪽이 틀렸습니다.


이불에 파묻혀 훌쩍이며 내일은 어떤 시련이 기다릴까 생각하는 당신. 오늘도 차가운 베개. 지겹게 비싼 인생 유지비. 사사로운 생각들. 원인 불명의 불안감. 그런 것들이 끊임없이 괴롭히는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는 당신은 틀리지 않았다.


건드리면 눈물이 날 것 같고, 어딘가에 입술을 콱 찍어 버리고 싶고, 기절하고 싶고, 죽어 버리고 싶은 마음 모두 당신의 것이다.


당신이 틀렸다고, 별것도 아닌 걸로 힘들어한다고, 올바르지 않은 길을 가고 있다고, 당신은 쓸모없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있는 힘껏 크게 말해 버려라.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틀려먹었다고.


내 생각에 젊었을 때 해야 할 일은 오직 이것뿐이다. 나의 목소리를 내는 것. 타인의 기준에 잠식되어 자신을 잃지 않는 것.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얼마든지 고집부려도 된다.


굳이 공격적인 타인에게 관심을 줄 필요가 있을까. 나의 이면을 보지 못하는 2차원에 갇힌 그들의 말에 신경 쓸 필요가 있을까. 어떤 것이든 반대되는 세력이 있을수록 빛나는 법이다. 갈등은 이야기의 필수 요소다. 그게 없으면 디즈니 영화도, 마블 코믹스도 재미없을 것이다. 누가 뭐래도 해적왕이 될 거라는 루피처럼 줏대를 지키는 게 중요하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에 너무 쉽게 휘둘린다. 담담하게 흘려 넘기는 훈련이 좀 필요한 것 같다.


당신이 아름답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당신의 인생을 대신 살아 주지 않는다.


그들이 당신의 인생을 대신 살아 준다고 해도 그 인생은 당신에게 오답이 될지 모른다. 자신만의 정답과 오답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삶과 기준과 가치관이 생기니까. 그래야 인간관계라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다 넘어져도 다시 자신의 줄을 찾을 수 있으니까. 그래야 자기 삶을 살아가며 회의감을 안 느끼니까. 그래야 내 마음대로 살아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니까.


당신의 눈동자. 그곳의 하늘에는 밤이 있다. 밤은 낮보다 생의 본질과 닮았다. 차갑고 고독하지만 아주 자그마한 빛도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


그리고 그곳의 땅에는 사막이 있다. 밤의 사막을 건너는 누군가가 보인다. 낙타를 탄 나그네일 수도 있고 지프차를 탄 푸른 여인일 수도 있고 어쩌면 강아지나 고양이 한 마리일 수도 있다.


나는 당신 안에 담긴 모래를 흘려보내지 말았으면 한다. 아무리 따갑고 까슬할지라도 손에서 놓지 말았으면. 그 모래알을 꼭 쥐고 계속 걸어갔으면.


그냥 그렇게 살아서, 언제까지고 걸어갔으면. 그 모습이 내겐 가장 아름다우니.



내 모든 가짜 친구와 그들이 내는 소음. 일에 대해 불평을 하지. 그들은 사업을 배우고 난 밑바닥을 연구하고 너는 밤새도록 담배를 피웠어. 어쩌면 인터넷이 우리를 키웠나 봐. 아니면 사람들이 바보거나.
사람들이 떠들고 있어. 하지만 넌 아니야. 잔을 들자, 내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모두 난폭해지고 싶어 해. 거기서 벗어나. 그들이 그냥 말하게 둬. 우린 이 세상에서 외로이 춤추고 있으니까. 우린 모두 혼자야.
양날을 가진 사람과 속셈들. 그들은 엉망을 만들고 집에 가서 깨끗이 씻어. 넌 내 최고의 친구야. 우리는 세상에서 홀로 춤을 추고 있지. 우린 모두 혼자야.

Lorde, ‘A World Alone’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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