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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사랑 May 17. 2019

응, 너 우울한 거 맞아



“내 얘기 안 듣고 있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럼 그냥 얘기하지 말고 나 집에 갈까?”

“그건 싫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묘한 힘을 가진 말이라고 생각했다.


적당히 날카로우면서 내가 느끼는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는 말. 내가 가진 언어를 당신이 알아듣기 쉬운 언어로 번역한 것 같았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렇게 쉽게 이야기하지 말라고. 상대를 당황하게 하는 걸 알면서도 모난 말을 내뱉고 말았다. 당연히 ‘어쩌라고’ 상태가 되는 당신은 나를 포기하고 떠나려 했지만 그건 또 싫었다. 혼자 남겨지기 싫으면서 이야기는 듣지 않는 꼴이라니.


나는 늘 누군가 나에게 관심을 가져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누가 나에게 관심을 가지면 회피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러면서 의심하고 무시했다. 타인의 관심을 깔보았다.


인턴에서 정규직이 되면서 생존이 점점 안정기에 접어들고, 끊었던 게임을 다시 시작하며 스트레스 해소도 하고, 새 소설을 쓰면서 취미 생활도 제대로 하고 있다. 나름대로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낸다고 생각했는데 불현듯 나는 다시 어두워졌다. 그냥 이러고 사는 게 지겨워서.


살아 있는 게 지겹다.


밖에서 어떤 삶을 살고 돌아와도 늘 혼자 누워 있는 게 외로웠다. 한국이 어디와 축구를 하든 별 관심 없으면서 옆집에서 함성이 들릴 때면 씁쓸했다. 사람들이 환호할 때 시끄럽다고 귀를 막고 혼자만의 공간에서 내면으로만 침잠했다.


자본에 함몰되는 사회와 예술이 싫고 사색하길 경시하는 사람이 싫었다. 나에게 특이하다 말하는 사람들이 더 특이해 보였다. 나는 왜 어디에도 속하지 않을까?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인간은 없다고 결론 내렸으면서. 나는 속으로 외롭다고 울부짖으며 다시 그렇게 누워만 있었다. 나갔다가는 또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 채 상처만 받고 돌아올 거 같아서.



가끔 나는 한때 너무나 잘 알았던 걸 까먹는다.


예를 들면 말을 하는 법, 글을 쓰는 법, 친구를 사귀는 법, 질문하지 않고 확신하는 법,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사람들과 대화하는 법.


어쩌면 지금은 상처받지 않는 법을 까먹은 게 아닐까?


또 근원적인 물음이 불쑥 떠올랐다. 왜 살아가야 할까.


별로 미래가 지금보다 획기적으로 행복할 것 같지 않다. 10년 후나 30년 후나 지금과 같은 음식을 먹고 지금과 같은 물건을 쓰면서 그냥저냥 살아갈 것 같다.


나는 파괴된 세상 속에서 목숨을 위협받으면서도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는 재난 영화를 좋아한다. 엔딩 크레디트를 보고 현실로 돌아올 때 그래도 내가 저들보다는 낫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어서였다. 드라마나 소설책에서 고생하는 인물들을 보면서도 끝까지 살아 있으라 응원했다. 그렇게 희망을 얻었다. 저들도 저리 사는데 나라고 못 살아갈 게, 아니 안 살아갈 게 뭐 있겠나?


그랬으면서, 정작 내 인생을 살아가는 게 지겨웠다.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이러다 죽으면… 그냥 죽는 거겠지. 언제부턴가 죽음이 담담해졌다. 아니, 생을 이어 가는 게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인가.


그 후 나 자신이 약간 이상해진 것 같았다. 이리도 어둡고 불길한 생각을 하는 게 내 본모습인 건가. 종교를 가져 볼까. 불교는 어떨까.


밖에서 떠들고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는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면 내 농담에 웃었던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그들에게 나의 진짜 모습을 표현하는 게 정말 옳은 일인가? 그랬다가 원하는 반응을 얻지 못하면 또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하며 으르렁거리지 않을까? 그렇다고 아예 관심을 받지 않으면 외로워하고.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는지.



내 이야기를 들은 K는 넌 우울한 상태라고 했다.


내가 다시 우울해졌다고? 별로 슬픈 일도 없고 힘들지도 않은데 어떻게 다시 우울할 수 있지? 진심으로 의문이었다.


응, 너 우울한 거 맞아.



K는 알싸한 마라샹궈를 더 본질적으로 알싸한 마유에 찍어 먹으며 말했다. 어떻게 또 우울할 수가 있어. 어떻게!


인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K는 과거를 회상했다. 너는 자각하지 못하겠지만 몇 년 전의 너도 상당히 상태가 안 좋았다고. 잘 놀다가 뜬금없이 사람들 있는 곳에 못 있겠다며 펑펑 울면서 집에 돌아가지 않았었냐고. 그래, 지금도 너 우울한 거 맞다고.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게 무서워 불시에 울던 때가 있었다.


