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사랑 Jan 07. 2020

누가 뭐래도 긴 글을 쓸 것이다


도저히
읽히지 않는
책에 불과한 나는
네가 들여다볼 때마다
나를 펼쳐 볼 때마다
주인공인 나는
민망하고 부끄러워서
얼른 덮어 줬으면 했어

— 곽푸른하늘, ‘읽히지 않는 책’


너무 가고 싶어서 열망했던 회사가 있다.


그 회사는 지원자에게 자유 양식 자기소개서 하나만을 원했다. 뻔한 정보만 가득한 이력서나 영어 성적은 필요 없다고 명시했다. 그에 감동한 나는 정말 자유롭게 자소서를 쓰고 말았다. 앞 장에는 사진을 잔뜩 붙이고 아래로 내 10대와 20대 초가 어땠는지, 내 성격이 어떤지,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다 쓰고 나니 다섯 쪽 분량이었다. 이 정도면 나를 잘 표현했겠지, 내 진솔함과 열망이 느껴지겠지 하며 자신 있게 메일을 보냈다.


다행히 서류를 통과해 면접에 갈 수 있었다. 지나치게 솔직하고 바보 같은 내 자소서가 먹혔다고 생각하니 기뻐 날뛰고 싶었다. 옷은 아주 편하게 입고 오라는 말에 또 정말 자유롭게 입고 면접에 갔다.


처음 면접관을 대면했을 때의 그 수치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면접에 와서야 비로소 자소서를 구겨 던지고 싶었다. 면접관들은 스크롤을 휘휘 내리며 내 자소서를 훑어보더니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열심히 대답했지만 그들은 연신 고개를 갸우뚱했다. “면접 시간이 한 시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사랑 씨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어요. 우리가 왜 사랑 씨를 뽑아야 하는지 설득이 되질 않네요.”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고 싶을 만큼 창피했다. 면접관 중 한 명이 두 문단에 걸쳐 써 놓은 내 전공이 뭔지 물어볼 때 나는 확신했다. 공들여 쓴 나의 자소서는 그들에게 제대로 읽히지 않았구나. 이번에도 나를 어필하는 것에 실패했구나.


회사를 나오자 쓰나미처럼 덮쳐 오는 민망함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깨달았다. 내가 쓴 건 자소서가 아니라 다섯 쪽 분량으로 쓸데없이 자세하게 풀어 놓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내 프라이버시라는 것을.


그들은 아마 내가 무엇을 성취했고 무엇을 할 줄 알고 나의 성장 가능성은 어느 정도인지가 궁금하면 궁금했을 것이다. 내가 어떻게 자랐고 취미가 뭐고 어떤 글을 쓰는지 같은 걸 고용하는 입장에서 궁금해할 리 없었다. 나는 자소서든 뭐든 읽는 사람이 원하는 글을 쓰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내 이력서와 자소서는 형식과 가식으로 가득 채워졌다. 어차피 내 능력을 팔아 돈을 버는 거라면 자소서 같은 게 무슨 소용인가? 솔직하게 나를 드러내 봤자 떨어지면 수치스럽기만 할 뿐이다. 이딴 종이 쪼가리로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실제로 내가 다녔던 회사 중에는 자소서를 생략하고 이력서만 보고 나를 뽑았다는 곳도 있었다. 대충 읽을 거라면 차라리 자소서를 안 보는 회사가 더 쿨하고 담백해 보였다.


그런가 하면 이력서보다는 자소서를 더 꼼꼼히 봐 준 회사도 있었다. 면접에 갔더니 내 자소서 곳곳에 밑줄이 그어져 있었고 군데군데 화살표를 빼서 질문거리를 적어 둔 흔적이 보였다. 내가 제대로 읽혔다는 생각이 든 회사는 그 회사가 처음이었고, 구직자 입장인데도 감동을 받았다.


그 회사가 지금 다니는 곳이다. 어딘가에는 내가 나를 소개하기 위해 길게 쓴 글을 세심히 읽어 주는 곳이 있었다. 나라는 사람을 제대로 봐 주었다는 이유 하나로 따뜻함을 느끼다니. 이게 구직자의 결핍인가 싶었다.          




네 기사는 너무 길어. 이러면 사람들이 읽다가 ‘아, 지루해.’ 하며 팽 던진단 말이야. 여기저기 쓸데없는 건 다 날리고 이 파트는 절반 분량으로 줄여서 와.


