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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사랑 May 24. 2019

내가 만약 10만 원을 잃어버린다면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상상을 자주 한다.


끔찍한 상황을 미리 예견하고 시나리오를 짜 두면 실망이 덜하고 좀 더 사태를 담담하게 관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은 버스를 타고 가다 문득 가방에 든 10만 원을 잃어버리면 어떨까 상상했다. 사기를 당한다든지 도둑을 맞는다든지, 어떻게든 10만 원이 공중분해되는 상황을 가정해 봤다.


화가 날까?

별로 그럴 것 같지 않았다.


내게 10만 원이 있다면 기껏해야 맛있는 걸 사 먹고 옷을 한 벌 사든지 술을 마시겠지. 그 정도 가치의 돈을 잃어버린다고 생각하니 별 느낌이 없었다. 내게 10만 원이 있다고 해도 원하는 세상을 만들거나 꿈을 이루거나 능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키는 데 별 도움이 안 될 테니까.


아니, 어쩌면 100만 원, 1000만 원, 1억이 있어도 내가 바라는 세상, 내가 원하는 나는 되지 못할 것이다.


출세해 좀 더 넓은 집에서 풍족한 생활을 하게 돼도 문밖으로 나서면 여전히 변하지 않은 세상이겠지. 왜 사는지 답을 알게 되지도 않을 테고 삶이 허무한 게 변하지도 않을 테고 바꾸고 싶은 사람을 바꾸지도 못할 테지.


나는 매달 일해 돈을 벌어 밥을 먹고 세를 낸다.


사람을 만나 웃고 떠들다 다시 혼자가 되어 외로워진다.


돈 같은 거 많이 필요하지도 않으면서 부자가 되었음 좋겠다 생각하고, 돈 걱정을 안 해도 되는 사람은 어떤 기분일지 단 하루라도 느껴 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돈이 많아도 어차피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텐데 말이다.


그러니 10만 원 따위 잃어버려 봤자 하나도 슬프지 않을 거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어디까지 허무해질지 무서웠다. 내가 10만 원이 아니라 목숨을 잃어버려도 아깝지 않을 거라 생각하게 될까 봐 무서웠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소중한 것을 더 많이 만들어야겠다.


하루를 무사히 마치고 버스에서 내려 첫 걸음을 뗄 때 느껴지는 안도감. 모두의 우울과 닮은 가을과 겨울 사이의 바람. 카푸치노 거품처럼 부드러운 당신의 손바닥. 언제나 반갑게 나를 부르는 목소리들. 나를 향하는 선한 마음들.


평생 번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삶의 가치에 무게를 더하는 그런 아름다운 순간을, 감정을 포착하는 것이 생의 이유일까. 그것이 내가 제명까지 살아 내도록 도와주는 인도자인 걸까. 조금은 내 목숨을 아깝게 하는 존재인 걸까.


나는 몇 년 전, 사람이 사람을 도우는 경이로움을 느끼기 위해 내가 살아 있는 거라고 결론을 내렸었다. 어째서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나. 시간이 지나면 좀 더 획기적인 삶의 이유를 떠올릴 거라 생각했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따위 삶의 이유. 그런 것보다 10만 원을 택하는 게 더 속 편할 텐데.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을 좇으며 사는 게 상식적인 삶일 텐데. 그럼에도 난 돈으로 살 수 없는 아름다움을 포기할 수 없다. 그것이 내 삶을 지탱하는 지지대이기에.


생의 의미를 찾지 않고선 살아갈 자신이 없는 나는 확실히 나약하지만 그건 나쁜 게 아니다. 의미 없는 생을 사는 것보다 의미를 찾으며 어렵게 사는 생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택시 기사는 신호를 위반하며 과속 운전을 했다. 빨간 신호에 걸릴 때마다 푸욱 한숨 쉬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나는 그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뭐라고 말하든 그를 바꿀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가만있었다.


힙합은 간혹 멋진 일을 해내지만 힙합 클럽은 그저 그랬어. 일을 마친 직장인으로 보이는 남자 한 명이 노트북 가방을 메고 열심히 춤을 추었다. 저 사람에겐 저게 생의 의미인가? 고속도로에서처럼 빠르게 휘휘 지나가는 가로등을 보며 땀 흘리며 춤추던 그 남자를 떠올렸다.


이대로 사고가 나면 어떻게 될까. 그런 상상을 해도 무섭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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