4년 전, 나는 그 당시의 전 남자 친구가 손꼽아 기다리던 ROTC 파티에 참석하지 않았다. 파트너 없는 남자 친구는 서빙이나 했다며 무척이나 서운해했다. 나는 내 마음 상태가 이상해졌다는 걸 깨닫지 못하고 그냥 평소같이 “나는 사람 많은 데가 무서워.”라고 말했다.


속으로 ‘나 따위가 그런 파티에 어떻게 나가.’, ‘다들 날 보며 볼품없다고 생각할 게 뻔해.’, ‘나는 그런 곳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야.’라고 자기 비하를 했는데 이런 생각은 누구나 다 하는 줄 알았다. 파티에 가지 않은 사람은 변명하고 파티에 혼자 간 사람은 화를 내면 끝이었다.


친구를 만나면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에 터덜터덜 걸으며 발끝으로 뚝뚝 눈물을 흘렸다.


나 같은 애를 만나 주는 게 너무 고마워서. 이런 고마운 사람들을 놓쳐 버릴까 봐, 내가 또 모든 걸 망칠까 봐 무서워서.


그즈음 집에 가서 자기 전마다 나에게 상처를 냈다. 화와 슬픔을 내보일 곳이 없어 모두 나에게로 돌리던 때. 역시 그런 행위가 그리 심각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뭐, 나보다 심한 사람도 많은데 이 정도쯤이야. 그런데 내 말을 들은 상담자는 말했다.


“지금 임상적으로 상담이 필요한 상태예요.”


어쩌면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 듣고 싶었던 걸지도.


가끔 그런 사람이 있다. 아픈데, 내 안에 슬픔이 차고 넘치는데 내 입으로 아프다, 슬프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 숨기는 사람. “요즘 괜찮아? 별일 없어? 힘들어 보여.” 이런 말 한마디에 울컥 울음을 터뜨리는, 힘든 거 슬픈 거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사람을 늘 하염없이 기다리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과는 거리가 멀 줄 알았다. 나만큼 나를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내가 기다 하면 기고 아니다 하면 아닌 거야. 난 괜찮다고. 그런데 아니었나 보다. 역시 나를 제대로 봐 줄 누군가가 필요했나 보다.


응, 너 우울한 거 맞아.


나는 무심한데 상대방이 나의 우울을 말할 때면 그렇게나 기분이 이상한 것이었다.


언제나 그랬다. 우울해지면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확률이 높아진다. 그러니까 미리 알고 대피해야 하는데 사람을 만난 뒤에 알게 되면 얼떨떨하다.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전 남자 친구가 “솔직히 힘들다”고 말하기 전까지는 내가 그 정도로 우울한 줄 몰랐다.


“체감하는 우울은 낮은데 실제 우울 척도가 높은 건 만성이기 때문이에요. 약을 먹는 게 도움이 될 거예요.”


그때 또 다른 상담자는 MMPI 검사 결과를 설명하며 그렇게 말했다. 냄새나는 방에 오래 있다 보면 코가 익숙해져서 냄새가 안 느껴지는 것과 같았다. 하, 그런 말조차 지겨웠다.



의사 선생님을 찾아가서 이렇게 말했다.


그냥 보통 사람의 보통 기분만큼만
느꼈으면 좋겠어요.


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라면 자신이 해결해 줄 수 있다는 긍정의 표시였을까? 묻지는 않았다.


보통 사람의 보통 기분.


말해 놓고 보니 궁금했다. 그게 뭘까? 나는 언제부터 그걸 모르기 시작했을까? 무엇이 날 그것을 모르도록 만든 걸까? 내가 그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사람들이 내게 당신은 우울하다고 말하는 걸까? 질문은 끝나지도 않아. 그러나 대답해 줄 사람은 늘 그랬듯 없다.


보통 사람의 보통 기분만큼만.

보통 사람의 보통 기분만큼만…



나는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데 남들이 넌지시 이야기를 해 올 땐 뭔가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내 생각에 우울은 행복하다고 느낄 때도 찾아올 수 있다.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행복이 우울을 일시적으로 가리기 때문인 것 같다. 우울해도 어떻게든 웃긴 건 볼 수 있고 맛있는 건 먹을 수 있고 쇼핑은 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난 아무렇지 않다고 자신을 세뇌하고 그냥 넘어가는 것이다.


또 우울에도 급이 있다고 무의식중에 생각하기에 자각하지 못할 수도 있다. ‘뭐 이런 걸로 우울하다고 그래? 이보다 심했던 적이 얼마나 많은데. 이깟 건 우울한 것도 아냐.’ 여러 매체에서 심한 우울증을 앓는 사람을 보며 난 저 정도는 아니잖아,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가서 내 마음을 들여다볼 기회를 놓쳐 버린다.


어떤 병이든 증세나 강도가 다양한 것처럼 우울도 다른 형태로 찾아올 수 있는 법이다. 엄살이라 오해받을까 망설이면 결국 병만 키우는 꼴이 된다.


그러니 누군가 나에 관해 이야기할 땐 귀를 기울이기. 내가 보는 ‘나’가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늘 잊지 말기. 남을 통해 내 상태를 눈치채는 연습을 하다 보면 언젠가 우울 주의보를 잘 알아차릴 수 있지 않을까. 알아차린다 해서 가시진 않을 테지만, 적어도 대비할 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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