나름 공들여 쓴 인터뷰 기사의 피드백이었다. 나는 분량을 쳐내라는 선배의 말에 어찌할 바 몰랐다. 버리고 싶은 문장이 없었다. 다 너무 중요해 보였다. 단순히 누가 뒤로가기를 누를까 겁나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날리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선배의 말이 이해되기도 했다. 세상은 더 이상 긴 글을 원하지 않는다. 사진이나 그림이 곁들여진 콘텐츠나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재미있게 넘어가는 영상이 강세다. 대중은 짧고 강렬하며 흥미롭고 소화하기 쉬운, 말초적 자극을 주는 콘텐츠를 원한다. 꼭꼭 씹어 먹어도 소화하기 어려운 성가신 문장은 버림받을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도 통나무처럼 길게 늘어진 글은 설 자리가 좁아질 거라 생각된다.


문득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씨 451》이라는 책이 떠올랐다. 1950년대에 쓰인 이 소설은 비판적 사고를 막기 위해 독서가 금지된 5세기 후 미래를 그린다.


주인공 가이 몬태그의 직업은 책을 태우는 방화수다. 화씨 451도는 책이 불에 타는 온도인 섭씨 233도를 뜻한다. 미래 사회에서는 인간 존재에 관한 고민은 사라진 지 오래이며 차가 너무 빨라 사람을 치어 죽여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히려 폭주를 재미로 하는 사람까지 등장한다.


무수한 고전은 단 몇 줄로 내용이 정리되고, 사람들은 눈 깜짝할 새 할 일을 끝마치고 재미와 쾌락만을 추구하는 일상을 살아간다. 마치 이벤트처럼 일어나는 전쟁은 눈치챌 새도 없이 몇 초 만에 모든 것을 재로 만들며 끝난다. 심지어 부부는 자신들의 첫 만남이 어땠는지도, 결혼기념일이 언제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정말 이렇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과 꽃과 사랑이 사라진 시대의 인간은 이런 모습일까?

나는 내 글이 외면받는 상황을 몇 번 겪어 봤다. 앉아서 타자만 치면 쓸 수 있는 게 글이라지만, 글도 한순간에 뚝딱 나오는 게 아니다. 나름 고심해 구성을 짜고 몇 시간에 걸쳐 쓰기 때문에 누군가의 엄지손가락에 휘휘 스크롤이 내려가는 걸 보는 게 좋지만은 않다.


그런데도 나는 긴 글이 쓰고 싶다.


너무 길고 지루해서 읽다가 팽 던져지는 글이라도 안 줄이고 싶다.


승객이 별로 없는 노선을 달리는 버스도 그 버스가 아니면 안 되는 승객이 있으니까 매 정거장 멈추며 끝까지 달린다. 모두 중요하고 알리고 싶은 감정이니까 읽다가 버려진다고 해도 마지막까지 읽은 사람에게 따뜻함을 전할 만큼 충분히 표현하고 싶다. 글의 형식이 뭐가 됐든 시간이 오래 걸려도 읽고 난 후 유의미한 감정을 안겨 주는 글을 쓰고 싶다.


나는 그 회사에 다니기에는 성향이 맞지 않아 퇴사했다. 늘 그랬듯 돈 버는 글쓰기랑은 조금 안 맞는 거 같았다. 


퇴사하기 전 전무님과 식사를 했다. “글이란 것은 마음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죠.”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면서 살라고 격려했다. 사회에는 이상한 사람만 있는 줄 알았는데 나의 의견을 존중해 주는 사람도 많았다. 몇 달 후 재취업이 된 뒤 그분께 감사 인사를 담은 편지를 보냈다.




메모장에만 끄적이던 글을 스물두 살 무렵부터 블로그에 끄적이기 시작했다. 소소한 관찰이나 남모르게 속에 담아 두었던 고민거리를 풀어냈다. 전무님 말대로 글은 자신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아서 나는 글을 쓰면서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혼자 우울을 달래곤 했다.


시간이 지나니 방문자도 늘고 블로그에 애착이 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댓글을 쓸 수 없는데도 안부 게시판까지 찾아와 격려와 조언을 해 주는 따뜻한 이웃들이 있어 쉽게 블로그를 끊을 수 없었다. 그러기를 3년 정도. 많은 글이 쌓였고, 내가 왜 글을 쓰는지 되돌아볼 때가 되었다.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을 쓴 정문정 작가님은 북 콘서트에서 “글을 쓰고 책을 읽는 건 가성비가 좋은 취미였어요.”라고 말했다. 확실히 그렇다. 돈도 안 들고, 마음에 자갈 같은 게 많아서 그것을 걸러 내고 자신을 성찰하기 위해 시작한 글쓰기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 글로 위로받았다는 사람이 하나둘 등장했다. 말로 할 수 없는 뿌듯함을 느꼈다. 언제는 너무나 진솔한 반응을 보고 마음이 미어져 눈물이 나기도 했다.


