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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사랑 Jan 07. 2020

우리는 탓을 하네


오랜만에 몸을 실은 전철에는 중년의 어른이 많았다.


연신 비닐봉지의 손잡이를 꼬깃꼬깃 조몰락거리는 검고 주름진 손을 봤다. 푹 수그린 고개 때문에 보이는 엉성한 정수리와 담배 냄새가 날 것 같은 얇은 점퍼. 그런 차림에 어울리지 않는 분홍색 운동화가 묘하게 자꾸 시선을 끌었다.


나는 그가 성선설을 대표하는 사람이라 믿고 싶었다. 어떤 악한 일을 했든 그런 일 따위 하지 않은 선한 사람이라 믿고 싶었다.


어둠에 잠식되는 노을빛을 받으며, 그렇게 계속 비닐봉지의 손잡이를 조몰락거리는 그 모습에서 나는 눈을 뗄 수 없었다.


세상은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 돌아간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주장을 기어코 현실로 구현해 낸다. 그들은 검고 주름진 손도, 냄새나는 점퍼도 그리고 그것들과 어울리지 않는 분홍색 운동화도 갖고 있지 않을 것이다. 고리타분하며, 주름진 손 대신 까맣게 고인 웅덩이를 마음속에 갖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이 우리의 원죄를 대표한다 믿고 싶었다. 어떤 선한 일을 했든 그런 일 따위 하지 않은 악한 사람이라고 믿고 싶었다. 우리에게는 비난하고 화풀이할 대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럼 나는? 나는 어떤 사람이지? 내가 가진 선함과 악함은 어떤 모습이지? 다들 어떤 모습을 보고 나에게 다가오는 걸까.


나는 기만자다. 아마도. 아니면 경계인이다. 혹은 선과 악을 심판하는 세상의 엑스트라. 깨진 안경을 쓴 아홉 살 어린아이. 하지만 사실은 그 어떤 것도 아닌 그냥 인간. 화와 외로움을 구분하지 못하는 멍청이. 누구든 탓을 해야만 자존감을 지킬 수 있는 비겁한 인간.


인간에게 필요한 건 믿을 게 아니라 탓할 것일지도 모른다.


세상 모든 탓을 받아 줄 신적인 존재가 필요하다. 그런 존재가 없으니 우리는 서로를 탓한다. 침을 튀기며 눈앞에 선 사람을 삿대질하고, 불필요하게 경적을 울려 대고, 설레설레 고개를 가로저으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쉰다. 그 화들은 너무 무거워서 물속으로도 가라앉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세상에 우리의 모든 원망을 다 받아 줄 존재가 나타난다면 그는 어떤 모습일까. 그 어떤 비겁함도 악랄함도 없이 나약하고 상처 난 맨발을 가진 구원자의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어떤 울분과 원망도 사그라지게 할 처량하고도 숭고한 모습으로 눈앞에 나타났으면.


더 이상 화가 많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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