세상에는 아픈 사람이 많고 그들을 위로할 사람은 그 아픔을 알고 동조하는 사람뿐이라 생각했다. 나는 더 많은 사람을 위로하고 싶었다. 사람에게 상처받고 사람에게 실망하지만 사람에게 구원받고 사람에게 위안을 얻기도 하는 것이 못내 신기했다.


도처에 도사린 외로움. 그런 것을 인식하는 걸 멈출 수 없는 건 왜야. 그리고 그런 것을 쓰지 않을 거면 글을 쓰는 이유는 무엇이고.


사람을 위해 글을 쓰고자 다짐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깨닫기 전까지만 해도 내가 글쓰기로 원했던 건 타인의 동정이었다. 위로받기만 원했지 내가 누군가를 위로할 생각은 못 했다. 나는 불완전한 사람이어서 감히 내가 타인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늘 나에 관한 모든 것을 이해받고 공감받길 원했다. 누군가 나를 잘못 판단할 때 어떻게 해서든 바로잡고 싶었다. 누가 나를 생각 없는 아이로 여기는 게 싫어서 나도 생각이 깊고 마음이 아픈 아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표현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내 글이 제대로 안 읽히는 게, 대충 읽히는 게 무서웠다. 읽히지 않는 책이 되고 싶지 않았다. 대충 읽히면 오해가 생기고 쉽게 판단당하니까. 그러면 글을 쓴 의미가 없으니까.


그러던 중 시 창작 수업 때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교수님은 나에게 자의식에 갇혀 있다는 평을 남겼다. 자기화된 언어는 사용하지만 속을 깨고 나와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게 써야 소위 읽히는 시가 될 거라는 말이었다. 나는 어쩌면 내가 읽히지 않는 이유는 나 자신이 좀처럼 읽는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길고 지루하기만 한 책이기 때문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런가. 너무 복잡하고 어려운 사람이 되어도 안 좋은 건가. 그럼 제대로 읽히지 않기 때문에 점점 더 외로워지는 건가.


실제로 그런 것 같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취향을 이해하고 나를 제대로 관심 있게 읽어 주는 사람과만 연락하게 된다. 나와 장르가 너무 다른 사람 사이에서는 이질감이 느껴져 같은 나라 사람이 맞는 건가 싶을 때가 있다. 어렵기만 한 나는 하룻저녁 시간 때우기 상대로만 여겨지는 것 같을 때도 있다. 아무리 좋아도 너무 다르면 관계가 지속되기 힘든 것 같다.


하지만 상대방에게 소화되기 쉽게 내 속을 깨고 나오지 않아도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굳이 나를 버려서까지 노력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적지만 나를 읽어 주고 나에게 위로받는 사람을 위해 책을 이어 나가면 되는 게 아닐까. 혹시라도 기다릴 승객을 위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운행하는 버스처럼 천천히, 꾸준히 나만의 노선을 타면서.     



“저는요, 가끔 이런 생각을 해요. 제트카를 타는 사람들은 풀이 어떻게 생겼는지, 꽃이 어떻게 생겼는지 잘 모를 거예요. 왜냐면 그 차는 너무 빠르기 때문에 바깥의 풍경을 자세히 볼 수가 없거든요.”
소녀는 열심히 얘기를 계속했다.
“그 차를 타는 사람들은 녹색 얼룩을 보면 ‘아, 이건 풀이야.’ 그럴 거예요. ‘분홍색 얼룩? 그건 장미꽃 정원이지! 하얀 얼룩들은 거리에 늘어선 집들이고, 또 갈색 얼룩들은 소 떼지, 아마?’ 삼촌이 한 번은 고속도로에서 천천히 달려 봤대요. 시속 60킬로미터로. 근데 그랬다고 잡혀가서 이틀 동안 감옥에 있었어요. 재미있지 않아요? 또 어떻게 보면 서글프기도 하고요. 안 그래요?”
“생각하는 게 너무 많군요.”
몬태그는 조금 어색한 말투로 대답했다.
… “아저씨가 틀림없이 모르고 있는 걸 또 말할 수 있어요. 아침에 잔디밭에 나가 보면요, 이슬이 맺혀 있어요!”
그건 나도……. 몬태그는 갑자기 조바심이 났다. 내가 그걸 알고 있었던가? 아니면 몰랐던가? 그는 선명하게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하늘을 보실래요?”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위를 가리켰다.
“저 달에는 사람이 있었어요.”
몬태그는 잠시 고개를 들어 보았을 뿐이다.

— 레이 브래드버리, 《화씨 451》
이전 16화 내가 만약 10만 원을 잃어버린다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